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하루 여행] 계절의 경계에서 마주친 것들
포항
눈부신 햇살 아래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9월의 어느 날, 동해안 포항을 찾았다. 새벽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서늘한 기운이 새 계절의 문턱임을 일러주었다
#호미곶 ─기다림의바다앞에서
우리나라 내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것을 볼 수있는 곳, 그런 상징성이 사람들 발길을 호미곶으로 이끈다. 연중 많은 사람이 찾는 일출 명소답게 탁 트인 바다 앞 해돋이 광장이 너르게 잘 조성되어 있었다. 광장 한편에 우뚝 선 등대 불빛이 사그라지기 전,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시간임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카메라를 손에 쥐고 곧 있을 장관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 멀리 수평선이 붉게 물들고, 해가 솟아올랐다. 호미곶의 명물 조각상 ‘상생의 손’ 틈새로 빛이 출렁인다. 슬쩍 얼굴을 내미는가 싶던 태양은 어느새 거침없이 하늘로 솟구친다. 무언가를 기 다리는 심정이 영겁의 감각이라면, 기다림 끝에 오는 마주침은 너무도 짧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푸념이 머릿속을 맴돈다. 호미곶에서의 일출은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다. 파랗고 환하게 밝아온 아침, 바다는 새벽보다 더고요했다. 하나둘 등을 돌리고 떠나는 사람들. 어쩌면 지금부터 이 바다는내일의 여명을 기다리기 시작하는지 모른다.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붉은 해를 밀어 올리기 위해, 어둠 속에선 이들 앞에 눈부신 광명을 선사하기 위해, 꼬박 하루를 인내하는지도…. 그 지난한 기다림을 생각하며 넘실대는 바다를 향해 좀 더 오래 눈길을 던져주었다.
INFORMATION
매년 12월 31일~1월 1일에 호미곶에서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불꽃쇼, 음악회, 떡국 나눠 먹기 등 다양한행사가 진행된다. 근처 볼거리로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 포항의 역사와 바다 화석 등을 관람할 수 있는 새천년기념관이 있다. 광장 진입로에 유채꽃 단지가 조성돼 있어 4-5월경 노랗게 만개한 유채꽃을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리
054-270-5806(호미곶 해맞이광장 관리사무소)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침탈의 역사 현장에서
호미곶에서 남쪽으로 20여 분 차를 달리면 구룡포항이다. 예로부터 과메기, 대게, 고래 등 어족 자원이 풍부한 마을이었다는데, 그로 인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축항되어 어업 기지로 쓰였던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구룡포 우체국 뒤쪽 골목길을 따라 일본인 가옥거리에 들어 서니 영화와 드라마에서 봤음 직한 일본 전통 건물이 줄지어 섰다. 대부분 상점으로 바뀌어 본래의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지만, 여전히 옛모습을 간직한 수십 채 건물 외관에서 당시 생활상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거리는 어디까지나 빼앗은 자들의 흔적, 번영의 기억이다. 빼앗긴 자들의 울분과 절규는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구룡포 공원이다. 일본인 가옥거리 중심부에 있는 구룡포 공원은, 원래 일본인이 세운 신사와 일본인 수산업자 도가와 야사브로의 송덕비가 있던 곳으로 해방 후 주민들이 신사를 해체하고 송덕비를 시멘트로 덧칠해 버렸다. 지금은 신사가 있던 자리에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각과 충혼탑이 세워져 있다.거기로 오르는 계단 양옆에 세워진 120개 돌기둥에는 후원자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역시 원래는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둥이었다고 한다. 침탈의 역사 현장, 곳곳에서 숨죽이던 자들의 외침이 진동한다.
INFORMATION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에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을 복원해 만든 근대 역사관이 있다. 공식적으로 가옥 내부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부츠단, 고다츠, 후스마, 도코노마 등 일본 전통 가옥의 구조와 특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근처에 더 둘러볼 만한 곳으로는 일본인 가옥거리 위쪽에 있는 벽화마을, 호미곶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구룡포 해수욕장과 주상절리 등이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153-1
054-276-9605(구룡포근대역사관)
#오어사 –두 고승의 유쾌한 설화가 전하는 곳
오어지의 북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고즈넉한 천년고찰, 오어사. 신라 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대신 원효대사와 혜공선사의 설화로 유명한 곳이다. 두 스님이 함께 수도하며 법력을 겨루기 위해 죽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려내는 시합을 벌였는데,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물 아래로 내려가고 한 마리는 물 위에 놀고 있었다. 이에 두 스님이 물 위에 있는 고기가 서로 자기가 살린 고기(吾魚)라고 했다는 데서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절 입구 원효교(출다리)에 올라 오어지 물속을 내려다본다. ‘누구의 물고기인가?’ 옥신각신하는 두 고승의 모습이 수면에 비치는 듯하여 입가에 미소가 번 진다. 다리 건너 오어지를 따라 둘레길을 걸어본다. 예전에는 원효교 건너 좌우 양쪽으로 다닐 수 있었는데, 몇 년 전 산사태로 절 풍경을 감상하며 걷을 수 있는 오른쪽 길이 막혀버렸다. 알록달록 단풍이 든 가을 산을 배경으로 오어사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 그야말로 일품이라는데, 올가을 그 길이 다시 열리길 기대해 본다. 혹 또 다른 큰스님 두 분이 나타나 천년 전 그랬듯 법력으로 막힌 길 여는 시합을 벌이지는 않을까, 혼자만의 유쾌한 상상에 젖어본다. “깊고 간절한 마음은 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절 입구 입간판 글귀가 제멋대로 읽힌다.
INFORMATION
예부터 오어사는 고승들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자장, 혜공, 원효, 의상대사가 수행한 곳으로 자장암, 혜공암, 원효암, 의상암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효암과 자장암만이 남아 있다. 오어사의 대표 유물로는 신라 진평왕 때 건립되어 조선조 때 중건된 대웅전(유형문화재제452호), 고려시대 제작된 범종(보물제1280호), 원효대사가 썼다는 오래된 삿갓이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오어로1
054-292-2083
글.양민호 사진.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