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 나의 출가 인연이야기 / 활성스님

나의 출가 인연이야기

2017-06-15     활성스님

| 경봉 스님과의 인연

활성스님 / 사진 : 최배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법문한 적이 없습니다. 규모 자체가 약간 버겁습니다. 정말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이럴 때 해야 할 방법이 실수를 두려워 않고, 또 칭찬을 바라지 말고 말하는 것이겠죠. 오늘은 고요한 소리 30주년 행사이니만큼 여러분께 제가 왜 고요한 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씀드려야 구색이 맞을 것 같네요. 그래서 제가 고요한 소리를 시작하기까지 동기를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출가하기 전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였습니다. 기자 생활을 했었는데 잠깐 휴가 기간이 있었어요. 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머리도 식힐 겸 스님들의 어떤 체취도 맡아보고 싶어서 세상 처음으로 절을 찾아서 통도사를 갔어요. 거기 석지현 스님과 조금 인연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다 “스님, 절에 좀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저는 뭐 동해나 저 멀리 절을 소개해주실까 했죠.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 친견한 적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때 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스님의 법명도 처음 들어봐서 없다고 하니 “아이고, 경봉 스님 만나야지. 다른 데 갈 일 뭐 있나.” 이러시면서 극락암에 올라가 보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경봉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경봉 큰스님께 마침 신도분들이랑 계셨어요. 인사를 드리니까 스님이 저를 빤히 보시고는 “니 이름이 뭐꼬?”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동탭니다.” 제 속명을 말하니 “와 동태고?” 하시곤 또 여쭈셨습니다. 저는 그때 선담禪談도 모르고 그랬으니까 몇 번 물음에 제가 대답을 안 하고 멋쩍게 웃어버렸어요. 스님께서 “대답 한 번 더 하지 그래. 못할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래.” 말하셨습니다. 그 날부터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경봉 스님과 보내는데 스님께서 매일 아침 주지실로 부르시고는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하고 그랬어요.

한 날 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스님께서 “사람 한 생 안 난 셈 치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 말 의미도 잘 몰랐지만 그렇게 살아보라는 말이 끊임없이 머리에 남아 있었어요. 그렇게 일주일 동안 주지실에 앉아 젊은 스님이 가져다주는 밥상 얻어먹고 경봉 스님 손 잡고 산책 다녔어요. 예불도 할 줄 몰라 가만 앉아 있는 저에게 정말 잘 해주시고. 산에 만들어 놓은 토굴도 구경시켜주시고. 한참 후에 생각해 보니 출가해 살라는 말인데, 잘 몰랐던 것 같아요.

 

| 한 생 안 난 셈 치라

그 일주일이 지나고 부산에 들렀습니다. 제가 부산고등학교를 나와서 부산에 가니까 친구들이 많지요. 친구를 만나러 기원에 갔어요. 거기서 우연히 검사 친구 하나를 만나서 바둑을 두는데 스님 기운을 받아서 그런지 제가 그 친구를 두 번이나 이겼지 뭡니까. 그 친구가 저보다 수가 셌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친구가 “바둑 그만두고 내랑 이야기나 좀 하자.” 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 친구가 고민이 있는 거예요. 검사로 잘 나가니까 이곳저곳 다닐 일이 많다가 이제 고향인 부산으로 발령받았더라고요. 근데 또 서울 중앙 지검에서 올라와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이 왔다는 겁니다. 본인한테는 기회죠. 하지만 자기 때문에 자식들이 매일 학교를 전학 다니고 적응 못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겁니다. 또 서울에 가서 애들이 적응할 생각에 마음이 아팠나 봐요. 그래서 애들에게 해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산에 남기로 결정하고, 그날 광안리에 해수욕시켜주려고 애들이랑 부인이랑 바래다주고 본인은 잠깐 친구들 만나려고 들렀다는 겁니다. 그렇게 그 날 그 친구 만나 이야기도 하며 회포도 풀고 저는 서울로 또 올라갔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그다음 날엔가 신문을 딱 펼쳤는데, 거기에 정면에 대문짝만하게 ‘검사 일가 화재로 사망’이라는 글이 쓰여 있어서 뭔가 하고 보니까 그 친구인거요. 나랑 대화한 그 친구가 그렇게 가버린 거예요. 친구가 부산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데 저녁이라 피곤했는지 담배를 피우다가 졸았나 봐요.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담뱃불이 번져서 큰불이 되고, 독한 연기가 막 나오니까 온 가족이 창가로 피했네. 이 친구가 자기 손으로 애들이랑 아내를 창밖으로 던지고 자기도 뛴 거예요. 아파트 10층인가 그랬는데 밑에서 주민들이 나와서 이불을 펼치고 있어서 그랬나 본데 거기에 딱 들어가기가 어디 쉽습니까? 결국, 다 죽었습니다.

