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내 부처님] 우리 곁에는 어떤 부처님이 계실까?
[특집] 내집 내 부처님 : 우리 곁에는 어떤 부처님이 계실까?
내 집 내 부처님 |
“가정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염불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존상은 사가에 모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1980년대, 한 재가불자가 광덕 스님에게 물어본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2017년인 오늘날도 여전히 온라인 포털사이트 지식코너에서 검색되고 있습니다. 12월호 불광, 불자로서 부처님 존상을 모시는 일을 권장하려고 합니다. 생활공간에 불상을 모시는 것은 자신이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합니다. 그렇다면 생활공간에 어떻게 부처님을 모셔오면 좋을까요. 가정집, 일터에서 부처님은 어떻게 자리하고 계시면 될까요. 우리 집에 모신 부처님을 소개합니다. 01 우리 집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유윤정 |
우리 곁에는 어떤 부처님이 계실까?
집에 불상을 모시고자 발심했을 때 떠오르는 궁금증 하나가 있다. ‘팔만사천 대천세계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이 계시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에 어떤 분을 모셔야 하는가?’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불상과 보살상을 모셨는지, 옛이야기와 불상으로 함께 알아보았다. 우리 곁에서 자비를 베풀고 계시는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어떤 분이신가. - 편집자 주
종로 견지동에 위치한 조계사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불교계의 총본산으로 건립되어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본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심 불전인 대웅전에는 사바정토의 석가여래와 동방 약사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 그리고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왜 석가여래를 모시는 대웅전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가 함께 계실까?
석가여래는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교화한 분이고, 아미타여래는 극락왕생 및 내세에 누릴 행복을 담당하는 분이며, 약사여래는 지금 당장 고통에 시달리는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이다.
조선 후기에는 석가여래를 모신 대웅전에 중생들의 소망에 따라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 등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시고 삼세불三世佛이라 칭했다. 삼세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 의미’인 삼세가 아니라, 석가여래의 사바정토, 아미타여래의 극락정토, 약사여래의 동방유리광정토를 의미하는 ‘공간적인 의미’의 삼세이다.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그리고 아미타여래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는 부처님이다.
| 사바정토 석가여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기원전 6세기 경 인도 카필라성에서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목적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출가해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의 ‘샤까무니Sākyamuni’ 즉 ‘석가모니’가 되었다. 이를 상징하듯 석가여래상은 왼손은 배 앞에 두고 오른손을 아래로 쭉 뻗어 마왕 마라의 항복을 의미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그림 1).
불교의 성립과 함께 석가여래는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신 분이다. 예부터 불교도들은 석가여래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든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해 모셔왔다. 통일신라 말에 불국사에는 전주 대도독이었던 김공이 죽자 그의 아내는 천에 석가여래상을 수놓아 불국사에 모셨다. 이것을 본 최치원은 「화엄 불국사의 석가여래상을 수놓은 당번幢幡에 대한 찬」을 지었다.
무지개가 바다의 태양에 번득이는 듯
봉황이 하늘의 바람에 춤을 추는 듯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도
푸른 하늘 향해 힘차게 나부끼리
한 올 한 올 한 맺힌 바느질
솜씨 다 바쳐서 수놓았으니
머나먼 도솔천 저 위에까지
그 정성 감응하여 통하리다.
또한 석가여래의 법은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고, 불타는 사바세계를 빠져나오게 하며, 원하는 바가 모두 성취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석가여래는 예부터 가장 많이 조성된 부처님이다.
| 서방극락정토 아미타여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는 서방 극락정토에 계시는 부처님으로 죽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오시는 분이다. 이 부처님은 무량한 수명을 약속하기 때문에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라 하고, 한량없는 빛을 상징하기 때문에 무량광여래無量光如來라고도 한다. 이런 이유로 아미타여래가 계신 극락세계를 지상에 실현시켜 놓은 곳을 무량수전·극락전·아미타전·미타전 등으로도 부른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한다. 그만큼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은 우리와 친근한 부처님과 보살님이다. 아미타여래는 중생의 수준에 맞는 아홉 종류의 설법을 하기 때문에 구품인九品印을 짓고 있다. 이것은 생전의 업에 따라 극락에 왕생하는 9종류의 중생을 의미한다.
