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를 위한 자비는 없다
우 빤디따 스님의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강의
저작·역자 |
우 빤디따 | 케이트 휠러 엮음 | 윤승서‧이승숙 번역 | 김한상 감수 |
정가 | 14,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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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18-06-05 | 분야 | 불교 |
책정보 |
판형 신국판 변형(147×215mm)|두께 17mm | 264쪽 | ISBN 978-89-7479-406-4 (03220) |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_ 책 속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상수제자, 우 빤디따 스님이 들려주는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의 정수!
전 세계 위빠사나 명상의 위대한 스승
‘위빠사나의 성자’, ‘위대한 성인’, ‘법(Dhamma)의 거인’, …. 우 빤디따 스님을 소개할 때 붙는 수식어들이다. 스님을 이렇게 표현하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붓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는 명상 수행법, 위빠사나(vipassanā)를 전하며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데 열정을 쏟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20세에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29세의 나이로 미얀마불교의 고승(高僧) 마하시 사야도로부터 사띠빠타나(satipaṭṭhāna) 수행에 입문한 상수제자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입적 이후 마하시 센터의 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빤디따라마 센터를 열어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현대 서양 명상계의 유명 지도자 조셉 골드스타인, 잭 콘필드, 샤론 살즈버그 등을 들 수 있다. 혹자는 말한다. 스님의 등장으로 인해 서양에서의 위빠사나 명상 지도와 수행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말이다. 국내의 경우 이들 서양 명상 지도자들의 위빠사나 수행 지침서나 연구물이 다수 소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대목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님이 처음 서양 땅에 발을 내디뎠던 당시 세랍 63세.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가르침을 펴 온 스님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 시대 최고의 명상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스님이 2003년 5월, 미국에서 진행한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법문을 엮은 것이다.
저자 _ 우 빤디따(U Paṇḍita, 1921~2016)
우 빤디따 스님은 미얀마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위빠사나의 위대한 스승이라 평가받아 왔다.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29세가 되던 해부터 마하시 스님의 지도 아래 사띠빠타나 수행에 입문한 스님은 1982년 마하시 스님이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마하시 수행 센터 원장을 역임했다. 이후 빤디따라마 수행 센터를 건립해 위빠사나 수행 지도에 전념해 왔다. 우 빤디따 스님에게서 지도를 받은 대표적인 서양 명상 수행 지도자로는 미국의 조셉 골드스타인, 잭 콘필드, 샤론 살즈버그 등이 있다.
엮음 _ 케이트 휠러(Kate Wheeler)
소설가이자 수필가, 여행 기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케이트 휠러는 우 빤디따 스님의 대표적인 저서 <In This Very Life>의 엮은이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로는 <Not Where I Started From>, <When Mountains Walked> 등이 있다.
번역 _ 윤승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환경정책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외교부 외교관, 국방부 통역장교를 역임하였으며, 호주에서 정무경제 영사를 맡았다. 현재 친환경 친빈민 농업 보급 및 태극권 지도 활동을 하고 있다. 법륜 스님의 <야단법석>, 무쇼 로드니 앨런 그린블랏의 <다르마의 즐거움> 등을 비롯해 다수의 역서가 있다.
번역 _ 이승숙
미르문화원 대표로 SARM Society of Organic Movement 회장이다.
