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그러하다
슬기로운 불교 생활
세계 일주를 시작할 적에 그 시작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티베트의 카일라스산입니다. 많은 불교인들이 이 카일라스산을 우주 중심에 있는 수미산의 현현(顯現)으로 믿고 있습니다. 수미산 제일 꼭대기에는 제석천왕이, 그 중턱에는 사천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카일라스는 영혼의 성소나 신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성스러움의 이유 때문인지 카일라스는 여태껏 공식적으로 그 어떤 인간에게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이 카일라스 정상에 오른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밀라레빠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티베트 불교의 고승인 밀라레빠가 토속 종교인 뵌교의 성자와 서로 신통력을 겨루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나 봅니다. 결국엔 카일라스 정상까지 제일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승자라고 정하고 마지막 내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뵌교의 성자는 북을 타고 하늘을 날아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상에 거의 다다를 찰나, 밀라레빠가 순식간에 햇빛을 타고 카일라스의 정상에 도달했습니다. 승자는 밀라레빠였습니다.
전설이 지니는 상징성을 실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마도 당시에 불교와 뵌교 사이의 알력 관계나 우열 관계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불교가 더욱 우수한 종교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현재 티베트의 주요 종교는 뵌교가 아니라 불교라는 사실이 이러한 해석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뵌교와 불교 사이의 결과적인 승패나 우열을 떠나서 이 전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도 제법 해석해볼 만한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뵌교의 성자는 몸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카일라스를 대상이나 목표로 대했으며, 그 대상과 목표로 삼은 카일라스에 도달하기 위해 북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북은 치는 용도일 테지만, 성자는 북을 타고 하늘을 나는 용도로 바꾸는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뵌교의 성자는 사람을 이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저는 이를 욕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밀라레빠는 달랐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저는 밀라레빠가 실제 육신을 이끌고 카일라스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만일 몸을 이끌고 산 정상에 도달했다면 뵌교의 성자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산 정상에 도달한 것은 밀라레빠가 아닙니다. 그건 빛입니다. 도달하려는 마음을 내기 전에도 이미 도달한 빛입니다.
빛은 몸과 같이 존재의 중심이나 기반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한 중심이나 기반 없이 다만 비춤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비춤에는 중심이 없기에 그 무엇도 대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대상이란 ‘나’라는 명확한 근거를 두어야만 나타나게 되는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비추기 위해 특별한 도구를 쓸 필요도 없고, 비추는 작용은 그 어떤 신통력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비춤이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춤에는 그 어떤 승부욕도 없습니다. 산 아래나 산 정상이나 평등하게 고루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부욕이 없다는 것은 곧 욕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빛이란 그런 겁니다. 정상에 도달하리라는 생각을 내기 전에 이미 정상에 도착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누군가를 이기려는 의도를 내기 이전부터 이미 산 정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에는 이처럼 욕망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생각도 없으며, 의도도 없고, 승패도 없고, 우열도 없으며, 대상도 없고, 중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생각하기 전부터, 욕망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미 빛은 주변을 환하게 밝혀왔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 승부는 애초부터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몸을 기반으로 한 사람의 욕망과 욕망이 없는 비춤과의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란 좀 더 고급스럽고 어려운 욕망을 성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온전히 쉼으로써 자연스러움으로 드러나는 데에 있습니다. 굳이 북을 타지 않아도, 몸을 옮겨 카일라스 정상에 도달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이기지 않아도, 빛은 이미 환히 비추고 있습니다. 그 어떤 작위나 유위를 거치지 않더라도 빛이 이미 그 모든 곳을 고루 환하게 비춰내고 있다는 것, 이 자연스러움과 온전함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의도된 결과가 이미 그러함보다 결코 나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토록 어려운 고행을 치르고 최고의 선정을 닦은 부처님이셨건만, 정작 부처님을 위없는 깨달음으로 인도한 것은 반짝이는 새벽 별이었습니다. 서산대사는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음으로 돌아가 생사의 일을 모두 마쳤습니다. 많은 조사 선지식들께서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깨달음으로 들어가셨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보고 듣는 내용들은 새벽 별이나 닭 우는 소리처럼 무척이나 평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고행이나 선정은 사실상 이미 그러한 것들을 떠나서 다른 무언가를 갈고 닦으려는 유위의 작업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사실상 이러한 유위의 작업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과정일 뿐, 그것이 궁극의 목표 지점은 아닙니다. 수행은 이 평범한 진리로 돌아가고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과 수단이라는 것이지, ‘수행을 잘하는 것’이 결코 수행의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이 유위의 수행을 아예 목표로 삼은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과정으로서 수행이 아니라 아예 목적으로서의 수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밥을 먹기 위해 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쌀을 씻기 위한 목적으로 쌀만 열심히 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의 삶은 이러한 보고 듣는 평범한 것들의 연속인데, 이런 평범한 경계를 접하면서도 부처님이나 서산대사처럼 깨달음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함에 분명한 이유는 있습니다. 바로 욕망 때문입니다. 욕망에 안목이 가려져서 곧장 만나지 못하고, 제대로 비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 주변에 신통력을 가진 도반이 있었습니다. 기수행을 해서 7개의 차크라를 모두 열었다는데,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점수로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장소들의 지기뿐 아니라 사람의 기운도 측정해 점수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스님에 따르자면 어느 보잘것없는 뒷방 노장은 80점, 어느 유명한 종단의 큰스님은 20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돌아가셔서 세상에 없는 여러 선지식까지도 점수로 측정했습니다. 이러한 기술을 두고 사람들은 신통력이라고 했지만, 저는 욕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기(氣)라는 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점수로 파악하여 구분하려는 욕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고급처럼 보이는 기술이나 신통이라고 해도, 결국 상대방을 파악하고 점수화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입니다. 이 도반에게 새벽 별의 반짝임이나 닭 우는 ‘꼬끼오’ 소리에 점수를 측정해달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당연합니다. 이 특별한 방식의 기(氣)에는 점수가 있을지언정, 이 평범한 진리에는 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점수가 없는 것에 점수를 지으려는 것, 이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틀을 버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욕망을 비우고 분별을 멈출 뿐입니다. 단지 비우고 멈추는 것뿐이지, 달리 고귀한 무엇을 구하고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비울 적에 온전함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달라진 그대로의 여실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구족하고 있음을 스스로 명백하게 확인할 뿐입니다. 방거사는 이를 두고 ‘다만 있는 것들을 모두 비우길 바랄지언정, 그 없는 모든 것들을 실답게 여기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서양의 유명한 영성가인 아디야 샨티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명상이란 지금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하는 대신 이미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재주가 좋아 북을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 해도, 쏜살같이 몸을 옮겨 카일라스의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도, 이미 그러함으로 눈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보다 빠르거나 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자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욕망을 쉬게 된 자입니다. 욕망을 쉬게 된 자에게는 이미 승패가 없습니다. 승패나 대상, 우열도 없는 낱낱이 진실한 일들만이 눈앞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것이고, 진정으로 도달하는 것이며, 또한 진정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 언젠가 누군가가 반야심경을 물었습니다. 대승의 공(空) 사상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260자로 설한 것이 바로 반야심경인데, 이 반야심경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말이 무엇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무소득(無所得).
이미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원제 스님 2006년 해인사로 출가, 도림법전 스님의 제자로 스님이 되었다. 2012년 9월부터 2년여간 티베트 카일라스를 시작으로 5대륙 45개국 세계 일주를 했다. 이후 ‘최선을 다하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으로 지내고 있다.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로 현재 김천 수도암에서 수행 중이다. 저서로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 (2019, 불광출판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