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스님이 본 유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승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울이자 스승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어그러진다. 여기서 ‘생각’은 허망한 생각(妄念)이며, ‘어그러진다’는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허망한 생각’은 본래 없는데 있다고 하는 생각이요, 둘이 아닌데 둘이라는 생각이다. 가령 천국이나 사랑의 경우, 본래 없는데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거기에 가려고, 그것을 얻으려고 목숨을 건다. 이렇게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여 목숨을 거는 것을 우리는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와 중생, 하느님과 인간, 아름다움과 추함 등은 둘이 아닌데 둘이라는 생각 때문에 전자는 보존하고 지향해야 할 선이고, 후자는 배제하고 폐기해야 할 악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 측면을 부처라 하고 무지몽매한 측면을 중생이라 부르듯, 강하고 지혜로운 측면을 하느님이라 하고, 약하고 어리석은 측면을 인간이라 부르듯, 좋은 느낌을 아름다움으로 싫은 느낌을 추함으로 부르듯이, 이들은 마음이나 느낌의 두 측면을 나누어서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이 일어나면 곧 어그러진다
이렇게 둘이 아닌데 둘이라 생각하여 하나는 선이요, 다른 것은 악이라 하여 배제·제거하려고 목숨을 거는 것을 우리는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것은 크고 중한 죄인 반면 본래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생각에서, 둘이 아닌데 둘이라는 생각에서 저지르는 행위는 미세한 죄이다. 하지만 모든 크고 중한 죄는 미세한 죄에서 일어난다. 요컨대 모든 크고 엄중한 범죄 행위는 결국 한 생각一念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산은 생각(念)을 담고 있는 그릇인 마음(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을 놓으면 곧 정처 없이 떠돌며 돌아갈 곳이 없다.(11장) 마음은 반드시 잡아야 하며 뜻은 반드시 성실해야 한다. 말은 반드시 삼가야 하며 행동은 반드시 신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안과 밖을 함께 닦는 것이다.”(12장) 마음 놓는 것을 방심放心이라고 하고 마음잡는 것을 조심操心이라 한다.
방심하는 사람이 소인이라면 조심하는 사람은 군자이다. 군자는 “원만하고 온후하며, 포용하고 용납하며, 차분하고 침착한 마음을 지닌 광대한 기상의 소유자”(14장)라면, 소인은 “촉급하고 각박하며, 편협하고 협착하며, 경솔하고 조급한 마음을 지닌 유덕하지 못한 기상의 소유자”(15장)이다. 그렇다면 왜 소인들은 마음이 촉급·각박·편협·협착·경솔·조급해지는가? 그것은 사사로이 일어나는 욕심을 되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사사로이 일어나는 욕심을 되돌아보면 마음은 저절로 안정된다. 서산은 말한다. “사사로이 일어나는 욕심을 되돌아보면 마음은 고요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일은 저절로 간략해진다.”(16장) 어떤 일이 간략해지지 않고 복잡해지는 이유는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부단히 흔들리기 때문이고, 마음이 흔들리는 까닭은 사사로이 일어나는 욕심을 되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심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일어난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지위가 낮아도 또한 즐거워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고 지위가 높아도 또한 근심한다.(49장) 편안할 줄 알면 영화(榮)이고, 만족할 줄 알면 부자(富)다.”(50장) 빈천과 부귀가 행복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과 불만족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 개구즉착開口卽錯, 입만 열면 어긋난다
입만 열면 곧 어긋난다. 여기서 ‘입’은 입에서 나오는 허망한 말(妄言)이며, ‘어긋난다’는 죄를 짓는다는 의미이다. 허망한 말에는 첫째 ‘스스로 놀래고 뒤집어 남을 위협하고 안팎으로 두려워 속고 속이는 말들이 자기 입을 왕래하는’ 망어妄語이며, 둘째 ‘입에는 지혜가 없어 사리가 맞지 않으며 아무 의미 없이 말하는’ 기어綺語이며, 셋째 ‘두 혀로 거듭 이간질하거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하거나 스스로 생각하지도 못한 채 말해버리는’ 양설兩舌이며, 넷째 ‘남에게 욕을 하고 험담하여 성내게 하고 괴롭게 하는’ 악구惡口 등이 있다. 이러한 망어로 남을 속이고, 기어로 남에게 아첨하고, 양설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악구로 남의 마음을 찌르는 것을 우리는 죄를 범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 죄의 근원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즉 언어에 있다고 동양의 현인들은 보았던 것이다.