감수 _ 김한상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스리랑카 켈라니야 대학(University of Kelaniya)의 빨리·불교학 대학원(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서로 <마라의 편지>, <초전법륜경>,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니까야와 아비담마의 철학과 그 전개>, <빨리어의 기초와 실천>, <아비담마 연구: 마음과 시간에 대한 불교적 탐구>가 있으며, 초기불교 및 스리랑카불교와 관련된 많은 논문들이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 및 동국대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역자의 말
추천의 글 | 우 빤디따 스님의 거대한 발자국
추천의 글 | 우 빤디따 스님에 대한 개인적 기억
엮은이의 말
저자의 말
법과 율(Dhamma vinaya)에 대하여
1. 수행의 개요
계에 대하여
수치심과 두려움
자비
법과 율의 이로움
수행의 진전
떨어짐, 타락
네 가지 수호의 명상
2. 첫째 수호의 명상, 불수념
법수념
붓다의 눈, 그리고 자비
보름달과 붓다 - “붓다”란 무엇인가
3. 둘째 수호의 명상, 자애
자애의 특징과 기능, 그리고 표현
마음의 거주처
자애를 계발하는 방법
자애 명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
528종류 자애의 확산
4. 직접적 지혜를 통해 마음을 해탈한다
-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법과 율을 새겨듣다
법과 율의 깊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
불법 수행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
밀린다 왕의 예 - 가르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명상 수행에 필요한 덕목
해탈의 수행,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의 기본
5.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의 기술적 내용
알아차리는 매 순간 팔정도는 어떻게 계발되는가
강력한 마음챙김
마음챙김의 속도
두 개의 공간
질병과 그 치유
지혜를 통해 속박에서 벗어나기
행위 뒤에 ‘나’가 없다
윤회의 순환
팔정도가 이끄는 곳
제자는 스승의 손을 잡고 길을 간다
6. 질문과 답변
빨리어-한글 용어 대조표
삶은 왜 고통스러운가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번뇌(kilesa)’라고 말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 역시 번뇌이다. 우 빤디따 스님은 수행의 목표가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의 모든 요소들, 즉 번뇌를 끊어 냄으로써 해탈(vimutti)을 이루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가장 위험한 것으로 규정한다. 욕망, 미움, 어리석음 등의 내적 번뇌는 외적 번뇌의 원인이다. 결국 내적 번뇌로부터의 해방은 모든 번뇌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 번뇌는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잔인하고 사악한 지배자’인 번뇌는 결과적으로 삶의 모든 찰나에서 일어나는 윤회의 순환을 만들어 내고, 고통스런 삶을 반복적으로 일으킨다.
윤회(輪廻, saṃsāra)는 태어나고, 죽고, 존재하는 순환을 말한다.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노화, 부패, 사망은 단지 삶이 끝났을 때에만 겪는 것이 아니라 매 찰나마다 일어나고 있다. 삶 자체가 고통이다. _ 67쪽
스님은 어린 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 어린 나무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수액의 흐름에 의해 성장하고, 어느새 열매를 맺는다. 다 여문 열매는 땅에 떨어져 또 다른 싹을 틔운다. 여기에서 나무 안의 수액의 흐름은 곧 번뇌의 순환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맺게 되는 열매는 행위의 순환, 그리고 그 열매가 떨어져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것은 결과의 순환을 나타낸다. 이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윤회의 순환 과정 모두는 결국 번뇌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그 근본 원인인 번뇌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의 번뇌 끊기에 대한 간절함은 스님의 신조에서도 드러난다. “번뇌에게 베풀어 줄 자비는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명제를 통해 우리가 숨 쉬는 이 순간, 모든 찰나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 해탈은 특정 인물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탈’을 특정 인물이나 이룰 수 있는 특수한 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님은 이 책의 초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_ 34쪽
불교에서는 붓다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리 모두가 부처의 가능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의 이야기는 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 빤디따 스님 역시 해탈을 이루는 데는 그 어떤 차별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불법(佛法)은 남녀, 노소, 빈부 등의 차별이 없는 완전히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우 빤디따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으로 모든 사람이 해탈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는 일. 그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 앎과 실천의 길에 들어 나아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뇌를 물리치는 궁극의 수행법
우 빤디따 스님은 해탈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수행”을 제시한다. 이는 몸과 감각, 마음과 모든 현상(사물)의 생멸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근간으로 한 마음챙김 수행법이다. 스님은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의 과정과 의의는 물론, 수행의 흐름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나 꼭 잊지 말아야 할 점 등을 꼼꼼히 지적한다.
