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백(兩白)이 갈라지는 화엄성지 - 부석사, 비로사, 희방사

바라밀국토를 찾아서, 영주시 지역

2007-09-14     관리자


최근의 시도 통합으로 통합 영주시가 된 이곳 영남땅의 시발지를 그냥 영주시로 부르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연들을 그 속에 묻어버리는 듯하다. 오랫동안 불리워졌던 고유의 지명이 아직은 더 친근하기 때문이다. 고려인삼으로 유명한 풍기, 군사요충지로 잘 알려진 순흥,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의 고향이자 영남유맥(儒脈)을 잇는 영주. 이 세 군이 통합된 것은 일제시대인 1914년이었다. 그러다 1971년 영주가 시로 불리되고 나서 불린 군 이름이 영풍, 다시 24년만에 영주시로 통합된 것이다.
지난 두 달 동안 찾은 곳들이 우연찮게도 화엄성지들이어서 내친 김에 동방의 화엄종찰 부석사가 있는 이곳을 향하기로 작정했다. 산골에서는 아직 봄소식이 더디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맘때면 아무 곳에서고 지천이 되기 십상인 개나리, 진달래도 찾아볼 수 없었고 달래, 냉이 따위의 풋것들도 냉큼 눈에 띄지 않았다. 산꾼들에게 '남한 제일의 겨울산행처'라고 소문난 소백의 연봉이 아직도 흰머리를 하고서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육지 소의 삼다제주(三多濟州)라고 불리웠다는 이 곳. 바람이나 여자야 어떤지 몰라도 돌은 산 속마다 가득가득 했다. 나무를 제하고 나면 온전히 돌산이 될 듯 싶었다. 이 돌산은 그냥 돌산이 아니다. 천미터를 훨씬 넘는 준령들이다. 하기야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사람들이 정감록의 난세를 피할 양백(兩白 - 태백과 소백)의 피난처로 여기고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고 하니 풍수에 숙맥인 사람이 보기에도 험한 산세에 파묻힌 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부석사는 양백이 갈라지는 가장 깊은 골짜기 속, 하지만 땀 흘려 올라서면 온천지가 굽어보이는 산등성이에 세워져 있다. 삼단의 기단석이 층층이 쌓여진 전형적인 계단식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그 솜씨가 창건주 의상 대사 때의 것이라 하니 천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된 신라 장인의 축조기술이 놀라웁기만 하다. 부석사는 창건설화로도 유명하다. 설화를 뒷받침하는 선묘각(善妙閣)이나 무량수전 우측의 부석(浮石), 마당의 용틀임하는 용바위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재미가 살갑다.
부석사에는 국보 17, 18, 19, 45, 46호의 석등, 무량수전,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벽화 등의 성보가 모셔져 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있다. 이중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축으로서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대웅전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의 건축미를 간직한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또한 조사당벽화는 현재 보존상의 문제로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고 있으나 역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불화로 꼽힌다.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최순우 선생이 우리나라 경치 중에서 엄지로 꼽았던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安養樓)에서 바라보는 태백준령의 모습이 오늘은 짙게 드리운 운무에 가려 희끄무레하게밖에 볼 수없었다.
부석사는 소백의 줄기라기보다는 태백의 본령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주문에도 '화엄종찰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 있다. 소백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의상 대사와 관계있는 사찰이 또 있다. 바로 비로사다. 소백산 비로봉 아래 있기에 저 아래 풍기에서부터 올라가자면 왕복 한나절이 꼬박 걸리는 등산로이다. 하지만 요즘은 버스가 띄엄띄엄 다니며 좁은 산길로 세속의 홍진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비로사는 진정(眞定)이란 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가난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던 그에게 태백산에서 의상 대사가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곧바로 출가하여 의상 대사께 화엄학을 배우고 있는데 3년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진정은 7일 동안 선정에 들었다가 의상 대사께 사실을 아뢰니 의상 대사는 3,000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는 날 진정의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자신은 도솔천에 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런 영험탓인지 비로사는 뒤에 역사 속의 대사찰로 발전하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을 방문하여 진공(眞空)대사에게 감화받아 스님이 입적하자 진공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寶法)이라는 탑호를 내려 탑을 세웠다. 이 탑에서는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청구(靑丘)라 부른 흔적이 보인다. 고려 인종 때에는 왕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모시게 했다고하며, 조선 세조 때에는 왕실에서 복전 다섯 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또, 예종 때에는 김수온이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고 하니 그 영화는 가히 800년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병은 이 절에서 승군 1,000여 명이 발병해 나선 것이 앙심을 품고 모든 사우와 유적을 불태워버리니 현재 남은 것은 대웅전 안의 부처님 두 분(보물 996호.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상, 석조아미타불상)과 당간지주, 보법탑비밖에 없다.
부석사를 내려와 이곳 비로사로 오기전에 몇 군데의 유적을 더 찾았다. 우선 순흥면에 내려 원래 숙수사(宿水寺)였던 소수서원에 들렀다. 주자학을 도입한 이 고장 출신의 안향(安珦)이 젊은 시절 공부했다던 숙수사는 조선조 어느 때인가 폐찰이 되었다고 한다. 중종 때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 터에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안향을 배향하니 그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953년 지금의 청소년수련관 자리를 파다가 청동불상 25구가 나왔다고 하는데 아마도 어느 시기엔가 절을 허물고 불상을 폐불시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여기 말없이 서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았으리라 생각하니 훤출한 두 돌기둥에 눈길이 더 간다.
순흥에서 죽계구곡으로 올라가면 좌측 고랑에는 초암사가 우측 고랑에는 성혈사가 있다. 이중 성혈사 나한전의 문살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물문양과 꽃, 동자상이 새겨진 문살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넋을 잃게 만든다. 한참을 쳐다보다 남은 일정에 쫓겨 아쉬움을 털고 내려왔다. 여기서 한참을 내려와 다시 다른 골로 내려온 만큼 올라가야 다다르는 초암사에는 부도 2기와 3층석탑이 절마당에 늘어서 있는데 한창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얼마후면 번듯한 가람구조를 갖출 것 같았다. 이 죽계구곡은 퇴계가 극찬했다고 하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초암사에서 내려와 다시 비로암으로 향하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안 보면 후회할 좋은 경관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초암사에서 국망봉으로 오르는 산길을 따라 약 2백 미터쯤 오르면 왼편으로 달밭골이란 곱디고운 이름의 산촌을 향하는 길을 발견한다. 전형적인 산간마을인 달밭골에 다다르려면 높이 3 미터 이상의 외나무 다리와 의심 많은 화전민촌 장정개들의 반갑잖은 마중을 받으며 2시간쯤 더 가야 한다. 달밭골 마을로 내려오면 다른 골짜기에 엇비슷 기대어 선 채 보이는 절이 비로사이다.
비로사는 여기 저기 널려있는 주춧돌의 숫자를 눈에 보이는 대로만 헤아려봐도 엄청난 규모의 대가람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주지이신 성공 스님께서 적광전(寂光殿) 중수 불사를 위해 모연문을 돌리고 예전의 대가람의 면모로 일으켜 세울 원을 내셨다고 하니 불보살의 가호 아래 비로사가 옛모습을 찾게 되길 바랄 뿐이다.
고단한 발길을 희방사로 향했다. 문경의 새재가 높긴 높아도 이곳 죽령의 고요에 비하면 분주하게만 느껴진다. 굽이굽이 죽령을 오르다 오른편으로 새로 난 아스팔트길로 접어들면 '소백산 국립공원 희방사 지역'이라는 푯말을 만난다. 소백을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코스이기에 요즘은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새로 난 아스팔트길로 오르면 희방사는 물론 꼭대기의 관측소까지도 오를 수 있다고 하니 오르는 발걸음이 다소 맥이 빠진다.
계곡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보면 아스팔트길과 다시 만나고 좀더 오르다 다시 헤어져 30분쯤 가면 옆으로 철사다리길이 아찔하게 놓여 있는 희방폭포를 만난다. 20여 미터의 물줄기가 시원스레 쏟아져 내리는데, 여느 산마다에도 항상 한 가지씩 숨기기 마련인 비경(秘境)이 소백에서는 이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아찔한 철사다리를 허위허위 오르면 희방사가 보인다. 643년 두운 스님이 창건했다는 곳이다. 월인석보 판본이 모셔졌던 사찰이라기에 해인사 정도는 아닐지라도 규모가 꽤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원래 대웅전 자리에 있었던 요사채는 한창 뜯어내고 있었다. 뜯고 있는 건물 이마에 퇴경 권상노 선생의 판액 글씨만이 힘있게 빛나고 있었다. 계곡을 건너 이보다는 나중에 지었을 것 같은 대웅전도 낡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바로 전날 사미계를 받고 새로 오셨다는 선행 스님을 만나 얘기를 듣기로는 조금 나중에 지은이 대웅전도 임시방편이고 주지이신 설송 스님께서 원 대웅전 자리에 머잖아 번듯한 불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기쁜 일이다.
근처에 있다는 창건주 두운 스님이 머무셨다는 천연동굴을 찾는 것도 또 두 기의 부도를 감상하는 것도 나중의 인연으로 돌리고 법당 안에 들어가 주존불게 인사를 드렸다. 서둘러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두배는 가깝게 느껴졌다. '50년 전쟁의 폭격통에서도 두운 스님의 천연동굴 속에서 무사하셨다는 부처님의 미소가 가피가 되어 등뒤로 슬몃 밀어주는 듯 했다.

