[길이 닿는 암자] 금빛 관음도량 무등산 규봉암
무등아 산 하나 가져라
도심 어디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1,000m가 넘는 산, 거대하고 웅장하나 완만하고 부드러워서 주변에 너른 평야를 거느린 산, 호남의 명산 무등산이다. 예부터 상서로운 돌산은 모습 그대로 차별과 분별이 사라진 무등의 불국토로 여겨졌다. 원효봉, 의상봉 등 산의 구석구석이 모두 불교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규봉암은 무등산의 동쪽 950m 높이 광석대 지대에 자리하며 주변에는 삼존석불을 비롯해 송광대, 법화대, 청학대 등 10대가 있다. 세종 때 전라관찰사 권극화가 남긴 「서석규봉기」에는 신라 의상 대사가 창건했으며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그의 제자인 진각을 비롯한 여러 국사스님이 도를 이룬 곳이라 적혀 있다. 이후로도 지공과 나옹 스님이 거쳐 가며 그 자취를 남겼다. 지금은 규봉암에서 행자 생활만 5년을 한 주지 무등 스님과 은사인 정인 스님이 규봉암에 적을 두고 있다.
글·사진 유동영
행자 생활 3년 차 되는 날인가, 은사스님이랑 아침공양을 허는데 수제를 들자마자 “무등아 산 하나 가져라” 그러시더라고. “왜요” 글더니 “내가 어젯밤에 기도를 험서 생각을 혔는데, 너헌티 무등산을 주는 것이 좋겄드라” 이러시더라고. 내가 그리서 무등이 됐재.
규봉암에서 힘들었지만 재밌는 일이 많았어. 눈이 이렇게 와불잖아요. 규봉암은 쪼금 오는 것도 아니고 쫌 온다 허먼 1m 정도 와불고 아니먼 30cm, 40cm야. 그래 지난 12월 31일에도 그 정도 내렸재. 하루는 은사스님이 시내 나가신다고 챙기시더라고, 그러먼 은사스님 눈 속을 빠짐서 가실 수밖에 없응게 내가 앞에서 쓸고 가재. 은사스님은 뒤에 따라오시고. 장불재까지 한 40분을 걸어야 돼. 내가 앞으서 눈 치먼서 가재 싸리비로. 거까지 치울라먼 얼마나 힘들어. 그렇게 허고 장불재 차에까지 왔는디, 은사스님 그러시더라고 “내가 키를 안 가져 와부렀다”고. 어메 그러먼 어떡혀. 내가 다시 가야재, 규봉암까지. 그때 인자 행자는 죽어나불지. 그 추운디 그러고서 절에 와불먼 난 지처부러 인자. 거진 8km잉게. 눈길로 8km. 허허 그런 것은 옛날 일이고….
우리 은사스님이 나옹 스님의 ‘토굴가’를 좋아 허요. 여그서 깨달은 자리를 노래한 것이라고.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한 칸 토굴 이것이 규봉암이재.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석경이 여그 너덜길이고.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내가 작년에 오대산 북대 상왕선원서 하룻밤을 잣는디 나옹 스님 시 속의 풍경이 아녀. 음력이라도 춘삼월에 거근 꽃이 안 피재. 긍게 나옹 스님이 토굴가를 지으신 디가 오대산 북대가 아니라 여가 맞다고 생각허재.
은사스님이 목탁을 갈쳐 주시는디 나는 영 재주가 없드라고. 소리가 안 돼. 그라니 목탁 두들기는 것이 영 아녀. 스트레스 받드라고 그것이. 그리서 은사스님이 송광사 가 계시는 동안 목탁을 아궁이 장작불에다 넣어 부렀어. 이것이 없으먼 습의를 안 해도 되겠지 싶어서. 지금 생각허먼 어찌께 고런 얼빠진 생각을 혔는지 몰라. 그 목탁이 살구나무에 옻칠 헌 것이었는디. 엄청 존 것이었재. 근디 그다음 날이 법회 날이어서 은사스님이 송광사서 올라오셔서 목탁을 찾으시더라고. “목탁이 어디 가버렀는가 없다” 그러셔. 시치미 뚝 뗐재. “저도 모릅니다” 험서. 긍게 난리가 나분 거야. 절에 목탁이 없어분게. 당장 법횐디. 아무리 찾아도 없응게 은사스님이 신도회장 보살님헌테 전화를 허시더라고. “회장 보살 20년 동안 목탁이 없은 지가 없는디 목탁이 없어야. 빨리 목탁 구해오쇼” 허고. 허허 내가 목탁을 태운 사람이여. 그리도 은사스님은 지나불먼 뭐라 안 허셔. 한참 나중에 말씀을 디렸드니 “무등이나 됭께 그라재 누가 그러겄냐” 그러시더라고. 이미 알고 계셨겄재.
5년 동안이나 행자로 델꼬 계셨던 이유로 은사스님이 그랍디다. “공부 못 해가지고 맘에 안 드니까 중 될라믄 멀었으니까, 중도 될 놈이 돼야지, 안 될 놈이 되믄 안 되니까, 다 이겨내야 되는 거지. 계첩 하나 바라고 머리 깎은 거 아니니까. 자성불 깨달으면 되지 종이 쪼가리 하나 갖고 도 얻을라고 그러냐. 구할 게 뭐 있나. 출가자도 없는데 한 사람이라도 잡아야지 하는 거 세속 논리여. 해가 하나만 있으면 되지 수십 개가 필요하지 않잖아. 못 견디고 나가믄 그만이지. 수행자만 남으면 되지. 물론 어중이떠중이도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주객이 바뀌면 안 되잖아.” 은사스님이 법명을 주시는 3년 동안은 말을 안 놓아. 그때까지는 존칭 다 쓰시고 새 이름을 주시고는 하대 하시더라고. 은사스님 아니었으먼 지금 만치도 못살재. 나는 은사스님을 존경혀. 은사스님을 늘 정면으로만 봐. 다른 디서 볼 것이 뭐 더 있어. 은사스님이 상좌한테 안 좋은 말씀 안 하시거든, 당신 제자니까 제대로 가르쳐 주시겄지. 그러니 은사스님 말씀은 늘 나헌티는 감로법문이여.
여그 장불재 씨디 씬 바람을 견딤서 넉넉허고 듬직허게 제 자리를 지키는 저 무등산을 봐. 이 무등이도 꿋꿋이 제대로 살 것이여.
올 초파일이 지나면 무등 스님은 출가 고향인 규봉암에 다시 돌아와 걸망을 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