• 붓다의 원음으로부터
이 책의 엮은이인 케이트 휠러는 스님을 “전통의 고수자”라 일컫는다. 우 빤디따 스님은 당신이 법문을 하실 때마다 자신의 견해는 최대한 배제한 채 경전, 주석서에 기반하여 가르침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빨리어로 기록된 붓다의 가르침, 다음은 주석서, 다음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스승들의 가르침이며, 개인이 가진 견해나 재해석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_ 10쪽
스님이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책의 내용도 테라와다 불교 전통의 빨리어 경전과 주석서에 근거하였다. 그리하여 책의 곳곳에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나 그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곤 하는데, 모두 붓다의 원음이라 간주되는 빨리어 경전의 용어와 표현을 우리말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간 다수 출간되어 온 자기계발적 성격의 명상 도서와는 맥을 달리한다. 오롯이 붓다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어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든지, 학습 성과가 높아진다는 등 세속적인 가치에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과 불교의 근본 교설 사이의 관계와 원리에 집중하는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무려 2,600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그 명맥이 이어져 온 정통 수행법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불교의 근본 교설과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우 빤디따 스님의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수행 법문은 불법을 통해 마음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전하는 데 방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혜와 실천의 조화라는 붓다의 길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그동안 위빠사나 명상을 실천해 오며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선명히 알기 어려웠던 독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자주 목격하게 되는 표현이 있다. 바로 “법과 율(Dhamma Vinaya)”이다. 우 빤디따 스님은 붓다가 전한 법과 율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다. 그 옛날 붓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빛나는 지혜(Dhamma, 法)와 자비의 실천(vinaya, 律)이 없다면 중생의 고통스러운 삶은 결코 전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번뇌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붓다의 법과 율을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눈여겨 볼 부분 중 하나는 도덕성과 집중, 지혜, 즉 삼학(三學)의 관계가 체계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인 삶(戒)은 충동에 따른 행동을 억누른다. 그러나 무조건 억누르게 되면 내부 충동이 더 깊어질 수 있는 역효과를 낸다. 이때 우리는 집중(定)을 통해 마음을 돌림으로써 강박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끝내 마음이 명료해짐에 따라 사물에 실체가 없다는 깨달음(慧)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지혜가 계발되는 과정이고, 그에 따라 마음의 고통은 해소된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점은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내용이다. 스님은 불교 경전에 나온 일화를 이야기하며 붓다가 남긴 말을 소개한다.
“머리는 곧 무지, 곧 알지 못함이다. 사성제에 대한 지식(vijjā)이 무지를 베어낸다. 네 가지 중 넷째를 계발해야 한다. 이 지식을 가지면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_ 209쪽
사성제(四聖諦)는 불교의 거의 모든 것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핵심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그중 네 번째인 도(道), 즉 팔정도(八正道)는 불자로서 항상 수지하고 있어야 할 삶의 거룩한 지혜이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우 빤디따 스님은 이 책에서 알아차리는 모든 순간, 팔정도는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띠빠타나 위빠사나를 행하는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 매 순간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은 팔정도의 바른 노력(正精進)에 해당된다. 노력을 기울일수록 산만함이 줄고 대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다. 마음챙김이 연속적이고 지속적이게 되면 마음은 대상에 고정되어 머물게 된다. 이는 바른 집중(正定)이다. 이 세 가지를 묶어 ‘집중의 묶음’이라 한다. 이는 곧 계‧정‧혜, 삼학의 ‘정’에 해당된다. 이렇듯 사띠빠타나 위빠사나를 수행하며 겪는 과정과 단계, 원리는 붓다의 가르침에 무엇 하나 어긋나지 않는다. 이로써 번뇌는 끊어지고, 결국 우리는 윤회의 고통에서 멀어지게 된다.
열반, 그 이후
안타깝게도 우 빤디따 스님은 2016년 4월 입적하셨다. 더 이상 스님을 법석에 모실 수 없는 현실에 있지만 스님의 가르침을 책으로나마 만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은 생전 몇 안 되는 책을 펴냈다. 국내의 경우 과거 두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지만 현재 시판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되는 이 책은 스님의 입적 이후 국내 처음 소개되는 도서란 점에서도 그 의미가 깊다.
이분이 가르친 선명한 기술과 지식은 오늘날에 더 없이 값지다. 거듭 유전하는 세간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던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날보다 더 절박했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_ 24쪽
스님의 법문을 통해 우리는 하루하루가 고통인 이 세상에서 또 하나의 희망을 얻게 된다. 스님의 말씀처럼 독서가 통찰의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길에 대한 믿음은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님의 이 책은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수행의 초심자에게도, 수행을 계속 해 오고 있는 실천자에게도 그 정수를 내보임으로써 해탈의 길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추천의 말>
우 빤디따 스님은 지혜의 찬란한 빛이었다. 그의 지혜롭고 분명한 지침은 내적 자유에 대한 우리의 길을 깊이 비춘다. _ 타라 베넷 골먼(Tara Bennett-Goleman) | <감정의 연금술> 저자
우 빤디따 스님은 현대의 가장 위대한 명상 대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책은 풍부한 영감을 주는 소장품으로 우리의 명상을 이끌어 준다. _ 무승(Mu Soeng) | 미국 바(Barre) 불교 연구 센터 학자
