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의 구루, 앨런 와츠 '날지 않는 새는 죽여라'
두려움이 지배하는 것이 노예의 삶이다.
과거의 두려움은 자연의 재해, 질병, 전쟁, 권력의 수탈 등 비교적 드러나 있었다. 오늘의 인생, 특히 젊은이를 지배하고 배척하는 두려움은 과거의 것들 외에도 소외, 도태, 실직과 경제적 위협 등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어떤 경우든 권력과 사회주류세력은 젊은이의 진보적인 생각을 불온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다양한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유행을 쫓아가지 못하는 두려움, 성적과 취업의 실패.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신의 실종 등 두려움의 종류는 늘었다.
한 세대가 줄곧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도 있었다. 미국의 1960년대도 그런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 달 탐사,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에 따른 사상의 억압. 많은 젊은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조국의 위대함은 초라해졌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야만이 강요되고 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쿠바를 두고 세계를 파멸로 이끌 핵전쟁의 위험이 눈앞에 보였다. 그 어떤 이상도 총알 한 방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야만의 시대가 시작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커졌다. 미국과 소련은 여전히 제3세계에서 위협적인 군사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싫어도 전쟁에 끌려가 총을 들어야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인류가 꿈꿨던 전쟁 없고 이성이 지배하며 서로가 평화롭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났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할까? 젊은이들의 방황은 끝 갈 데 없이 폭발했다. 이때 캘리포니아 일대의 방송프로그램 하나는 작은 촛불의 심지가 됐다. 방송의 이름은 선문답(Talking Zen), 느린 목소리의 앨런 와츠(Allan Watts, 1915∼1973)가 디제이로 진행했다. 그 또한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사람이다. 세상은 그를 일러 히피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부모는 덴마크 출신, 앨런 와츠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 영국 교외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분위기는 기독교와 더불어 유럽 고대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들꽃과 나비 등 자연의 아름다움과 영성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과 아버지 사업의 바쁜 이유 등으로 그는 기독교 기숙학교에서 공부했다. 선천적인 약시 때문에 학교 교육엔 별 흥미를 갖지 못했다. 특히 제도권 교육의 무자비함이 그에게 흥미를 앗아갔다.
교사의 서재에 꽂혀있던 동양 문학과 예술작품에 매료됐다고 전한다. 그 시절 그가 읽고 영향을 받은 동양 종교철학 책 중엔 서구에 선불교를 전한 D.T. 스즈키 박사의 책이 눈길을 끈다. 동양사상과 불교에 관심을 갖던 중 16살 때 그는 런던불교공동체에서 조직 서기를 맡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지속적으로 명상을 했고 동양적 주제에 대한 글을 계속 발표했다.
1932년 그는 런던불교공동체저널을 통해 선불교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기독교적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그가 매료된 것은 동양의 예술과 가치관이었다.
의도적인 방법으로 대학진학을 실패한 후 앨런 와츠는 인쇄소와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런던불교공동체의 분위기는 불교 뿐 아니라 신지학회 관계자들과 구르지예프 등의 신비주의자, 프로이드와 융 등 정신분석가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이론을 탐구하던 곳이다.
단순히 불교적 전통 뿐 아니라 인간정신의 자유와 다양한 정신적 실험에 몰입하고 있었다. 1936년 런던을 방문한 스즈키 박사를 만난 후 그는 최초의 저술인 ‘선의 정신(The Spirit of Zen)’을 발표했다.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실마리를 이루면서 정리된 것이다.
앨런 와츠는 1938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선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선 수행 집단에 참석하는 한편 개인적인 탐구와 수행에 게으르지 않았다. 반면 일리노이 에반스톤 성공회 신학교의 소버리 웨스턴 신학 세미나에도 참여하여 기독교 성경, 기독교사, 교회사 등을 집중 연구하였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신비주의 종교의 필요성, 정신에 주목하다.’였다.
직후 성공회 성직자가 되어 1950년까지 시카고 대학교 교목으로 활동했다. 동양정신의 정수와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던 그가 생계를 유지할 직업으로 성공회 신부를 택한 것은 의외이다. 직후 그는 저명한 신화학자 죠셉 켐벨, 음악가인 존 케이지 등과 깊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1951년이 되자 당시 자유로운 분위기로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서부,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겨 ‘미국 아시아학술 연구원’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특정한 종교나 철학파를 넘어 일본과 중국 문화부터 인도의 베단타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종교 학문 지혜에 관한 것이라면 예외 없이 자유로운 탐구를 하던 곳이었다. 와츠는 이곳에서 가르칠 뿐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고 배우는 입장을 가졌다.
선은 참으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과거 그 어떤 종교적 전통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신과 직접 만나는 신비주의와는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피고 마음의 본성을 만날 때 예외 없이 이제껏 얽매였던 관습과 권위와 제도의 허울에서 튀어 올라 스스로 신성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앨런 와츠 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던 미 서부의 지성과 젊은이들은 이 동양에서 온 새로운 정신의 조류에 주목하고 있었다. 더 이상 과거의 이념과 제도는 활기를 주지 못했다. 선, 동양의 신비주의, 마약, 프리섹스, 광란의 파티와 반전 반제도 등을 주장하는 음악이 서부 캘리포니아 일대를 사로잡고 있었다.
앨런 와츠는 이곳에서 자신의 탐구를 시작했고 거친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1953년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과 버클리 일대에서 전파를 송출한 라디오 프로그램 선문답(Talking Zen)을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젊은이들은 열광했고 그는 이미 유력 인사가 되어 있었다.
1958년 유럽 여행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대가 융과 신화학자 뒤르켐 등과도 교류를 했다. 유럽여행 이후에는 공영방송에도 진출하여 정신성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 전하기 시작했다. 60년대 초에는 방송 중에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약물 등을 복용하면서 그 효과 등을 적나라하게 전했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선불교의 입장을 표했지만, 전적으로 불교적인 태도를 고수한 것은 아니었고 기독교나 기타 종교에 대해서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격언대로 “날지 않는 새는 죽여라”며 그 어떤 이론이나 가르침이라도 현실의 우리 자신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하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라고 강권했다. 그 때문에 전통과 미지의 가치 속에서 혼돈하던 젊은이들은 그의 가르침에 열광하여 관습을 타파하고 낡은 길을 버리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향해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그는 한창 나이인 1973년 세상을 떠났다. 세 번의 결혼으로 일곱 명의 자식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가르침은 아직도 살아남아있다. 과거 방송 프로그램의 육성은 아직도 그가 살아있는 듯 방송되고 있고, 그 내용들을 엮어 새로운 책이 나오고 있다.
속박 속의 삶, 더 이상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낡은 가르침들. 그것을 뿌리치지 않는 한 젊은이를 위한 새세상은 없다는 그의 주장, 그리하여 낡은 시대의 그림자를 쫓지 말라는 그의 권유는 지금도 유용하다.
* 출처 : 작가 김천 블로그 http://prowriter.kr/wp/?p=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