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불교]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 파계 / 김천
김기영 감독의 영화 <파계(破戒, 1974)>는 고은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과 영화사에 독특한 자취를 남긴 이들의 작품이다. 김기영 감독은 죽음 즈음해서 세계 영화인 사이에서 독창적인 작가로 이름을 남겼다. 고은 작가는 문단에서 권위와 명망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가, 성추문이 터지며 가해자로 낙인찍혔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이름은 빠르게 삭제되는 중이다.
고은의 소설은 후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1977)>으로 개작돼 발표됐고, 정지영 감독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든 바 있다. 두 영화는 원작과 줄거리의 기둥은 같으나 색깔이 다르다.
| 검은 피 흘리는 인간의 욕망
<파계>는 한국 영화사에 독특한 자취를 남겼고,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새긴 김기영(1919~1998) 감독의 작품이다. 촬영은 또 다른 전설인 정일성 감독이 맡았다. 김기영은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해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는 말을 남겼다. <파계>는 그 말을 그대로 담은 영화다. 절이 무대이지만 영화에 담긴 것은 철저한 인간의 욕망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그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영화는 명상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 둘이 승복을 입고 결제철의 선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끝날 때 그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두 사람의 시선은 불교와 수행자를 살피는 감독의 눈을 대신하는 셈이다. 그러니 화면 속에 담긴 불교는 이해하기 어렵고 비현실적이며 본질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집중한다. 김기영은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하던 대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난도질하며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었다. 감독은 생전 그의 대표작으로 이 영화를 꼽은 적이 있었다.
괴승 무불은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절로 데려와 ‘올깨끼(일찍 출가한 스님)’를 만들었다. 그중에 주인공 침애와 그에게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친구 도심이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절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올깨끼와 ‘늦깨끼(늦게 출가한 스님)’들의 다툼. 병든 스님을 위해 절의 쌀을 훔쳐 도둑이란 비난을 받은 도심의 이야기. 도력을 시험한답시고 고승을 유혹한다는 비구니. 미모가 빼어나지만 실성한 비구니 묘혼. 그들 사이로 선어록의 고사들이 맥락 없이 튀어나온다. 방(梆)과 할(喝)이 난무하고 죽비는 폭력의 흉기처럼 시도 때도 없이 대중들을 두들겨 팬다.
내용과 상관없이 <파계>가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사찰과 스님들의 생활, 선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촬영은 아마도 법주사에서 했을 것인데, 지금부터 50년 전 즈음한 풍광을 고스란히 담았다. 남은 것과 과거의 모습은 참으로 다르다. 겉모습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과 삶의 방식도 완연히 달라졌다.
대중들은 큰방에서 깔고 덮을 것 없이 함께 누워 잔다. 신참을 안내하는 구참은 절살이에
대해 “중은 삼(三) 부족. 먹을 것, 입을 것, 자는 것의 부족이다. 잠은 단 세 시간. 식사는 죽 한 그릇. 덮고 자는 것은 방석 하나뿐이야”라고 일러준다. 이어 “이 절 중들은 모두 제 잘난 맛에 모였으니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반말을 써라”고 귀띔한다.
영화 속엔 여러 개의 화두가 나온다. 조실 법연 스님은 방부 들이는 수좌들에게 “밤하늘엔 몇 개의 별이 있느냐?”라든가, “빈 그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등의 화두를 내린다. 답을 내는 방식도 제각각인데, 모두 법연 스님의 할에 막히고 만다. 영화 말미에 도심이 화두를 풀어낸 이야기는 동화 속 교훈 같다.
입적을 앞둔 법연 스님은 묘혼에게 벗은 몸을 보여 달라 요구한다. 침애에게 법통을 얻게 하려고 묘혼이 알몸으로 서자 침애도 함께 옷을 벗고 선다. 그러나 법연 스님은 “법통은 젊은 너의 것이 아니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허망한 명성의 면류관
본대로 평하자면 영화 속 이야기는 꼬여있고, 상징들은 이해할 수 없으며, 인물들의 행동은 개연성을 잃었다. 비구와 비구니는 수행자가 아니라 그냥 남자와 여자다. 작가주의 영화가 갖는 고질적인 불쾌함이 있다. 김기영 감독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계율은 종교를 다룬 예술 작품과 영화의 오랜 주제다. 종교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도덕 규범과 인간 본성을 사이에 둔 고민은 뿌리가 깊다. 신의 명령을 어기고 생명나무의 과일을 따 먹은 대가는 원죄로 남아 출산의 고통과 생계의 고단함으로 남았다고 주장하는 종교도 있다. 계율은 생명과 같아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있고, 깨달음의 세계엔 무의미하니 무애자재하게 넘나든다는 이도 있다. 분명한 것은 화두가 성성하다면, 또는 놓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이라면 마음은 늘 밝으리라는 것이다. 밝은 이는 결코 그릇된 길을 걷지 않는다.
선의 요체는 보이는 것을 진실하게 만나는 것이다. 남의 시선과 판단을 넘어,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선의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타인의 평가와 세상의 권위에 의탁하여 수긍할 수 없는 것에 머리를 끄덕일 때도 있다. 그 사람의 입은 옷과 지위에 의해 맹목적으로 받들어 추앙하는 일도 있다. 세상이 붙인 명성에 따라 속는 일은 허다하다. 판단은 남들이 내려주고, 수행은 누군가 열심히 하고 있겠지 믿는다. 선의 정신은 그런 거짓을 부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와 원작이 쓰고 있는 허망한 명성의 면류관을 돌아본다. 이해할 수 없는 거칠고 미숙한 영화를 보면서 대가의 명작인 양 납득하지 말자. 욕망 덩어리를 풀어 쓴 자기변론의 궤변을 명작으로 받들지 않아도 된다. 추파와 유혹으로 그린 성의 역할도 구역질 나고 그런 일이 구도의 과정인 양 덧칠한 것도 불쾌하다. 미숙한 눈으로 본 것 그대로 말하자면, 영화와 소설 <파계>는 아무리 봐도 허접하다.
● 영화 <파계>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천
동국대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방송작가, 프로듀서로 일했으며 신문 객원기자로 종교 관련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러 편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지금도 인간의 정신과 종교, 명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