우 빤디따 스님이 보인 이해의 깊이와 지식의 폭은 서양의 불법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_ 조셉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 | 미국 통찰명상협회(IMS) 지도 법사, <마인드풀니스> 저자
우 빤디따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순수하게 후대로 물려 준 스승으로 기억될 것이다. 스님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 시대 최고의 명상지도자였다. _ 제이크 데이비스(Jake Davis) | 뉴욕대 연구원
스님은 법(法, Dhamma)을 단지 이론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가르침으로 설명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이분이 베푼 수천 가지 법문들 중에 단연 붓다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_ 앤드류 쉐퍼 | 승려, 명상 지도자
스님께서 전설이 된 이유는 그만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부드러워야 하고 언제 강해야 할지, 진실한 체험이 무엇이고 망상을 현실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는 분이었다. 이분이 가르친 선명한 기술과 지식은 오늘날에 더 없이 값지다. 거듭 유전하는 세간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던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날보다 더 절박했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 _ 케이트 휠러(Kate Wheeler) | 작가, 여행 기자, 이 책의 엮은이
붓다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행복을 키울 수 있는 가르침과 수행법을 남겨 놓았다. 그 가르침은 곧 법(法, Dhamma)과 율(律, vinaya)이다. 법은 존재에 대한 유익한 진실을 뜻하고, 율은 절제된 생활 혹은 훈련을 의미한다. 절제가 없다면 진실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문다. 즉 수행자는 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삶에서 실천할 수가 없다. 법과 율, 이 둘은 우리를 행복, 웰빙, 충족으로 인도한다는 지점에서 만난다. 오로지 이것만이 고통을 없애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31쪽)
완전한 자유를 얻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법과 율의 길에서 자꾸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승복을 입었건 속복을 입었건 관계없이 떨어져 나가곤 한다. 그렇게 일탈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 노력의 강도를 높이고, 도덕적 행위를 가다듬으며, 집중력을 키우고, 지혜가 떠오를 수 있도록 정진해야 한다. 온 힘을 기울여 헌신하면 수행자는 위뭇띠(vimutti), 즉 해탈, 구원, 내적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해탈의 가능성을 품었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생에서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33~34쪽)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교는 수치심, 공포, 두려움을 장려한다. 단 악행에 대해 그런 느낌을 가지라는 것이다. 도덕적 수치심(hiri)은 부도덕한 언행에 대한 경멸을 뜻한다. 도덕적 두려움(ottappa)은 악행으로부터 물러나 자신을 지키게 해 준다.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건전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심지어 수치심과 두려움은 “세상의 양대 수호자”라 불린다. (41쪽)
마음의 추악한 힘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번뇌는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뿌리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다 구할 수 있는가? 율이 모든 사람의 거칠고 야만적인 행동을 멈출 수 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법과 율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기 스스로 이 길을 걸어야 한다. (48쪽)
나쁜 행동을 절제함으로써, 즉 계(戒)를 지킴으로써 우리는 번뇌를 극복한다. 번뇌는 강력한 것이어서 우리를 수치스러운 언행으로 이끈다. 마음의 집중을 훈련함으로써, 즉 정(定)을 키움으로써 강박적인 번뇌나 마음의 소용돌이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다. 마지막으로 통찰의 지혜(慧)를 통해 숨어 있던 번뇌까지 모두 소멸시킬 수 있다. (49쪽)
내부와 외부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만, 둘 중 더 무서운 것은 내면의 적이다. 대부분의 외부 문제들은 내부의 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선하고, 추하고, 분열적인 힘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킬 필요성은 절박하다. 그러나 충분한 보호를 제공하는 수단을 찾기가 쉽지 않다. (54쪽)
갈망은 뚜렷하고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가장 기본이 되는 번뇌는 바로 무지(avijjā)다. … 어둠(avijjā)이 빛(vijjā)에 자리를 내 주면 이해와 지혜는 완성된다. 무명이 사라진 마음은 곧 청정하고 무량한 붓다의 마음이다. (63~64쪽)
몇 년 전 다른 종교의 지도자와 대화하던 중 이 주제가 거론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나와 남 중 누굴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 그분은 둘 다 동일하게 중요하고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고 답했다. 난 그 답변이 적절하다고 느꼈지만 다시 물었다. “선생님이 목까지 진흙에 잠겨 있고, 저도 목까지 빠져 있다면, 제가 선생님을 빼낼 수 있을까요?” 그분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나는 자기 스스로 마른 땅에 도달해야 남을 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붓다의 가르침도 동일한 맥락이다. (69쪽)
법은 행복의 지침이라고 보면 된다. 행복이란 모든 중생의 이로움과 복지를 일컫는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건 종교적 성향과 관계없이 실천할 수 있음을 뜻한다. 법은 가장 좋은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보면 된다. (98쪽)
모든 사람은 사회적 집단 속에서 살아간다. 인정하든 안 하든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고 있다. 단체 활동에 임할 때 우리는 자애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곤란에 빠지면 자비를 발동시켜야 한다. 누군가 성공하면 수희, 즉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태도가 모두 부적절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세 가지 수행은 모두 불선법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자애는 이기적 욕망으로, 자비는 회피 및 두려움으로, 수희는 가식으로 타락할 수 있다.
