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만해 한용운과 금강산, 그리고 통일시대
만이천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 3,1혁명 백주년, ‘풍란화 매운 향내’를 기억하며
1944년 6월의 마지막 날, 성북동 심우장에서는 전날 입적한 만해 한용운 선사를 추모하는 조촐한 영결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시조 한 수를 스님의 영전에서 읊었다.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게 견줄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이 시조는 1945년 12월에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에 위당의 「십이애十二哀」라는 연작시조 중 하나로 “고 용운당 대선사를 생각하고”라는 덧붙임 말과 함께 실렸다. 66세 나이에 돌아가신 만해선사의 부고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두어 달이 지나서 스님이 한때 책임을 맡았던 잡지 『(신)불교』 64집에 ‘열반계涅槃界’라는 제목의 “만해 한용운 대종사는 지난(去) 유월 이십구일 성북정町 심우장 자택에서 입적하시였다”는 단신만이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만해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와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대중들로부터 잊혀져갔다. 뒤늦게 70년대에 후학들의 노력으로 『한용운전집』이 발간되고 난 뒤에야 ‘풍란화 매운 향내’는 만해를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었다. 일찍이 청년시절 가슴 한가운데서 타오르기 시작한 초심의 불꽃을 평생 꺼트리지 않은 채 온 생애를 뜨겁게 살았던 만해의 마지막 세상사는 그렇게 평범했다. 그럼에도 또 한 생애를 훌쩍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 매운 향내는 더 진하게 사람들의 가슴에 묵직하게 스며든다.
꿋꿋한 지조와 절개의 독립지사로서, 불교철학의 요체를 터득한 선사이자 격조 높은 시인이요 문장가였던 만해 한용운. 그는 격동의 난세 속에서 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허물어져가는 지적 전통을 아궁이로 삼아 스스로 어둠의 시대를 밝히는 불길이 되어서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펴주었다.
| 청년 만해의 가슴 속 불같은 마음과 금강산
만해는 1930년 5월에 잡지『삼천리』에 실린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불같은 마음’으로 출가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나의 앞길(前程)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리어 사찰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이 되어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아무리 명산대찰이라도 그를 알아보고 그의 ‘불같은 마음’을 다잡아 줄 선지식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회고는 만해가 속리산 법주사와 오대산 월정사 등지를 거쳐서 마침내 설악산 백담사를 출가의 인연처로 택하게 한 귀한 인연들을 암시한다.
만해의 출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만해용운은 백담사 오세암에서 불목하니 행자생활을 하다가 1905년에 백담사 연곡화상蓮谷和尙에게 사미계를, 영제泳濟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으며, 금강산 건봉사 학암鶴庵스님에게 기신론·능엄경·원각경·반야경 강의를 듣고, 금강산 유점사 월화月華스님에게 화엄경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 출가 초기 행적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해에게 사미계를 준 연곡화상의 행장을 전하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젊어서 십여 년 승려생활을 했던 시인 고은이 쓴 『한용운평전』에 “연곡은 건봉사의 중후한 학승이었다가 그의 교학을 버리고 바로 선지禪旨를 택한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일대의 산간에서는 알려진 중진선덕이다...(중략)...그뿐 아니라 그는 개화기의 여러 가지 외전도 구해서 본 개화승이기도 했다.”는 인물평이 나온다.
당시 백담사는 고성 건봉사의 말사로서 선원을 두고 있었다. 만해가 백담사에서 선과 교에 두루 균형을 갖춘 연곡화상을 만난 인연은 소중하다. 백담사에서 겨울 한철 선방수행을 마친 이래 만해는 금강산을 수차례 오고갔을 것이다.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들으며 이미 한문에 능통했던 만해의 근기와 열정을 본 연곡스님이 전통 강원이 있는 금강산 건봉사와 유점사에서 경전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은 삼천리 조선의 중추를 이루는 백두대간에서도 그 중심에 있는 산이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선인들이 수많은 상징과 메타포로 촘촘히 수를 놓아 이름 지은 화엄의 불국토이다, 아름다운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소리는 우리 역사의 우렁찬 외침이며 진리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스스로 흘러가듯 불가의 진리 법法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스스로를 낮춘 하심의 수행자에게 깨달음으로 스며들어 일어난다.
화엄경에 부처님 법을 일으킨 담무갈(曇無竭 또는 法起)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 금강산은 내설악에서 시작된 청년 만해의 초심을 심화시키고 넓힌 거대한 도량이었다. 청년 만해는 그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낮추고 금강역사처럼 단련되었다. 만해 한용운은 마침내 금강산인金剛山人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그를 저자거리로 부르고 있었다.
|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온갖 것을 태워버리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른 뒤에 만해는 그를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대중의 심장을 뛰게 하는 기개어린 사자후를 토했다. 일제의 조직적이며 개량적인 문화정책에 당당히 맞서며 한편으로는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조선물산장려운동 등 자립·자강·협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지원했다. 불교계는 친일승려들이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비롯해 전국 주요사찰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이에 만해는 선학원 설립을 주도해 왜색불교에 대항하고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여 불교청년운동에 불길을 당겼다.