참 이런 기사를 보니까 하도 무상해서. 그때 무상이라는 게 불교에서 나온 줄도 몰랐는데, 무상이라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것도 삶인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한순간에 가는구나.’ 이 생각이 들면서 스님의 “한 생 안 난 셈 치라.”는 말이 떠올라 정말 이번 세상 안 난 셈 치자고 출가에 결심이 섰습니다.

 

| 빚 갚는 삶

출가한다고 어머니한테는 한 사흘 말하니까 알았다 하시는데,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죠. 나름 2대 독자였는데 자식도 없이 출가한다니까요. 그래도 뜻이 확고해 계속 말씀드리니, 아버지 꿈에 노장스님이 찾아와서 아버지를 계속 막 때린다는 겁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번을 그런다니까 하는 수 없이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도 허락을 받고 출가를 하려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는 결제일 해제일 맞춰서 절에 들어가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내일모레 결제일이더라고요. 직장도 관둬야 하니까 바로 사장님 찾아갔죠. 사실상 일방적 통보를 하러 간 겁니다. 그분이 이전 직장에서부터 저를 정말 아껴주시던 분인데 그 은혜를 의리도 없이 저버리고 말씀드렸어요. 무례한 짓이죠.

그래서 출가하려고 경봉 스님 찾아갔습니다. 스님이 “니 공양주보살 할래? 안 할래?” 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남들 하는 거 뭐든 다 하겠다고 했죠. 스님께서 행자 생활로 석 달 공양주보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그것도 선방 수좌스님이 주로 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조만 하는 거라 불 때고 쌀 씻는 게 전부였어요. 근데 그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이 쌀 부처님께 올리는 거로 생각하고 석 달 지극 정성으로 씻었어요. 그해 칠, 팔십 명 선방스님들 드실 쌀을 씻으면서 여기 돌 하나 나오면 큰 죄 짓는다 생각했죠. 큰스님께서 “내 돌 안 씹고 밥 먹어 본 적 처음이다.” 말씀해주시데요.

석 달 지나고 사미계를 받을 때 우리 스님께서 주신 말씀이 “불교 중흥의 동량이 되라.”입니다. 이 말이 내 머리에 확 박혀서 지금까지 내 좌우명이요. 그 후의 지금까지 내 삶이 이 말씀에 입각해 살아왔어요.

그래서 중흥하려 보니까 세상에 참 빚을 많이 지었어요. 출가하기 전에 부모, 형제뿐 아니라 회사 다닐 때 그 사장님에게까지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살았던 겁니다. 세상살이 잘못 산 거지요. 다 갚아야 했습니다. 스님이 된 것도 빚 진 거였습니다. 은사스님에게 빚 갚아야 했고, 통도사에도 빚 갚아야 했고, 또 봉암사 살았으니까 봉암사 빚도 갚아야 했죠. 갚을 빚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소란스러운 서울에 있었는데, 극락암 아란야같이 소쩍새 울고 풀 냄새 가득한 천국에 살게 되었으니 다 빚 진 거 더라고요.

세세하게 나누면 한도 끝도 없이 빚진 삶이라 하나하나 갚아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갚아 나가는데 희한하게 세속에 있을 때는 매번 막히던 것들이 중 되고 나니까 다 잘되는 겁니다. 군대 갔다 서울 생활 한 10년 하면서 내가 직장 열두 번도 더 바꿨어요. 내가 가기만 하면 다 망하고 안 되는 거요. 안 되는 일이 그렇게 많았는데, 스님이 되니까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죠. 마음먹은 대로 다 돼요. 근데 그렇게 빚을 갚으면서도 하나 못 갚는 게 있었어요. 부처님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그래서 고요한 소리를 시작했죠. 부처님 원음 전해서 부처님 빚 갚으려고요. 그게 어느새 30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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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문은 지난 4월 15일 고요한 소리 창립 30주년 기념 ‘중도포럼 2017’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처음 법문을 설한 활성 스님 법문의 일부입니다.

 

 

활성 스님

1938년 태어나 1975년 통도사 경봉 스님 문하에 출가했다. 통도사 극락암 아란야, 해인사, 봉암사, 태백산 동암, 축서사 등지에서 수행 정진하였다. 1987년 근본불교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단체 ‘고요한 소리’를 발원했다. 10・27법난 후 불교정화중흥회의 사서실장을 맡았으며, 봉암사를 종립특별선원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현재 고요한 소리 회주로 지리산 토굴에서 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