사람의 말은 칼과 같다. 칼에는 사람 살리는 칼이 있고, 사람 죽이는 칼이 있다. 전자는 활인검活人劍이라 하고 후자는 살인도殺人刀라 한다. 마찬가지로 말에는 사람 살리는 말이 있고, 사람 죽이는 말이 있다. 전자를 활구活句라 하고 후자를 사구死句라 한다. 그래서 서산은 구업口業이 짓는 업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서산은 말한다. “말을 적게 하고 침묵하는 것이 가장 묘한 일이다. 도를 알면 말이 저절로 간략해진다.(17장) 말을 삼가는 것은 학문하는 이의 첫째 공부이다. 말을 삼가지 않고 그 마음을 보존하는 사람은 드물다.(18장) 말을 많이 하면 마음을 가장 들뜨게 하고, 기운도 상하게 하며, 자거나 꿈속에서의 정신도 불안하게 한다.”(19장) 공자도 『논어』 「리인里仁」에서 “군자는 말을 할 때에는 어눌하게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할 때에는 민첩하게 행한다(君子, 訥於言而敏於行)”고 하여 군자의 덕목으로 어눌한 말(訥言)을 강조한다. 여기서 어눌한 말이란 말을 더듬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삼가 조심한다(謹言)는 것이다.
사람의 언어행위에는 위와 같이 말하는 자가 경계해야 할 부분뿐만 아니라, 말을 듣는 자가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다. 서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의 허물과 실수를 듣는 것은 마치 자기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과 같이하라. 그런데 남의 허물과 실수가 들리면 단지 귀로만 들을 뿐 입으로는 말해서는 안 된다.(22장) 시비가 하루 종일 있더라도 듣지 않으면 저절로 없어진다. 나에게 와서 시비를 말하는 자는 시비하는 자이다.”(23장)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남의 허물이나 실수 혹은 시비를 말해주면 사람들은 누구나 흥미진진해 한다. 왜냐하면 자기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자는 남의 과실을 듣거나 시비하는 말을 들을 때 더욱 조심한다.
남의 과실이나 시비를 거는 말에 대해서는 경계하기가 쉬울지도 모르지만, 자기 가까이에 있으면서 아주 오랜 시간 친분을 맺은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삼가서 듣기가 쉽지 않다. 서산은 말한다. “좌우 가까이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마땅히 엄격하면서도 인자해야 한다. 좌우 친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24장) 나와 친하거나 내가 아끼는 사람의 말도 또한 한 쪽만 들어선 안 된다. 만약 한 쪽 말만 듣는다면 곧바로 서로 이별하게 될 것이다.”(25장)
| 군자, 위기爲己의 인간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며 또 하나는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전자를 위기지인爲己之人이라 하며 후자를 위인지인爲人之人이라 한다. 위기의 인간은 주체적 존재이며 위인의 인간은 노예적 존재이다. 노예적 인간은 일을 처리할 때 무엇보다도 그 일을 경솔히 가볍게 여기지만, 주체적 인간은 신중하게 처리한다. 서산은 말한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그 일을 가볍게 보거나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극히 사소하고 쉬운 일이라 하더라도 모두 신중한 자세로써 처리해야 한다”(42장) 또한 노예적 인간은 남의 선을 보고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남의 악을 보고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반면 주체적 인간은 “남의 선을 보거든 자기의 선을 찾고, 남의 악을 보거든 자기의 악을 찾는다. 남의 선을 보고서 자기의 선을 따르는 것과 남의 악을 보고서 자기의 악을 고치는 것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43장)라고 하여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거울이자 스승이 된다고 간주한다.
노예적 인간은 친구를 사귀되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사귀는 반면 주체적 인간은 “모름지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벗으로 삼아라. 나와 비슷한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나를 욕하는 자는 나의 스승이요, 나를 칭찬하는 자는 나의 도적이다”(44장)라는 말을 귀감으로 삼는다. 이러한 주체적 인간은 “덕으로써 원한을 갚고 선으로써 악을 갚는다. 남이 만약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을 때 닦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마를 것이다”(46장)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 더욱 선을 행하려고 하며 남의 악을 악으로써 갚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기爲己의 사람을 “남의 거짓을 알면서도 말로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여유로운 멋이 있는 사람”(47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산은 진심盡心을 다해서 이러한 도를 추구하는 위기의 인간이 없음을 한탄한다. “옛 시인은 솔개와 물고기를 보고 도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감추어지는 것을 알았으며, 성인은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서 도가 잠시도 쉬지 않는 도리를 알았다. 하지만 오늘날 도를 배우는 자는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는가?”(63장) 결국 진심을 다해야만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감추어지는, 잠시도 쉬지 않은 도의 원리를 알 수 있으며, 아울러 도의 원리를 알아야만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서산은 설파한다. (끝)
권서용
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인제대학교, 부산가톨릭대학교 등에서 철학과 종교 및 윤리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상생의 철학』(공저), 『다르마키르티와 불교인식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