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강의실 357호] 열반 있지만 열반하는 것은 없다

2018-06-28     홍창성

|    무엇이 열반한다는 것인가

명상을 통해 행복감에 젖어 열락悅樂을 즐기는 것이 열반이라고 짐작해 온 미국학생들은 열반에 대한 내 논리적 설명에 김이 빠진다. 그러나 곧 똑똑한 학생 몇이 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열반은 누가 합니까? 석가모니는 자아(self)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무아(無我, ana-tman)를 설했는데, 존재하지도 않는 수행자가 어떻게 열반에 들 수 있습니까? 열반에 드는 자가 없어도 열반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무아론無我論을 따르자면 열반하는 주체가 없다고 인정해야 할 텐데, 열반하는 것이 없이 열반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지난 호에 아라한의 열반 이후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무아론을 이해한다면 물어져서는 안 된다는 내 설명을 이해한 학생들이 그 이해의 바탕 위에서 열반의 주체에 대한 불교의 견해를 묻는 셈이다. 좋은 질문이다.

여러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학생들이 내 강의를 이제 겨우 몇 번 밖에 듣지 않았고, 따라서 나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답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뜨만(self, 영혼)으로서의 참나가 없다고 해서 개인인격체(person)로서의 나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논의하게 된다. 

불교는 우리에게 참나(self)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세계를 사는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점을 오해하고 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물질로 된 몸과 네 가지 의식상태가 부분들(parts)을 이루어 만들어진 전체(whole)로서의 인격체(person)는, 비록 실재(實在, real)하지 않는 허구(fiction)에 불과하지만, 일상생활의 편리를 위해 임시로(假) 또 현상으로(幻) 존재한다고 보아도 좋다. 이점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우리 앞에 무게 15kg인 자전거가 있다고 하자. 이 자전거는 실재(實在, real)하는가?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먼저 이 자전거의 부품들이 다음과 같이 무게 나간다고 해 보자.

(1) 바퀴 하나 3kg × 2 + 프레임 5kg + 핸들 2kg + 안장과 나머지 
    모든 작은 부품들을 합쳐서 2kg = 15kg. 그런데,

(2) 자전거 전체도 15kg

부품들이 모여 15kg을 이루는데, 전체로서의 자전거도 나름대로의 무게가 15kg이라면, 우리 앞에 놓인 이 자전거는 합계 30kg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이 물체는 15kg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1) 부분들(parts)의 모임과 (2) 전체(whole)로서의 자전거 둘 가운데 하나는 실재實在하지 않는 허구일 것이다. 어느 것이 허구(fiction)일까?

아비달마계통 문헌과 현대분석철학 주류 의견에 의하면 실재하는 부품들이 모여서 전체라는 허구적 존재가 생긴다. 나는 자전거가 수행하는 모든 기능을 부품들이 일정 방식으로 모여 만드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체로서의 자전거가 따로 실재한다고 보아줄 존재론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개념적 허구로서의 수레의 예 같은 것들도 이와 같은 종류의 논증을 이용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자전거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fiction)로 보아야 한다. 위의 논증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상 모든 복합체사물(composites)에 적용된다. 책상, 펜, 컴퓨터, 자동차, 나무, 동물, 바위, 물, 구름, 나라 등등. 그리고 우리들 각각 인격체(person)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체로서, 실재(real)하지 않는 단지 개념적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 

 

|    방편으로 존재하는 인격체(person)로서의 나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복합체사물을 정말 실재하지 않는 허구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불교에서는 이 허구를 편리한 도구로 여기며 일상에서 사용할 것을 허용한다. 그 이유를 보기 위해 자전거의 예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자전거를 지칭할 때 허구인 자전거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 대신 ‘바퀴 두 개와 프레임, 핸들, 그리고 안장과 기타 부품들이 이러저러하게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조물’이라는 식으로 복잡한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다. 자전거보다 훨씬 복잡한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자동차나 비행기의 경우에는 이런 부품들을 모두 나열하고 각각의 부품들이 연결된 상태를 완전히 기술하려면 책 몇 권의 분량만큼 복잡한 표현을 써야 그것들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다. 이와 같은 이유 등으로 전체(whole)로서의 허구(fiction)의 존재는 우리 일상을 위해 필요하다.

