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기를
도서관 사서는 머뭇거리며 고문헌실 열쇠를 풀었다. 굵은 쇠사슬 줄이 늘어지면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헐거워졌다. 쇠사슬을 걷어낸 그는 이번엔 전자 카드를 도난방지시스템에 가까이 가져갔다. 기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 다시 카드를 바꿔왔다. 기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함께 온 다른 직원이 카드를 대자 쥐 소리 같기도 하고 새 소리 같기도 한 소리를 내며 잠금이 겨우 해제되었다. 고문헌실에 들어가서도 사서는 내가 요청한 문헌을 쉬 찾아내지 못했다. 함께 한참이나 쭈그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책꽂이를 훑어나간 다음에야 겨우 찾아냈다.
단국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그 책이 보관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구한말 선암사에 거처했던 경운擎雲 원기(元奇, 1852~1936) 화상에 대해 살펴봐야 할 일이 생겼고, 이런저런 관련 정보를 주워 모으고 있던 차였다. 웬만한 내용은 얼마 전 출간된 『화엄종주 경운원기 대선사 산고집』에 다 실려 있어서 따로 품을 들여 찾아다니지 않아도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근래 몇 년 사이에 관련 주제로 한두 번 학술발표회도 있었다. 그러니 연구자의 식견으로 좀 속되게 말하면, 써먹을 만한 정보는 벌써 다 써먹었을 것이 뻔했고, 다시 들춰봐야 별로 나올 게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차에 그곳에 경운 화상이 저자로 되어 있는 『사문일과沙門日課』라는 책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문헌이 늘 그렇듯이 전산상으로 검색되어도, 있어야 있는가 보다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직접 확인해보면 전산상에 나타나는 것과 전혀 다른 문헌인 경우도 있고, 저자가 다르거나 서지사항이 다른 경우는 부지기수다. 그래서 어떻게 생긴 책인지는 차치하고 그런 책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도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게 고문헌이다. 겨우 날을 잡아 나는 헛걸음을 각오하고 뙤약볕 속을 걸었다. 내가 가진 정보라고는 단 하나, 단국대학교 퇴계기념도서관 5층 고문헌실에 구한말 경운 화상이 쓴 『사문일과』라는 제목의 목판본木板本 문헌이 소장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대학의 중앙도서관은 대개 그냥 중앙도서관이다. 그런데 죽전에 있는 단국대학교는 퇴계기념 중앙도서관이 공식 명칭이다. 또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있는 도서관 이름은 율곡기념도서관이다. 왜 이렇게 특이한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지 따로 알아보지 않았다. 알 만한 사람들만 알지만, 단국대학교는 국학國學 분야에 상당한 전통과 내공을 가지고 있는 대학이니 그런 까닭이 아닐까 짐작한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는 무려 30년에 걸쳐 한자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해서 지난 2008년 10월 28일에 전질 제16권 규모의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을 완간한 바 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작업인지는 소식을 접한 중국 측의 반응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가장 완벽한 한자 사전은 중국학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먼저 중국 국내 신문에 소개되었다. 또 “한국의 한 사립학교가 어떻게 30년을 하루같이 한자 사전이라는 무미건조한 영역을 묵묵히 가꿔 왔는지 흥미롭다. 중국 학술계에서는 명예와 이익으로 뒤덮인 ‘누런 서적’을 마주하는 자는 봉황의 털과 기린의 뿔만큼 귀하다. 누가 고요히 마음을 내려놓고 일심전력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있는가?”라며 중국 학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낡고 해져서 찢어질 것 같은 『사문일과』의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백 년도 더 된 종잇장이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속내를 드러냈다. 불빛을 만난 글자가 공기 속으로 휘리릭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돋보기를 들이대며 한 글자 한 글자 살펴 내려가는 동안, 도서관 사서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이가 고서古書를 훼손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표나지 않게 힐끔거렸다.
