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물건이 있다”_혜능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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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상(會上)을 이루다
한 차례 세찬 비바람이 지나간 후였다. 하늘은 맑고 청량한 기운으로 온 대지를 덮고 있었다. 어느덧 혜능의 문하에는 전국 각지에서 출가자들이 모여들어 큰 회상을 이루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수행자가 눈 밝은 스승으로부터 지도받기를 자청하며 수행에 정진했다.
혜능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행에 집중하며 크고 작은 의문을 토해내는 제자들을 기특하고 대견하게 여겼다. 하지만 여래의 미묘한 선심(禪心)을 이해하는 제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제자들에게 법문하고 수행의 깊이를 묻고 답하며,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격려하며 지도를 반복했지만, 명확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불법의 핵심을 한마디로 설명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항상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달리 알려줄 방법도 없었다. 어느 때는 가장 쉬운 설명으로, 어느 때는 가장 완곡한 표현으로 법문해 봐도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 #2 제자의 견해를 점검하다
어느 날 혜능은 법문 중 단 한 사람의 대답이라도 나오기를 바라며 법상에 올랐다. 그리고 법회에 모인 대중을 향해 말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다[有一物].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고, 특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느 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공능(功能)으로 보자면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 위에 굳건히 버티고 있다. 또한, 특정한 모양이 없기에 그 밝음은 태양과 같고, 검기로는 칠흑의 옻칠과 같다. 잠시도 쉬지 않고 항상 움직여 작동하지만 특정한 하나의 동작은 아니다. 이와 같은 물건을 대중들은 무엇이라 부를지 답해 보라.”
자애로운 스승의 법문은 모두 끝이 났다. 더 알아듣기 쉽게, 더 구체적으로, 숨기는 것 없이 가능한 모든 수사를 동원하여 말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던지고 나면 항상 그러하듯 어떤 이는 고개 숙여 눈을 피하고, 어떤 이는 미간에 힘주며 안간힘을 쓰고, 어떤 이는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어떤 이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사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답변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인들 어찌 속 시원히 한마디라도 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자리에서의 한 마디는 자신 안에서 나온 답변이어야 하며, 그 천금 같은 무게를 감당해야 함을 알기에 침묵을 깨뜨리는 이가 없었다.
| #3 침묵을 깨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랜 침묵은 계속됐다. 이날도 별다른 소득 없이 법회를 마치려고 하는 찰나였다. 언제나 가장 앞자리에 앉아 총명한 눈빛으로 법문하는 스승의 모습을 우러러보던 어린 사미승 신회(神會, 684~758)가 대중 가운데서 우뚝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이 말씀하신 ‘한 물건[一物]’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의 불성입니다[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침묵하던 대중들의 기운이 살아나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회는 실로 기개가 충천한 모습이었다. 신회보다 더 오랫동안 수행했다고 하는 구참 수행자들도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신회는 이 자리에서 토해내는 한 마디의 무거움을 알지 못하는 듯 올연히 일어나 숨 막히는 침묵을 깨뜨린 한마디를 한 것이다. 혜능은 신회의 총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물건’이라 부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인데, 너는 어째서 ‘근원(根源)’이니 ‘불성(佛性)’이니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 것인가?”
모처럼 살아나 웅성거리는 대중 속에 찬물을 쏟아붓는 스승의 한 마디는 또다시 긴 침묵으로 이어졌다.
<해설>
혜능이 선의 황금시대에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혜능 문하에 이름이 알려진 제자들이 모여들어 남종선(南宗禪)의 위상은 날로 높아졌다. 그중 청원행사, 남악회양, 영가현각, 남양혜충, 하택신회는 스승의 뒤를 이어 선등(禪燈)을 밝힌 제자들로, 후대 선종사에서 ‘혜능의 5대 종장(宗匠)’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다[有一物]’는 법문은 선의 핵심을 가리킨다. 혜능이 말한 ‘한 물건[一物]’은 선의 언어로, ‘마음[一心]’이라는 말과 같다. ‘한 물건’이란, 생각이나 사유로 특정한 대상을 유추할 수 없도록 임시로 붙여진 이름이다. 사유의 길이 단절된 지점, 막막하고 깜깜하여 의식으로 닿을 수 없는 경계를 선의 언어로 표현한 셈이다.
그러나 불교는 ‘단절’, ‘막막함’만을 말하지 않는다. 혜능이 말하는 ‘한 물건’, ‘마음’을 대승경전에서는 어떻게 표현할까. 『화엄경』에서는 일심(一心), 『금강경』에서는 반야(般若), 『법화경』에서는 일승묘법(一乘妙法), 『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 『원각경』에서는 원각(圓覺), 『유마경』에서는 부사의해탈(不思議解脫)이라 부른다. ‘한 물건’, ‘마음’은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며 각 경전의 핵심이다.
후대의 많은 수행자는 혜능의 ‘한 물건’이라는 법문에 근거해 각자의 견해로 ‘한 물건’을 풀어내고 설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글은 함허득통의 『금강경오가해서문』과 서산휴정의 『선가귀감』이라 할 수 있다. 간략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한 물건이 있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있으나 온 우주를 에워싸고, 안으로 온갖 미묘함을 가지고 있기에 밖으로 가지가지 다양한 근기(根機)들에 대응하여 맞춘다. 하늘, 땅, 사람의 주인이고 만법(萬法)의 왕이 된다. 넓고 넓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아! 참으로 신비롭지 않은가? 몸을 굽히거나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에도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하고, 보고 듣는 동작 사이에도 은밀하게 숨은 듯 존재하네. 아! 참으로 현묘하지 않은가?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으나 그 시작을 알 수 없고, 천지보다 뒤에 생겨났으나 그 끝을 알 수 없네. 이것은 공(空)한 상태인가? 존재한다[有]고 할 수 있는가? 어찌해도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네.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이 ‘한 물건[一着子]’을 가지고 있으나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살펴보시고 한탄하며 ‘참으로 신기하고 신기하다’라고 하셨다. (중략) 이로써 귀먹고 눈먼 미혹한 중생들이 모두 깨어나고 바싹 마른 고목들이 모두 윤택한 생기를 얻어 온 천지의 모든 생명이 각각 그 쓰임을 다하게 되었다.”
모든 중생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은 지금 나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글을 읽고, 생각을 글로 쓰고, 가족들에게 말을 하고, 타인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르면 대답하고, 어디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기도 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걱정하고, 어린 자식을 애타게 사랑하고…. 이 모든 작용은 ‘한 물건’, ‘마음’이 하는 일이다. 이렇듯 우리는 매일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한 물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여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혜능이 말한 대로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한 물건’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고 미혹하기 때문이다.
범준 스님
운문사 강원 졸업. 사찰 및 불교대학 등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교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봉은사 전임 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