영주에서 가볼 만한 곳 / 순흥면 유물박물관
전통을 지키는 마음
한 작은 면소재지에 박물관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좀더 깊은 산골에 찾아가면 아직은 볼 수 있는 옛 생활도구 몇 가지 놓고, 고서(古書)라도 한두 권 구색을 맞춘 그 정도의 것을 떠 올리기가 쉬울 것이다.
풍기에서 부석면으로 향하다 보면 순흥면사무소가 있다. 옛날 같으면 순흥도호부가 있었던 곳이니 인근지역에서는 꽤 큰 저자거리였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면사무소 앞에는 옛모습 그대로의 2층 누각이 있고 관아터라 짐작되는 마당이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뒷편에는 고을 원님의 관저였을 성싶은 곳이 있는데 이곳은 지금 경로당으로 꾸며져 연못을 내려보며 동네 어르신들이 장기를 둔다.
봉서루(鳳棲樓), 그 잘생긴 누각 안에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 글씨가 보존되어 있다. 마당에는 인근에는 발굴된 불상이 다섯 분이나 모셔져 있고 대원군의 척화비도 있다. 유물관 안에는 어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급 유물에서부터 조상의 손때가 그대로 묻어있는 생활도구들이 100여 점 갖추어져 있다.
이런 면소재지를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전통'이란 남들이 가지지 못한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부석사에 가게 되면 이곳, 살뜰하게 보존공간을 마련하고 관리하고 있는 순흥면사무소 앞뜰을 꼭 들러볼 것을 제안한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