아미타신앙에 의한 불상 조성 사례는 수없이 많은데, 이 가운데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그림 2)은 단종과 세종의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다. 금성대군은 어머니 소헌왕후가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 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의빈 권 씨는 단종 복위 사건으로 1457년 10월에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단종과 금성대군의 사망 일주기가 되는 1458년 10월에 흑석사 아미타불상을 조성한 것이다.
| 동방유리광정토 약사여래
인간의 근본 고통인 생로병사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고통은 병으로 인한 것이다. 인간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질병 문제를 불교에서는 약사신앙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瑠璃光如來’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약사신앙은 중생들의 병 치료와 그들이 가지는 현세적 소망을 성취하고, 마침내는 해탈하고자 하는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 신앙체계이다.
약사여래는 다른 부처님과 달리 손에 중생들의 병을 치유해주는 약그릇을 들고 있다. 약그릇의 형태는 보주형과 뚜껑이 있는 그릇형 그리고 뚜껑이 없는 발우형으로 구분된다. 우리가 ‘약발이 잘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약사여래가 든 약발藥鉢에서 온 것은 아닐까(그림 3).
태조 이성계가 병이 나자 태종은 아버지의 병 치유를 위해 약사법회를 개최했는데, 발원문에는 약발을 든 약사여래에 대한 언급이 있다.
“듣자오니 석가여래께서 경을 설할 때에 특별히 약사여래께서 세운 소원이 깊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맹세코 병고에 신음하는 이를 구제하려고 손바닥에 발우를 들고 다닌다.’ 했으니 부처님께서 어찌 헛말을 하시겠습니까. 이에 스님들을 모아 법회의 자리를 베푸니, 여러 스님들의 정진이 백억 부처님의 보호를 얻게 할 것입니다.”
|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관음’ 또는 ‘관자재’로도 불린다. 중생들이 어려운 일에 직면해 ‘관세음’이라고 부르면 언제든지 그 소리를 듣고 오신다는 분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정병淨甁과 연꽃을 손에 들고, 보배로 장식된 관冠에는 스승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순천 송광사 관음전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그림 4)은 비운으로 세상을 떠난 소현 세자의 세 번째 아들 경안군을 위해 궁중 나인 노예성이 1662년에 조성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무력한 왕이었고, 현명한 그의 아들 소현 세자는 명청의 교체기에 너무 일찍 세상을 읽은 혜안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자이다. 소현 세자 사후 그의 부인 민회빈 강 씨는 1646년 인조의 밥에 독을 넣은 혐의로 사약을 받고 죽었고, 이 사건으로 그의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일찍 죽고 셋째 경안군만이 살아남았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이 조성된 1662년은 봉림대군(소현 세자의 동생, 효종)의 아들 현종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이고, 경안군이 부인 허 씨와 혼인한 해이며, 궁중 나인 노예성이 62세가 되던 해였다. 경안군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궁중 나인들에 의해 양육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혼인을 한 경안군의 만수무강과 나이든 궁중 나인들의 평안한 노후를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기원했을 것이다.
|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날카로운 칼을 지녀 모든 장애와 번뇌를 없애는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불교의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여래와 비로자나여래의 협시보살이다. 문수보살은 여러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동자와 나이든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그림 5)은 세조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에피소드로 유명하지만, 보살상에서 발견된 조성 발원문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세조의 딸 의숙 공주와 그녀의 남편 정현조가 지혜로운 아들을 얻기를 바라며 조성했다는 것이다.
1453년에 혼인한 의숙 공주에게 13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던 것은 세조의 병만큼이나 왕실의 근심거리였을 것이다.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던 것은 고려 말의 공민왕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30대 중반까지 아들이 없었으나 연복사에서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도 그의 어머니가 삼각산 문수사에서 기도하고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문수’로 지은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고향 인도에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우리는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을 조성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생활에서 복을 구하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 그리고 문수보살을 신앙했으며, 사후 극락왕생을 위해서는 아미타신앙을 수용했다. 석가여래에 대한 신앙은 모든 불교신앙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