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하루 여행] 흐리고 비 오는 날엔 그곳에 가야 한다
순천
순천
살면서 꼭 한번 가 봐야 할 국내 여행지, 그중 한 곳이 전라남도 순천이다.
순천 여행의 으뜸은 단연 드넓은 순천만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낙조를 감상하는 것.
그 장관을 두 눈에 담아보려 순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순천만국가정원 → 순천만습지
이른 저녁 순천역에 떨어졌다. 서둘러 차를 타고 첫 번째 목적지로 향했다. 순천역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순천만국가정원. 지난 2013년 열린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기념해 개장한 제1호 국가지정 공원이다. 입구 안내판을 보니 테마별 정원, 나라별 정원, 생태체험관 및 야생동물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눈에 띈다. ‘국가 지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만큼 규모도 엄청나서 전체를 다 둘러보려면 한나절도 부족할 듯싶다.
동문(순천만국가정원은 동문과 서문으로 입장이 가능하다)으로 들어서자, 미국의 정원 디자이너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가 설계했다는 호수 정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호수 중심에 솟아 있는 작은 언덕이 인상적이다. 꼭대기부터 아래로 원을 그리며 내려오는 오솔길, 그 길을 따라 짝지어 걸어가는 연인들 모습이 사랑스럽다. 호수 정원을 중심으로 동쪽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이리저리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모든 곳을 둘러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포기해야 할 순간이 많은 하루 여행,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조금씩 기울어가는 해에 조급한 마음을 안고 순천만습지로 내달렸다.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차로 15분 거리. 입장 제한 시간인 저녁 7시에 턱걸이로 도착했다. 매표소를 통과해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배경
이자 습지 내 대표적인 사진 촬영 포인트인 무진교에 섰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동천, 건너편의 드넓은 갈대군락지를 배경으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 틈에서 찰칵, 한 장의 기록을 남긴다. 이곳 순천만습지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汽水) 지역으로 다양한 생태 환경의 보고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연안 습지다.
2003년 습지 보호 지역 지정, 2006년 국제 협약 람사르협약 등록,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1호로 지정되었는데 매년 갯벌과 갈대밭을 찾아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등 수많은 희귀 철새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순천시가 캐치프레이즈처럼 내건 ‘생태수도’라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직접 와 보니 수긍이 간다. 무진교를 건너 갈대밭 사이 탐방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갈대밭 끄트머리에 이르니 ‘용산전망대 왕복 40분’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고민이 됐다. 슬슬 땅거미가 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점 흐려지는날씨가 금세 비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이미 낙조를 보긴 글렀다. 그래도 오를까? 그럴 수밖에! 기대했던 광경을 보지 못할 걸 알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미 많은 것(근처에 순천만 역사관, 천문대, 자연생태관, 김승옥과 정채봉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천문학관등이 있지만, 늦었다)을 포기하고 온 터였다. 다리에 힘을 실었다. 용산 자체는 낮은 야산으로 크게 가파르거나 길이 험하지 않았으나, 습한 날씨 탓에 금세 온몸이 땀에 젖었다. 왕복 40분이라더니 올라가는 데만도 40분이 넘게 걸린다. 대체 누가, 하고 하소연하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전망대에 이르렀다. 후,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왼쪽으로 붉은빛 칠면초로 색감을 더한 순천만, 오른쪽으로 S자 동천을 따라 갈대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왜 순천만습지에 오면 용산전망대에 올라야 하는지, 왜 순천만습지 사진은 죄다 같은 시점을 공유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관이다. 전망대 안내판에 소개된 9가지 절경(1경-갈대길, 2경-S자 갯골, 3경-갯벌, 4경-원형 갈대 군락, 5경-순천만 무진, 6경-흑두루미, 7경-와온 해넘이, 8경-화포 해돋이, 9경-칠면초 군락)을 굳이 나눌 것 없이, 전체가 거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순천에 오면 순천만습지를 봐야하고, 순천만습지에 오면 반드시 이곳에 올라야한다.’ 파노라마처럼 드리운 풍경이 내게 말하는듯했다.
