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보살행론]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화 수행

2017-06-15     재마 스님

聞 - 예경, 악업 내려놓기, 서원

시방의 모든 곳에 계시는 원만하신 부처님과 보살님들, 대비심을 갖고 계신 모든 분들께 합장하고 지심으로 원하나이다.(2:27) 이전의 불선업을 정화하여 바르게 하고 이제부터는 더 이상 악업을 짓지 않겠나이다.(2:9) 제가 악업을 정화하기 전에 먼저 죽게 된다면 어떻게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오리까. 하오니 신속한 방법으로 구호해주소서.(2:32) 이제 보호주 앞에서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제가 겪을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수없이 예경하고 또 예경하오며… 중생들을 이끌어 주시는 인도자들이시여, 제가 저지른 모든 악으로부터 저를 구해 주소서. 선하지 않은 이런 악행을 이제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나이다.(2:64-65)

 

샨티데바 스님은 모든 불보살님들이 커다란 자비로움을 갖추고 계시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들을 신속하게 구호하고 보호해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악업을 정화하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불보살님들께 예경 올릴 것을 권합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보현보살 10대 행원에서도 예배와 공경을 첫째로 들고 있습니다. 모든 세계의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께 보현의 수행과 서원의 힘으로 깊은 신심을 내어 눈앞에 뵙는 듯이 받들고 청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지치거나 싫어함 없이 항상 예배하고 공경하라고 설합니다. 이를 고려시대 균여 스님은 향가 <보현십원가> 에서 ‘이 몸으로 법계에 가득한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께 절하고 싶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절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탁월한 방법입니다. 모든 붓다께, 붓다의 위대함과 공덕을 기리며 절로 예경을 올리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정화수행이 됩니다. 틱낫한 스님은 절을 하는 세 번의 엎드림으로 세 가지 통찰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영육의 모든 조상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지혜와 자비가 자신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엎드림은 대지와 모든 생명체와 하나가 됨을, 세 번째는 앞의 두 번의 엎드림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개인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을 통한 지혜의 등불을 켜는 또 하나의 예경입니다.

절을 통한 참회도 붓다께 올리는 예경입니다. 절을 하면서 바닥에 몸을 내려놓을 때는 자신의 불선업을 정화하기 위해 모든 죄업을 내려놓고, 반성하며 끊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몸을 낮춥니다. 머리와 온몸을 숙이고 양 무릎을 바닥에 댄 후, 두 손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펴서 두 귀 옆에 붙일 때는 자신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받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이 몸동작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아만, 아상 등 일체의 이기심의 속박을 끊겠다는 비움의 서원입니다. 오체투지 절은 행복과 수행의 진보를 막는 감각적 욕망과 악의와 성냄, 게으름과 나태, 들뜸과 후회, 의심의 다섯 덮개를 걷어내는 수행입니다.

또한 서원의 절은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행위와 수행의 결과를 불보살들과 일체중생을 위해 하나도 남김없이 회향하겠다는 공양이기도 합니다. 다시 일어설 때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모든 번뇌를 끊고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원과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함께 세웁니다. 또한 모든 붓다의 가르침을 끝없이 배우고 나누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께서는 어떤 분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경의 절을 올리고 싶으신지요? 절을 올리면서 자신의 어떤 것들을 내려놓고 끊어버리고 싶은가요? 행복한 삶을 위한 어떤 서원을 세우고 싶으신가요?

『심지관경』에서는 이미 참회는 번뇌의 숲을 태우고, 참회는 영원한 즐거움을 주고, 참회는 천상으로 가게 하고, 보배를 얻게 하며, 금강석과 같은 생명을 주고,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게 하며, 깨달음을 이루게 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게 한다고 설합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매일 아침 108배를 올립니다. 함께 108배를 올려보면 어떨까요? 108배가 힘들 경우 틱낫한 스님이 가르쳐주신, 대지에 온몸을 내려놓으며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세 번의 엎드림을 천천히 해보시길 권합니다. 혹은 잠자리에 들기 전, 나에게도 죽음이 다가올 것이며,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덕을 짓기를 다짐하며 세 번 혹은 일곱 번의 절을 올리는 것은 어떨까요? 절을 올리면서 부정적인 성향인 탐욕과 성냄, 의심 등을 내려놓고, 그 날 하루 지은 악업을 참회한다면 평온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발원한다면 고요한 행복감에 젖을 것입니다.

혹 홀로 여행하고 계시다면 온몸을 대지에 내려놓으면서 모든 이와의 연결을 느껴보시기를 초대합니다. 두려움이나 공포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면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분의 이름을 부르며 절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최소한 7일에서 21일 정도 하루에 삼배 이상 올려보시고 마음과 몸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관찰해보시길 권합니다.

聞 - 공덕 짓기, 보리심 일으키기

염라왕의 사자에게 붙잡혔을 때…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공덕뿐인데…(2:41) 하찮은 병에 걸려도 두려워하며 의사의 말을 따라야 하는데 하물며 탐욕 등 수많은 번뇌의 병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나이다. …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보리심 이외에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다른 약은 찾을 수 없나이다.(2:54-55)

 

여러분은 이생을 떠날 때, 공덕과 악업 중에서 어떤 것을 더 많이 가져가고 싶은지요? 공덕의 사전적인 의미는 선한 의도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마음씀씀이와 행위를 말합니다. 덕행과 선행, 보시 등 위험에서 보호해주는 모든 행위는 공덕이 되며 이는 자신을 지켜줍니다. 경전에서는 공덕이 행복한 죽음을 보장한다고 전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바라문 품」의 “이생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자제하고 살면서 공덕을 지은 것이 죽을 때 행복을 가져온다.”는 말씀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또한 “보호자 없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생명을 휩쓸어갈 때,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는 죽는 순간에도 공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인데요,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공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저는 죽음의 순간에 지을 수 있는 공덕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샨티데바 스님은 『입보살행론』 제 1장에서 “보리심에 의지하면 극중한 악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순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나고”(1:13), “보리심은 온갖 죄업을 일순간에 완전히 소멸시켜준다.”(1:14)고 하셨습니다. 제 2장에서도 우리의 번뇌라는 병에 대한 단 하나의 약이 보리심이라고 천명하듯이 보리심의 공덕은 악업과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임종할 때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행복하게 이생을 떠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십지경』에서는 보리심의 공덕을 보고, 부처님에 대한 신심으로, 불쌍한 중생을 보고, 선지식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아 보리심을 일으키라(發心)고 설합니다. 또한 『보살지론』에서 보살은 부처님과 보살들과 선지식의 보살핌을 받고, 중생의 고통을 보면 대비심이 생겨서, 보살의 고난과 고행을 겁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남을 위하는 마음을 얼마나 자주 일으키고 있나요?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행동은 얼마나 자주 하고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의 뇌는 타인을 돕거나 도움을 받을 때, 다른 사람이 도움을 받는 것을 목격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회로가 있다고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누군가 고통 받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될 때 그가 친한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기, 길을 가다 마주치는 이들을 향해 그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기, 그들이 공덕 지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기원해보시길 권합니다. 고맙습니다.

 

재마 스님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불교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움직이는 법당, 춤추는 절을 꿈꾸며, 매주 소마명상여행을 이끌고 있다. 또한 종교를 초월해 ‘마음비추기’ 피정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완화의료(암)병동에서 매주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위한 영적 돌봄 봉사를 하고 있다. 박사논문으로 「사무량심의 가치 재발견과 체화프로그램 개발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