첫 장을 여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목판본으로 인쇄된 첫 면의 한 귀퉁이에 누군가 정갈한 필체로 암호처럼 적어둔 몇 글자가 눈에 띄었다.
“朝鮮昌德宮殿下丙寅陰三月十四日上午六時十分昇遐.”
1926년 음력 3월 4일 오전 6시 10분에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그다음 면에도 한 귀퉁이에 같은 필체로 몇 글자가 적혀 있었다.
“尙宮鄭雲性佛名法界行戊辰十月二十二日入滅.”
상궁 정운성은 불명이 법계행인데 무진년 10월 22일에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순종 황제가 승하한 해가 1926년이니, 1928년 무진년일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두 줄 메모에 걸려 책장을 더 넘기지 못했다. 거기에는 쓰러져간 옛 왕조의 그림자가 남아있었다. 순종은 즉위와 더불어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로써 황제는 ‘창덕궁 전하’가 되었다. 창덕궁 바로 옆 창경궁에는 식물원과 동물원이 세워졌다. 창경궁이라는 명칭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억지로 그렇게 했다는 얘기도 있고, 순종 임금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 궁의 문턱을 낮추는 차원에서 그리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되었든 목판본으로 인쇄된 본문 내용보다 내게는 그 두 줄이 더 간절해 보였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책의 소장자였을 것이 틀림없는데, 나는 그 기록자가 바로 경운 화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왜 불경 한 귀퉁이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승하한 날을 적어두었을까? 상궁 정운성이라는 인물은 또 누구일까?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경운 화상은 세상 떠난 상궁을 기록해 둔 것일까? 그 인연은 경운 화상과의 개인적인 인연일까 아니면 선암사와 관련된 인연일까?
이런저런 생각의 꼬리에 매달려 목판으로 인쇄된 본문을 빠르게 넘겨가며 대강의 서지 사항만 확인하다가 나는 다시 또 책의 중간쯤에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책 가운데 뜬금없이 그림엽서 같기도 하고, 습작 같기도 하고, 산수화 같기도 한 풍경 한 폭이 실려 있었다. 풍경은 외진 산골 깊은 곳에 비스듬히 반쯤 쓰러진 낡은 비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 풍경을 멀찍이 뒤로 두고 게송偈頌이라고 해도 좋겠고, 축원祝願이라고 해도 좋고, 시詩라고 해도 좋을 칠언절구 형식의 글이 화제畵題처럼 적혀 있다.
관세음보살 큰 성인께 우러러 축원하오니
(仰祝觀音大聖人)
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고
(臨終不涉六塗津)
극락의 연꽃 속에 왕생하여
(往生極樂蓮花裏)
영원히 아미타 부처님 나라 백성 되게 하소서 (永作彌陀國土民)
- 경운원기가 절하고 또 절합니다 (擎雲元奇拜拜)-
겨우 읽어낸 이 글귀를 앞에 놓고 나는 더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다급히 책을 덮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감당하지 못할 것을 마주한 것처럼 나는 오랫동안 어리둥절했다. 나더러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눌러 주저앉혔다. 조선의 불교는 선禪, 교학敎學, 정토 염불을 어떻게든 한꺼번에 담아내려고 했다. 그 셋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통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셋을 묶어내야 하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거나 그들에게 참선 수행과 교학과 정토는 다르지 않아 삼문직지三門直指였을 것인데, 그 이치가 한 폭의 시로 오롯했다.
시 속에서 화엄교학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이편에 있었고, 정토의 상징인 아미타 부처는 저편에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선禪의 목멤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래서 “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기를…”, “죽어 육도의 나루터 건너지 않기를…” 하는 소리는,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끝내 감당해내야만 하는 비명처럼 들렸다. 관세음과 아미타와 생사대사가 철벽처럼 놓인 그 아래에서 가엾고 불민한 내 삶의 날들이 마구 짓이겨졌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