*INFORMATION
서울에서 순천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 서울 용산역에서 KTX를 타면 순천역까지 2시간30분.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보다 절반가량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순천역 주차장에서 차량 대여 서비스(쏘카)를 이용할 수 있어 저렴한 가격에 하루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한편 순천에서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또 있다. 순천만습지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와온해변. 마을 앞바다 솔섬을 타고 넘어가는 해넘이가 일품이다.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습지 입장료는 성인기준 8000원. 한 곳의 입장권을 사면 나머지는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
순천만국가정원
위치_ 전라남도 순천시 국가정원1호길 47
문의_ 1577-2013
순천만습지
위치_ 전라남도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문의_ 061-749-6052
낙안읍성
순천역 근처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을 맞았다(이번 하루 여행은 전날 저녁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로 시간상으로는 당일치기 코스다). 밤사이 무겁게 쌓이던 구름이 끝내 빗방울을 터트렸다. 당장은 우산이 없어도 될 만큼 가는 비지만, 예보를 보니 곧 큰 비가 몰려올 성싶었다. 서둘러 짐을 챙겼다. 굽이진 이차선 도로
를 달려 낙안읍성에 도착했다. 순천역에서 40분거리. 읍성 안팎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아침부터 붐볐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대학생들인 듯했다. 매표 시간을 딱 맞춰 왔던지, 9시가 갓 넘은 시간임에도 이미 다 둘러보고 나오는 모양새다. 잠시 기다렸다, 그들 일행이 다 빠져나간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토성을 점차 석성으로 개·증축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1983년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CNN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만큼 이름난 명소다. 성곽 안쪽엔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속마을로 손꼽히는 전통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평일 아침 마을은 한적함이 흘렀다. 장마를 대비해 텃밭과 수로를 정비하는 몇몇 주민들 외에 인적이 드물었다. 덕분에 차분히 성곽길 따라 전경을 감상하고, 마을로 내려가 담 너머 기웃대며 집집을 구경했다. 꺾인 저 골목 끝에 무엇이 나타날까,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까,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돌담길 따라 초가지붕 사이를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INFORMATION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무료로 가야금, 대장금, 서각, 길쌈, 천연염색, 전통혼례등을 체험할 수 있다. 또 주말마다 민요, 악기 연주, 한국무용, 농악 등의 상설공연과 전통 혼례 재현 행사를 관람할 수 있다(상설 공연은 8월까지 중단). 10월에는 18일부터 3일간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한편 낙안읍성 동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이 있다. 잡지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고(故) 한창기 선생이 모은 6,5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삼국시대 토기, 불교 용구, 민속공예품 등 역사적 가치가 높고 조상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낙안읍성
위치_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
문의_ 061-749-8852
송광사
불(佛)·법(法)·승(僧).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가리켜 삼보(三寶)라고 한다. 값진 세 가지 보물이란 뜻이다. 순천 송광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와 더불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삼보사찰 중 하나로 승보종찰이라 불린다. 고려 시대 보조국사를 시작으로 역대 수많은 고승을 배출했으며,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반, 오늘 여행의 종착점인 송광사에 도착했다. 한 10여 년 전쯤 이곳 온 적이있다. 그때도 억수같이 비가 왔는데, 오늘도 비가내린다. 아무래도 송광사와는 그렇게 만나야 하는 인연인가 보다. 비도 오고 길도 젖어 멀리 가
긴 힘들겠다 싶어, 송광사 제일 풍광이라는 우화각에 기대 자연이 연주하는 협주를 감상했다. 빗물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땅에 닿는 소리, 물에 닿는 소리, 조계산 기슭부터 흐르는 계곡물 소리…. 단조로운 듯 조화로운 그 소리에 온갖 근심 걱정이 씻기는 듯했다. 이만하면 넉넉하다. 법정 스님 계시던 불일암까지 가지 못해도, 편백나무숲을 그저 눈으로 지나칠 수밖에 없어도, 좋았다. 그래도 차마 먼 길을 달려온 정성 모른 체하긴 미안했던지, 잠시 빗줄기가 잦아든다. 그 틈을타 경내를 한 바퀴 휘 둘러본다. 그때, 어디선가들려오는 소리. 청명한 목탁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갔다. 관음전, 열
린 문 사이로 독경하는 스님과 관세음보살님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돌아가기 전에, 해묵은 것들 다 내려놓고 가라고 부르셨음일까. 자비로운 그 음성 가득 담아가라고 이끄셨음일까. 톡톡, 맑은 울림이 내 안에 다시 차오른다. 합장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충만하다.
*INFORMATION
KTX 순천역 정류장에서 111번 버스를 타면 송광사까지 1시간반 정도 걸린다. 매표소에 내려 20분 정도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송광사가 나온다. 순천의 명찰로는 송광사 외에 선암사가 있는데, 조계산 자락을 따라 이 두 절을 잇는 천년불심길(남도삼백리길 제9코스, 12km) 숲길이 조성돼 있다. 스님들이 수행하며 걷던 길을 따라 명상하듯 걸어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송광사
위치_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문의_ 061-755-0107
글. 양민호 / 사진.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