이 같은 타락을 막아낼 마음의 요소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평정이다. 자애, 자비, 수희를 적용할 수 없을 때에는 평정을 실천해야 한다. 평정은 네 가지 거룩한 수행의 마무리이기도 하다. 나와 남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108쪽)
인간의 삶을 사는 동안 사회적 의무를 다하고, 베풀고, 또 명상을 통해 마음 상태를 발전시키는 일들이 모두 가능하다. 혹자가 이 모두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범인도 아니고, 위인도 아니고, 그야말로 진인(眞人, true human being)이다. 그런 사람은 남과 대할 때 스스로 행복하고, 담담하고, 평화롭다. (121쪽)
명상을 통해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 사띠빠타나 위빠사나의 집중되고 정확한 주의력이 없다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아니면 면밀히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욕정이나 미움, 무지의 번뇌가 일어나 마음을 흐릴 것이다. 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바라보고 있다면 모든 사물이 명확하게 보일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침착하게 대상에 대응한다. (140~141쪽)
붓다의 법과 율은 치우침과 편견이 없다. 세속의 존재들(puthujjana)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특혜를 바랄 것 없이 법을 수행하면 성과를 얻는다. 불교가 약속하는 것은 바로 붓다의 길을 따르면 붓다처럼 무상의 깨달음을 얻어 번뇌를 없애고 청정을 얻는다는 것이다. 붓다의 발자국을 어떻게 따라올지 알려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45쪽)
사띠빠타나 위빠사나를 행하는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리는(noting) 순간순간마다 거룩한 팔정도에 든다. 팔정도야말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162쪽)
도덕의 실천을 통해 번뇌가 계속 약화되면 우리 행동의 결과로 고통받는 일이 줄어든다. 남을 지켜 주면서 우리는 고요와 행복을 얻는다. 이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일(parahita)”이라 불리는 것이다. (165쪽)
대상이 떠오르자마자 수행자는 그것을 인지해야 한다. 대상은 지금 당장 나타나고 지금 당장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겨냥의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대상이 왜 그런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러한지 등을 물어 볼 시간이 없다. 묻기 위해 멈추면 이미 마음은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대상을 놓치면 암흑 속에 떨어진다. (174~175쪽)
대상을 신중하게 관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삶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 가득 차게 된다. 이들은 번뇌의 공간을 살아가는 무명의 시민들이다. 이와 반대로 본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지혜의 땅에 살아간다. (177쪽)
개미들이 한 줄로 길을 건너고 있다고 하자. ‘개미 한 줄’은 관념에 불과하다. ‘움직이는 생물체’도 관념이다. 개별 개미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실한 본성을 보는 것이다.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알고 싶다면 이름을 붙이고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올바르게 알 수 있다. (186쪽)
잠재된 번뇌의 흐름은 모든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의식의 흐름 속에 뿌리박혀 아예 의식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룬다. 주석서들은 이 끝없는 흐름을 말라리아에 비유한다. 초기 환자는 높은 열에 시달린다. 이 강력한 병증이 범법적 번뇌와 비슷하다. 의사들은 열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고열은 2~3일마다 반복된다. 이것은 간헐적으로 마음을 괴롭힌다는 점에서 강박적 번뇌와 비슷하다. 환자가 말라리아 약을 먹으면 열은 사라지지만 병원체는 여전히 몸속에 있다. 이것은 잠재 번뇌와 같다. 약 복용을 멈추면 다시 발병하지만 성실하게 약을 먹으면 결국 몸속의 병원체는 점점 사라진다. (189쪽)
사띠빠타나 위빠사나 명상을 알지 못하고, 마음과 물질을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마음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지속성을 가진 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거기 의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내부와 외부의 대상들이 불변하고 영원하다는 사견을 갖게 된다. 이는 망상이다. (190쪽)
위빠사나 수행은 좋거나, 나쁘거나, 중립적인 경험과 번뇌가 일어나는 것 사이의 연결을 끊어낸다. 습관적 반응이 일어나고자 하는 순간 마음챙김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 시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마음챙김이 항상 쫓아가고 있는 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207쪽)
[현대불교] “佛法은 남녀, 노소, 빈부 등 차별 없는 공평무사한 가르침”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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