그러나 이미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터져 나온 민중의 만세소리는 허공 속에 사라지고 불가역의 쏜살처럼 망각되었다. 그 혁명을 결연하게 도모하고 앞장섰던 주역들 대다수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변절로 초라해지고 개량과 현실안주의 타협으로 비굴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꿋꿋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가 1924년 홀연히 내설악 백담사 오세암으로 들어가 칩거하면서 『십현담주해』를 펴내고 『님의 침묵』 89수의 연작시를 써내려간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만 이천 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데서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너의 님은 너 때문에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왼갖 종교·철학·명예·재산 그 외에도 있으면 있는 대로 태워 버리는 줄을 너는 모를리라
...(중략)...
나는 너의 침묵을 잘 안다
너는 철모르는 아해들에게 종작없는 찬미를 받으면서 시쁜 웃음을 참고
고요히 있는 줄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너는 천당이나 지옥이나 하나만 가지고 있으려무나
꿈 없는 잠처럼 깨끗하고 단순하란 말이다
나도 쩌른 갈궁이로 강 건너의 꽃을 꺽는다고 큰 말하는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침착하고 단순하려고 한다
나는 너의 입김에 불려오는 쪼각구름에 키쓰한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 실린 시 「금강산」의 첫 운을 “만 이천 봉!” 감탄사에 이어서 ‘무양하냐’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무양無恙’은 ‘별 탈이 없다’는 뜻이다. ‘별 탈 없느냐’는 물음 앞에 던져진 그 느낌표를 만해는 어떤 마음으로 원고지에 찍었을까. 만해에게 과연 금강산은 무엇이었을까?
“종작(꾸밈)없는 찬미를 받으면서 시쁜(겸연쩍은) 웃음을 참고 고요히 있는” 금강산의 침묵을 만해는 잘 안다고 했다. 금강산을 떠올리면 종교니 철학이니 명예니 재산이니 온갖 상념으로 복잡하고 괴로운 것들도 다 사그라진다. 고즈넉한 백담사의 어느 날 오후였으리라. 문득 저 멀리서 조각구름 하나가 북녘의 산등성이를 넘어온다. 쨍한 푸른 하늘에서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저 산 너머 금강산에서 불려오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온다...
만해에게 금강산은 침묵하는 ‘님’이다. 님의 침묵은 천당이기도 하고 지옥이기도 하다. 님의 침묵은 밤새 잠을 빼앗고, 선잠이 들어도 무서리처럼 섬뜩한 꿈에 시달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만든 상념의 허깨비임을 만해는 모르는 바 아니다. 미망의 환幻으로 허우적대지 말고 “깨끗하고 단순하란 말이다.”
“쩌른 갈궁이(갈고리)로 강 건너의 꽃을 꺽는다고 큰 말하는 미친 사람”은 당시 만해를 향한 세인들의 냉소와 연민의 시선에 대한 관조적 은유일 것이다. 대장부의 기개로 삼일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만해에게 세간의 그런 시선과 평가는 대수롭지 않았다. 백담사는 청년 만해가 출가의 인연을 맺은 초심의 장소다. 출가한지 이십여 년, 그는 다시 그곳에서 “침착하고 단순”하게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땅이 식민지가 된지 십오 년, 어느새 불혹의 나이도 훌쩍 지나 질풍노도 같았던 긴 만행의 세상공부를 접고 내설악 심산유곡에 들어가서 은둔자를 자처한 만해가 푸른 하늘에 떠가는 조각구름이 전하는 침묵의 한 소식에 만감을 누르며 나지막이 금강산을 부른다. 청년시절 만해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오갔던 건봉사, 유점사 등 금강산 옛 절들은 벼락같은 깨우침의 관문이자 금강석처럼 단단한 증명의 장소였다. 그가 금강산을 기루며 다시 청년 만해를 부른다.
만 이천 봉! 무양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데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해방의 기쁨도 분단의 비극도 못보고 님 돌아가신지 일흔다섯 해가 지났건만 그가 무심한 듯 남긴 “무양하냐 금강산아”라는 물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 금강산인 만해 한용운을 기루며 남북의 평화를 그리다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금강산관광 재개에 대한 조심스런 전망이 기대로 바뀌고 있다. 70년 넘은 분단체제를 끝내고 남북이 평화번영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도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은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금강산 사업의 핵심정신은 백두대간이라는 민족의 혈맥을 잇고 되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남북분단체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만해와 같은 분단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만해는 평생을 제국주의 비판과 평화공동체 구현을 지향하며 근대화의 난제들과 당당하게 대결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현재 독립운동가 중에 남과 북에서 모두 존경받고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인물은 단재 신채호와 만해 한용운 정도로 아주 드물다. 김일성 주석은 그의 회고록에서 만해스님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나섰던 사람”으로 “그는 불교승려였는데 조선독립은 청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행동파”로 평가했다.
만해의 시 「금강산」에는 뭇 시인, 문장가들이 남긴 어떤 금강산 유람의 시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담백하면서도 간절한 합일의 정조가 짙게 깔려있다. 그는 뼛속깊이까지 금강산 사람이었다. 청년 만해가 백두대간의 산마루를 넘어 수시로 오갔던 백담사에서 건봉사를 거쳐 금강산 유점사까지는 산길로도 사나흘이면 족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지금 우리는 칠십년이 지났어도 그 길을 넘지 못하고 있다. 남북의 누구나가 평화롭게 백두대간의 금강산 옛길을 걸어서 넘나들 때 비로소 이 땅의 평화는 현실이 된다.
김윤길
(사)평화의 길 운영위원장, 전 만해마을 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