불교는 아비달마와 중관학파 이후 진제(眞諦, the ultimate truth)와 속제(俗諦 the conventional truth)를 구별한다. 속제란 우리 상식에 맞고 또 우리의 행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주는 진리(?)를 말하고, 진제란 사실에 부합하고 아무런 개념적 허구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진리를 말한다. 나는 이러한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구분으로 궁극적으로는 허구에 불과한 복합체를 일상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전거나 자동차 등이 개념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살 경우 일상이 더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의 존재는 진제로는 아니지만 일종의 방편으로서 속제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 무수한 복합체들은 우리의 상식 그대로 즉 속제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인격체(person)로서의 나 또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여러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체로서,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허구이지만, person의 개념은 우리 일상생활을 위해 필요불가결하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에 대해 지칭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리적 심리적 부분 요소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모두 나열하고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속제로는 정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용적인(pragmatic) 속제의 입장은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의 삶을 더 성공적으로 이끌어 준다. 진제의 입장에서는 어느 인격체(person)도 복합체로서 자성을 결여한 채 실재實在하지 않지만, 속제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개개인은 세상에 엄연히 존재한다.  

진제의 관점에서는 진정한 나의 존재 즉 나를 나이게끔 해 주는 어떤 불변의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實體로서의 참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인격체(person)로서의 나의 존재는 속제로서 십분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해, 불교에 참나는 없지만 오온五蘊의 복합체로서의 나는 있다. 내가 경험해 보기로는 한국에서 무아론無我論이 논의될 때 이점이 많이 오해되어 왔다. 그래서 이 기회에 불교가 참나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서 나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 한다.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길에서 우리는 참나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언제나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인격체(person)로서의 나는 일상에서 현상으로서(假 또는 幻으로서)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참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본고의 앞머리에서 제기된 문제를 이 명제와 관련지어 다시 질문해 보자. 존재하지 않는 참나로서는 아니지만 인격체(person)로서의 나는 열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까? 

『금강경』은 보살이라면 무수한 중생을 구제하고도 실제로는 단 하나의 중생도 구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안다고 논하고 있다. 내 불교철학강의에서 그 이유를 묻는 시험을 내곤 하는데, 그것은 물론 무아無我의 진리에 비추어보면 단 하나의 중생도 구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의 자비행은 오온五蘊의 덩어리에서 타오르는 번뇌라는 현상을 제거해 줄 뿐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참나를 가진 중생은 존재하지도 않으니 구제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오온五蘊의 다발로서의 인격체(person)나 유정물有情物은 속제의 차원에서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도 일종의 현상(假, 幻)으로 존재하는 중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은 이들을 번뇌로부터 구제하는 자비행을 베푼다. 그래서 보살은 (참나를 가진) 중생을 구제하지 않지만 (오온의 덩어리로서의 중생을) 구제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중생을 단지 묘하게 구제한다. 그러나 물론 무아의 진리에 철저해야 할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금강경』의 구절과 마찬가지로, 보살은 스스로 단 하나의 중생도 구제한 적이 없다.

열반의 주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의가 가능하다. 무아無我의 진리를 따르는 진제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열반하는 것은 존재한 적도 없지만, 오온五蘊 덩어리로서의 수행자는 속제로는 존재하니까 이 수행자가 열반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궁극적 관점에서는 열반하는 것이 없지만 일상의 관점에서는 열반에 드는 것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열반에 드는 것이 묘하게 있다. 그러나 무아의 진리에 철저해야 할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깨달음을 통해 열반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그 열반을 향해 정진했다는 수행자가 처음부터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모든 번뇌의 불길이 꺼진 열반이라는 상태는 존재하지만 그렇게 열반을 이루는 주체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다. 즉, 열반은 있지만 열반하는 것은 없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Thinkers(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중이고, 불교의 연기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