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두려웠던 아이, 타인 죽음 곁에서 눈물 닦다

2020-05-28     박현

어린 시절의 나는 죽음을 참 많이도 두려워했다. 명절이나 할아버지 생신 때, 아버지를 따라 기차와 배, 버스를 오르내리며 큰댁에 가야 했다. 좀 더 쉬운 길도 있건만 아버지께서는 왜 그렇게 복잡한 길을 택했을까. 굳이 헤아려 보자면 강가에 자리 잡은 가게에서 가까운 사람들이랑 장어에 곁들여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렇게 술을 마셨고 사람과의 만남을 탐했다. 큰댁에 도착하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은 웃고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며 밤을 새웠다. 어린 나는 이불 속에 누워 가물가물 잠으로 빠져들면서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 생사 고민이 이끈 호스피스

‘내일 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히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도 좋을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고, 그렇게 걱정 속에서 해는 지고 날은 새고, 새해가 오고, 또 한 해가 갔다. 희한하게도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가는 그 길을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술과 만남을 탐하며 즐기시던 아버지의 삶에도 늘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지면에서는 풀어낼 수 없으나-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삶의 숙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보다는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물리학을 전공한다는 나에게 어쩌다 그런 길로 가게 되었느냐고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던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됐다. 언어장애를 가진 아이가 터널을 통과 못 하기에 안타까워서 계속해보기를 권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선생님이 한 달 내로 통과시켜보라 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직접 터널에 들어가서 반대쪽 끝에 서 있던 아이에게 들어오라 했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였다. 아이는 잠깐 망설이더니 들어왔고, 통과했다.

난 아직도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 보였던 그 아이의 맑은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붓다의 제자로서 자리이타적 삶을 살고자 하는 내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깨어나 버린 또 다른 나는 학교에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또다시 누군가의 얼굴에 그런 맑은 표정이 깃들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의 어리석음으로 몰랐을 뿐, 내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이미 삶은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생사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를 아미타 호스피스 교육장으로 이끌었다. 물리를 가르치던 내가 자아초월상담으로 전공을 전환하고, 호스피스 과목을 강의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고서야 도리 없이 가게 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정토마을’ 홈페이지를 수년간 들락거리기만 했는데, 인연은 미적거리기만 하는 나를 결국 그곳에 앉혔다.

7박 8일 호스피스교육과 5일간의 임상실습. 승가와 도반이 함께 한 도량 안에서 부처님의 법을 듣는 시간 내내, 내 마음 안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가슴에서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던 마른 낙엽을 촉촉이 적셨다. 삶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나는, 그곳에서 숨 가쁘게 내 삶의 변곡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매일 108배를 하며 부처님과 불법 안에서 깊이 있는 자신과 만났고, 열정과 희열 속에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

 

| 수삼 갈아주던 어머니의 부재

너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깨달음이라고 열에 달뜬 이처럼 대답하곤 하던 그즈음,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매년 봄이면 수삼을 사다가 주스를 만들어주시던 어머니는 그해 봄에도 그리하셨다. 어머니가 가시기 며칠 전부터 하루에 두 번씩 만들었고 내가 다 마시지 못하는 날이면 ‘네 엄마는 내가 이렇게 애써 갈아주는데 다 마시지도 않는다’며 손녀에게 푸념 섞어 하소연하셨다. 그날 아침 마지막 수삼을 갈아서 텀블러에 담아, 늘 놓아두던 자리에 두고, 심장이 멈춰버렸다. 그래서 마음이 급하셨을까. 하루에 두 번씩 주스를 만들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딸에게 서운하셨을까.

그렇게 황망한 이별을 정리해가던 어느 날, 딸아이가 ‘할머니가 엄마한테 전복죽 끓여달라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하고는 말을 잊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즈음 어머니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나는 고작 한다는 말이 병원에 가보라는 말뿐이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웃고 이야기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허망함에 허덕이던 나는 그제야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했다. ‘나에게 어떤 것이든, 아프고 힘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그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내 능력의 제한으로 위태로웠지만, 그것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간절했다. 내 삶은 부처님 불법 안에서 더할 수 없는 평화와 위안도 있었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혼란스럽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게 했다.

 

| 자비심이라는 연금술

혼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호스피스 교육을 마치고 교육 스텝으로 계속 참여했다. 발원의 원력은 교육의 장에서 좀 더 섬세하고 정제되어갔다. 7~8년 정도 스텝으로 활동하면서 사건 사고도 잦았지만, 잊을 수 없는 하나의 경험이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어둠도 싫어한다. 어두운 밤, 산에 올라오는 교육생을 맞이해야 하는데, 잔뜩 긴장한 교육생들이 소복을 입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분명히 그렇게 올라올 줄 아는데도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고 손과 발은 덜덜거리고 입에서는 무슨 말이 나갔는지도 몰랐다. 그 순간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자비심은 연금술 같았다. 거칠고 혼탁했던 나의 의식은 섬세하고 부드러워졌으며 따뜻했다. 이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라는 생각 뒤로 온갖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나도 사라지고, 연민과 사랑의 마음만이 가득했다. 자비심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그 자리에서 발견했다.

호스피스 봉사를 나가다 보면 아주 가끔 잡상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귀찮아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너무 집착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의도적으로 호흡과 자비심 명상을 한다. 처음에는 의도를 세워 자비명상을 해야 하지만, 서서히 의도를 놓아도 어느덧 주의가 상대를 향한 자비심에 머물러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내가 삶의 게임에 빠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 또한 삶의 게임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다. 삶의 게임, 윤회는 자리이타적 삶 안에서 의미가 사라진다.

호스피스 교육 수료가 거대한 준령을 마주 보고 선 느낌이었다면 수료 후 의 삶은 그 준령의 허리를 따라 걸으며 생과 사, 고통과 행복, 집착과 자유의 어느 한쪽을 조금씩 갈무리해가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시간을 내서 수행과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닌, 내 삶 자체가 수행이고 봉사인, 그래서 결국은 모두에게 이로운 불국토를 꿈꾼다. 화엄세계는 길가의 꽃 한 송이 안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난다. 나도 그렇게 피어나리라.

 

 

박현
조계종 포교사단 포교사다. 자아초월상담 전공으로 상담학 석사와 박사를 수료했다.
의학(정신과학)과 이학(물리학) 박사다. 한국심리학회 산하
한국건강심리학회에서 건강심리전문가로 인정받았다.
1990~2011년 목포과학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피해상담사 수련 감독이며,
진술 분석 전문가이자 피해 영향 평가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