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내적인 경험과 지혜로서의 종교 시대
| 지극히 사적이고 부차적인 종교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
유니온 신학대학원 폴 니터 교수의 말이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말인데, 종교 대화 모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불자라거나 유대교인이면서 불자가 되는 등 서로 다른 종교가 뒤섞인 복합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을까?
“불교는 나로 하여금 나의 지적 진실성을 유지하고 나의 문화에서 내가 진실하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라는 폴 니터의 말에서 현대인의 종교 이해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면, 사람들에게 종교가 초월적인 신성이나 신성불가침한 권위의 원천이기보다 개개인의 삶과 문화 속에서 내면적이며 진실하고 선한 것으로 접근하는 통로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전환, 다시 말해 종교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 탈종교 시대를 특징짓는 현상 중 하나이다.
서양 근대가 추구해온 세속화란 공적 생활로부터 종교를 분리하고 주술적·신화적 힘으로부터 이성을 구출하는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이 서양의 기독교 문명은 “사회나 문화 전체가 기독교 신앙과 행위로 고취되고 사회와 문화가 일정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결합되었던 문명”이다.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기독교의 이와 같은 공적 기능이 소멸되고, 출생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주어졌던 교회에 대한 귀속이 사라졌다. 국가나 종족, 지역, 가족이 개인의 종교를 결정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종교는 개인에 의해 선택되는 사적인 것이 되었다. 종교 활동은 급격히 쇠퇴하고 사찰이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조차 종교는 그들 삶에서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오늘날 어떤 종교를 선택하느냐는 문제는 무슨 옷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휴가를 어디서 보낼지, 집안 장식은 어떻게 할지 등등 개인적인 관심사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덜 중요한 일로 취급된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삶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패션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고 자신의 공간을 나만의 필요와 기호에 따라 꾸미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오늘 입을 옷을 선택하고 주말에 볼 영화를 결정할 때처럼 종교를 선택할 때 고려 사항은 그런 활동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사회적 이미지와 자기만족이다. 교리의 정합성이나 초월적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 설사 교리에 다소 결함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라면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깨달음이나 내세의 구원 같은, 과거의 종교가 약속했던 행복이 아니라 상품을 구매할 때 얻어지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만족이다. 이 역시 탈종교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내면을 간직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사람들은 위로와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감정을 내적인 것으로서 경험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면의 평화와 행복은 세속적인 행복과 사회적인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주의의 발달은 개인주의화된 영적 체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까지 승려들의 전유물이었던 명상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불교의 오랜 지혜 속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산사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베스트셀러 진열대에서 불교 서적을 발견하는 것이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다. 청중으로 북적이는 스타 스님들의 토크쇼 역시 낯선 풍경이 아니다.
| 일상적 감동과 피상적 체험을 넘어
다른 한편, 탈종교화는 더 이상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05년 불교뿐 아니라 가톨릭, 개신교 등 종교 인구의 감소가 처음으로 보고되었으며, 2015년 인구수 기준 한국 최대 종교였던 불교 인구를 기독교 인구가 앞지른다는 충격적인 인구 조사 통계가 나왔다. 그에 앞서 시작된 출가자의 급격한 감소로 안거철마다 대중이 모여 빽빽이 총림을 이루었던 절집이 스산해지고 있으며 초하루, 보름 법회 때마다 신도들로 가득 찼던 법당이 텅 비고 영원할 줄 알았던 신도들의 신심도 예전 같지 않다.
조선시대 이래 공적 영역에서 퇴출되었던 쓰디쓴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불교에게 탈종교화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기독교와 더불어 70년대 경제 개발의 수혜자로서 물질적 풍요와 신도 수의 증가라는 호황을 맞이했던 한국불교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근대적 구습을 청산하지 못하고 공적인 장에서 근대적 종교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지 못한 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탈종교화를 맞이하고 만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일로 남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폴 니터의 예에서 보듯이 불교는 탈종교 시대의 새로운 종교 이해를 위한 길을 열고 있다. 불교는 무엇보다 마음에 집중해왔다. 고타마 붓다를 비롯하여 수많은 선지식에 의해 개발되어온 인간의 내적 경험에 대한 경험과 지혜가 비로소 정당하게 평가받을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이 개인주의화된 영적 체험이 되도록 기분이 좋아지는 쪽이나 피상적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서구화된 불교가 심리 치료의 보조 수단이나 웰빙의 수단으로 개인화되고 있다. 또한 명상이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이 초캄 트륭파가 “영적 물질주의”라고 비판한 것처럼 일시적인 만족이나 위로를 추구하는 일종의 소비 행위에 그칠 가능성도 짙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일시적인 감동이나 피상적인 체험에 만족할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명상이든 기도든 더 깊은 정신적 발전과 종교적 삶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나아가 현대 소비 사회의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서구화된 불교에 대해서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을 미봉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서양의 지식인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세상의 언어로 소통할 필요성
한국불교의 변화를 위해 급선무는 무엇보다 한문과 전문적인 상투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탈종교 시대 개인들의 내적 체험과 소통하려면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지체된 불교 경전의 우리말 번역과 함께 승려들과 불교학자들의 고답적인 말투 역시 달라져야 한다. 법문과 의례에서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명상의 대중적 보급과 함께 의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탈주술화에도 불구하고 의례는 종교적 체험의 중요한 장이다. 근대 이후 기복 불교라는 비판을 받아왔으나 의례는 일반 신도들이 깊은 종교적 체험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더구나 불교 의례는 초월적인 것과의 관계보다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례의 수행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서 의례 진행 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우리말 의례의 보급이 시급하다.
탈종교 시대에도 종교 활동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적이고 진정한 삶의 문제가 될 것이다. 회심이나 눈부신 통찰의 순간에 시작될 수도 있지만, 더 높은 정신적 수행으로 이어지기 위하여 종교적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필요한 때다.
명법 스님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박사 논문을 마쳤다.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 대안연구공동체 같은 교육 기관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공동체 미르문화원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은유와 마음』,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미술관에 간 붓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