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숭유 정책 아래 조선의 불교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부처님의 복장유물은 한국전통문화의 타임캡슐

2017-07-03     양민호

부처님의 복장유물은 한국전통문화의 타임캡슐
복장 속 기록은 당대의 문화와 사상을 오늘과 잇는 소중한 정신적 · 물질적 자산


석가여래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이후 불상을 조성한 것은, 눈으로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 중생들이 믿음을 내기 때문이었다. 불상이 신앙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불상이 완성된 후 점안식(點眼式)이라는 의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점안식이 시행되기 전 불상 내부에 사리와 경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넣게 되는데 이것을 복장(腹藏)이라 한다. 특히 복장기록에는 불상의 명칭, 조성 연대, 봉안 장소, 불상을 만든 장인, 조성에 참여한 사람과 신분, 조성 배경 등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이런 점에서 복장기록은 종교적 가치뿐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배경과 사상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부처님 복장은 함부로 열 수 없기에, 복장기록 연구와 자료의 집적(集積)은 매우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0년부터 공동연구원으로 1차 연구의 토대를 쌓고, 2013년부터 본격 연구에 돌입, 오랜 연구의 결실이다.
 
300개 불상의 복장기록을 해석하다
복장기록 연구의 3가지 의미


저자가 연구에서 사용한 불상 명문 자료는 대부분 2013년까지 수집된 것들로, (사)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정리한 것을 토대로 했다. 이후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저자가 복장 조사에 참여한 논문과 자료를 추가했다. 이 책에는 300개 복장기록 원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첫째, 조선시대 불상 조성기를 통해 조선시대 불상 연구의 기초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불상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조성기에는 당시 불교계 상황을 알려주는 많은 자료가 함축되어 있다. 특히 제작 연도가 명확히 기록되어 불상의 양식을 편년하는 데 절대적인 자료가 된다. 또 불상을 제작한 조각가의 경우 16세기에는 승려들로 구성된 장인들[수조각승(首彫刻僧)]이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는 조선시대 조각승들의 계보와 활동 지역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둘째,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의 외연 확대. 불교사 연구는 주로 문헌 자료에 한정되어 진행되는데, 불상 조성기 역시 일종의 문헌 자료에 속한다. 그러나 많은 불교학자들은 불상 조성기에는 거의 관심을 두고 있지 않으며, 실제 불상 조성기는 주로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교사 연구에 복장기록 연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셋째, 조선시대 불사 동참자를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불상 조성기에 관한 연구는 미술사에서 조각승의 계보와 양식사 파악을 위주로 이루어졌으나 이 책은 불상 조성기에 나타난 불사의 소임자, 이를테면 불상 조성 과정을 증명하는 소임의 증명(證明)과 불상 조성에 필요한 비용 마련을 담당했던 화주(化主)를 비롯한 다양한 시주자(施主者)와 시주물품 등에 관해서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상 조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데이터베이스화는 조선시대 불교 조각사와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 가능하다.
 
불상에 관한 조선시대 보고서
억불숭유 정책 아래 조선의 불교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조선시대 불상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롭게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불상의 불복장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불상에 비해 대부분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현재 각 사찰의 불전(佛殿)에 남아있는 불상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불상이다. 이 불상들은 개금(改金)과 중수(重修)를 하면서 복장 기록이 발견되어 비로소 불상의 이력(履歷)을 알려주었다.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조성기는 조성 연도, 불상은 만든 장인[조각승(彫刻僧)], 불상 조성을 책임진 스님들, 시주자, 시주물의 종류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불상을 만들 당시 그 사찰에 머물렀던 스님들과 불상이 봉안되었던 사찰명이 기록되어 있어, 어떠한 인연으로 불상이 이동된 사항까지 파악이 가능케 해 불상 연구를 위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불상이 갖는 시대적 특징인 양식사 연구가 갖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고, 조선시대 불교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불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편 불상조성기 시주자, 조선의 건국과 함께 펼쳐진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 아래 왕실 중심에서 수행자와 서민으로 이어지는 조선불교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는다. 즉, 조선 전기에는 억불숭유 정책 아래에서도 왕실의 후원이 지속되지만 시대가 내려올수록 조선불교계는 차츰 자력으로 불사(佛事)를 진행하면서 수행자인 승려를 중심으로 서민화된 불사를 추진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펼쳐진 억불숭유 정책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불교사와 불교조각사, 국어학적 연구에 기여

기록은 그 시대를 파악케 하는 중요한 사료이다. 조선시대 불교 연구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관 주도의 기록과, 승려들이 남긴 개인 문집, 각 사찰에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불상의 복장기록은 불교 교학과 불교사 분야에서 조선시대 불교 신앙의 형태와 불사의 경향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한편, 국어학적으로는 이두식으로 표기된 시주자 인명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이두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 : 복장 시주자 이름에서 이두식 표기 ① 발음 “똥” 同叱→㖯 | 叱同→㖰, (예)朴介㖰 ② 발음 “씻” 種叱→㘒, (예)㘒介)
미술사 분야에서는 불상의 양식사 연구를 보완할 수 있고, 조선시대 조각승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 책은 조선시대 불교사와 불교조각사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가 꼽은 가장 기억 남는 복장 기록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에 깃든 조선왕조의 비극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은 조성 당시 아미타불 · 관음보살 · 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상이었는데, 현재는 본존인 아미타불상만 남아 있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가장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단종과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했던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상으로 판단된다.다. 1457년에 세조에 의해 처형된 단종(세조의 조카)과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을 위해 그 1주기가 되는 1458년에 금성대군을 아들처럼 보살폈던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가 주도해 만든 아미타삼존상이다. 특히 금성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미타불의 협시인 대세지보살 대신에 지장보살을 조성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1457년에 작성된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의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서방의 교주 아미타불은 이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연이 있어 한편 피불(彼佛)이라고도 칭하니, 중생을 인도하여 구연대(서방정토) 위로 들어간다. 관음보살은 괴로움을 구제해 달라는 소리를 듣고 중생의 고뇌를 속히 구제한다. 지장보살은 항상 명간(冥間), 죽은 사람의 영혼이 도달하는 곳에 있으면서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제해 낸다. 이 삼존의 위엄과 덕행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빈도(貧道)가 삼존의 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힘이 미약하여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다. 널리 존귀한 사람과 미천한 사람들에게 고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열반의 아름다운 뿌리를 심어서 다행스럽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발원했을까
세월호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다


조선시대 불상 조성의 가장 큰 목적은 돌아가신 분들의 극락왕생.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현세이익적인 무병장수와 종교적인 깨달음을 기원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상 조성에 관한 1817년의 기록을 보면 총 976명의 시주자들이 동참했는데, 스님과 일반신자로 구분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속가 부모님의 영가천도를 발원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효를 강조했던 당시 조선시대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저자가 연구를 진행 중이던 중 2014년 4월, 수학여행 중이던 조카가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저자는 만 3년이 되는 올해 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 저자는 어려운 연구 과정 속에서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을 조카를 생각하면 돌이켰다. 이 책에는 조카를 비롯해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이 극락왕생하고, 그 가족들은 평안을 얻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한편, 저자는 함께 3년간 공동연구를 이끈 사단법인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인 문명대 교수를 비롯한 공동 연구원분들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