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법문] 마하반야바라밀 행불명사

2019-04-25     월호 스님

 

사진: 최배문

여러분 『육조단경』에 보면 ‘마하반야바라밀’을 구념(口念) 심행(心行)하라고 나옵니다. 다 같이 합장하시고, ‘마하반야바라밀’을 외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십념하고, 다 함께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마하는 ‘큼’이요. 반야는 ‘밝음’이요. 
바라밀은 ‘충만함’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이 ‘나’요, 
내가 ‘마하반야바라밀’이다.
나는 본래 크고 밝고 충만하다.
나는 지금 크고 밝고 충만하다.
나는 항상 크고 밝고 충만하다.” 

아침에 거울 앞에 앉아 얼굴 화장만 하지 마시고 마음 화장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외친 구호를 크게 소리 내어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예뻐지고 밝아지고 충만해집니다. 

마음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연습하는 대로 만들어집니다. 계속 연습하는 대로 됩니다. 그것이 공(空)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있는 겁니다. 또 무아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내가 없기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겁니다. 크고 밝고 충만한 나! 그것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은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입니다. 이 두 가지는 새의 양 날개와 같습니다. 새의 양 날개가 조화를 이뤄야 멀리 잘 날아다닐 수 있는 것처럼,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 두 가지를 함께 실천해야 스스로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주로 경전 공부를 하니, 오늘은 특히 참선 수행하는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참선 수행의 기본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止, śamatha) 그 소리를 듣고(觀, vipassanā),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禪, dhyāna)입니다. 이 세 가지를 평상시에 꾸준히 행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는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그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한 곳에 집중하면 그것만 보입니다. 모자가 필요해서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의 모자만 눈에 띕니다. 신발을 새로 장만하려는 마음으로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의 신발만 눈에 들어오지요. 마음은 초점이 맞추어진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비 오는 날 운전을 할 때, 전방 유리창 와이퍼가 바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더라도 이에 상관없이 전방 도로에 초점을 맞추면 차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와이퍼에다 눈의 초점을 맞춘다면 자동차는 금방 자신의 차선에서 이탈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선을 한 곳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것은 희미해지죠. 그처럼 수행을 함에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듣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오락가락하던 번뇌는 자연히 희미해집니다.

둘째, 이처럼 집중 수행을 하면 번뇌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번뇌는 얼른 대면해서 관찰(對面觀察)해야 합니다.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면해서 관찰하되, 닉네임을 붙여서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집중하는 게 항상 잘되면 그것만 하면 되는데, 우리 삶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간중간 번뇌가 자꾸 일어나죠.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일렁이는 다양한 고민, 걱정, 생각을 대면해서 관찰하는 겁니다.

이때 ‘아바타’라는 닉네임을 붙여주면 훨씬 효과적입니다. ‘00라는 이름의 아바타가 애착하고 있구나. 아바타가 화를 내고 있구나. 아바타가 근심 걱정하고 있구나.’라고 염해 줍니다. 삼독심과 근심, 걱정, 스트레스를 강 건너 불 바라보듯 아바타의 것으로 관찰합니다. 번뇌는 아바타의 것으로 맡겨버리고, 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점점 번뇌로부터 분리되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지혜가 샘솟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번뇌가 누그러지면 다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듣습니다.

셋째,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습니다. 일단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듣는 데 집중하는 가운데 때때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들을 때, 이 성품이 어떤 건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챙겨주는 것입니다. 반문문성(返聞聞性).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듣는 것, 또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도 하지요. 이근, 즉 귀뿌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석가세존 당시에 뽀띨라라는 강사 스님이 있었습니다. 오백 명의 스님들에게 강의하고 법랍도 높은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부처님께서는 뽀띨라를 부를 때 “머리가 텅 빈 뽀띨라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경전 공부만 하고 참선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뽀띨라는 참선 수행을 하기 위해 선원을 찾아갑니다. 그곳의 선원장 스님께 참선 수행의 방법을 물었지만 극구 사양합니다. 두 번째 스님도, 세 번째 스님도 사양하지요. 그렇게 계속 거절을 당하다가 마지막으로 일곱 살 동자승까지 내려갑니다. 동자승에게 참선 수행의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바느질하면서 대꾸도 않다가 반나절이 지나서야 대꾸합니다. “옷을 입은 채 저 물웅덩이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뽀띨라 스님은 매우 고급스러운 가사를 입고 있었지만, 그대로 물웅덩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제서야 동자승이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여기 커다란 개미집에 구멍이 여섯 개가 있는데, 그곳으로 거미 한 마리가 들어갔습니다. 거미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섯 개의 구멍을 막아두고 오직 한 구멍만 뚫어져라 바라봐야겠죠?” 이 말을 들은 뽀띨라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그대로 수행하여 머지않아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여기서 여섯 구멍은 바로 육근(六根)을 말합니다. 다섯 구멍, 즉 이근을 제외한 나머지 오근은 닫아버리고 오직 하나 이근을 열어두는 것이죠. 이근은 귀뿌리입니다. 듣는 성품, 즉 이근에 집중하는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능엄경』에서도 이근원통의 방법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이 원통을 얻은 수행법이고 말세중생에게 최상의 수행법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마하반야바라밀’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자나 깨나, 죽으나 사나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으면 됩니다. 걸어 다니면서는 행선, 머무를 때는 주선, 앉아서는 좌선, 누워서는 와선을 연습합니다. 이상과 같이 수행한다면 언제나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올바른 마음을 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마음껏 운용하는 연습을 하여 각자 마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성불은 행불로부터!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을 관찰할 뿐!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풀 뿐!
행불하세요!

 

법문. 월호 스님

행불선원 선원장, 한국명상지도자 협회 이사. 동국대 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쌍계사·동화사·봉암사·해인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였다. 전 동국대 겸임 교수, 해인사 승가대학 교수, 쌍계사 승가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당신이 행복입니다』,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 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 『할!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났도다』, 『월호 스님의 천수경 강의』, 『월호 스님의 화엄경 약찬게 강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