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도 정화가 아닙니까?
창간 20주년 기념 연속 대담
2007-09-13 관리자
진관스님 최근 우리 종단의 무제가 사회적인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종단의 원로이시며 한국불교의 근대사를 한눈에 읽고 계신 석주 큰스님을 모시고 월간『불광』창간 20주년 기념 대담을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불교를 얘기할 때 5∼60년대의 불교정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정화를 비구 - 대처간의 문제로만 부각시켜 본다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취처의 강요 등 일제시대의 한국불교에까지 소급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20년대에 출가하시어 한국근대불교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다 겪으신 원로스님으로서 우선 이 일제시대의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석주스님 글쎄, 나는 잘 몰라요. 이웃나라 사람들이 강성해져서 그네들이 시키는 대로 우리 스님들이 많이 따라 하기도 했지.
진관스님 3·1운동 때, 만해스님이나 용성스님께서는 직접 참여 하셨는데 그외의 다른 분들은 어떠했습니까? 특히 지방에서 본사급 사찰들에서 말입니다.
석주스님 절에서 강원공부한다고 하면 지금의 지식인에 속하는 젊은이들이었어요. 그러니 범어사 같은 데에서는 부산의 지식인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동래 장날이 사람들이 주도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지. 통도사도 마찬가지예요. 양산 장날 통도사 젊은이들이 내려와서 주도했어요.
진관스님 정화 당시에는….
석주스님 당시에는 전국의 절마다 행정은 다 대처승들이 맡았어요. 그래서 입재 때가 되면 20명 혹은 50명씩 제한을 둬 가지고 방부를 받는데 그 이상이 되면 받지를 않아요. 그러니 독신승들이 생각하기에는 수행하는 사람은 우리들인데 양식 걱정 때문에 사람도 받지 않고 하니 불만이 많았지요.
송만암 스님이라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 스님께서 불국사에서 머무시면서 큰절 주지는 독신승들이 해야 하고 또 수행하는 사람은 큰절에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아주 소박하게 시작한 것이 정화예요. 이후에 통도사에서 한 번 더 회의를 하고 운허 스님하고 청담 스님이 발기인이 되어서 더 크게 시작됐고 선학원에서 비구승대회를 하고 나서 동산 스님, 금오 스님, 효봉 스님이 가세하면서 이 정화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나게 됐지요.
처음에는 우리 힘이 약하기 때문에 이 박사가 가끔씩 유시를 내려줘서 힘이 되기도 했고, 또 어디서 그런 힘들이 나는지 스님들의 단결력이 컸어요. 그래서 끝까지 싸워서 정화를 한겁니다. 나중에 재판이나 하고 외래의 힘을 받은 것은 우리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진관스님 예, 그렇게 정화가 되면서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계종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태고보우다 아니면 보조국사다 하는 종조를 모셔야 하는데 아직까지 이것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정리가 되어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제 당시에도 조계종이다. 임제종이다 하는 이런 논란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석주스님 일제때도 그런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 당시도 종은 조계종이지만 종조에 대해서는 상당히 차이가 많았는데 가령 권상노 씨라든지 김영수 씨 등은 다 역사의 대가들이었는데 태고보우 선사가 종조라고 했고, 이종익 박사나 이불하 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이불하 라는 사람이 처음 이 의견을 얘기했지요. 보조국사가 종조라고요. 그때 세력으로 봐서는 권상노 박사와 그이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마 나중에 정화를 하고 나서 권상노 박사나 그이네들이 다 죽었어도 마찬가지였는데 대부분은 보우 선사가 우리 종조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돌아가신 종정 스님도 그렇게 했고. 나는 아직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불하 씨나 이종익 박사는 그이네 나름대로 아주 열열하게 자기네 주장을 폈어요. 그네들에게는 그네들대로의 증거가 있었어.
진관스님 예, 이 얘기는 이쯤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해방 후에 혁신불교운동을 하시고 또 정화운동도 하셨는데 이 두 가지가 접목되는 어떤 접점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석주스님 혁신운동은 해방직후에 어떻게서든 불교를 혁신시키자는 모토로 청년들이 모인 것이지. 그때는 무슨 종조문제도 없었고 정화문제도 없었습니다. 그저 불교를 잘하자는 모임이었지.
진관스님 혁신불교운동이라고 하면 일반 불자들은 물론이고 스님중에서도 생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해방후 통도사 경봉스님을 비롯해서 여러 스님들이 참여하신 걸로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석주스님 처음에 혁신운동 할 때에는 돌아가신 조명기 씨라든지 이구열, 장상곤 등의 불교청년들이 모두했고 나도 참여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토론도 하고 아주 열심히 했어요. 이종익 씨는 따로 혁신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했는데 나중에 여성동맹까지 모두 모여서 혁신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죠. 그래서 이사장을 경봉스님을 모셨지.
당시에는 좌우 대립이 심해서 번번이 갈등이 많았는데 우리는 그런 데에 휩쓸리지 말고 불교혁신만 하자 결의하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신도들도 많이 따르고 했었죠. 그런데 나중에 총무원에서 우리 요구사항들을 들어주질 않아서 우리가 총무원을 하나 만들기도 했었지요. 그래서 화엄사 정 모(某) 스님을 원장으로 했었는데 그 다음부터 아주 많이 틀려졌지요. 당시 총무원장이 김법린 씨였는데 우리를 보고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하곤 했어요. 채영환, 유엽 씨가 그때 총무원 부장으로 있었지요.
그러다가 6·25가 터졌어요. 그뒤에는 전부 피난 다니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참 김구 선생이 언제 들어오셨나요? 전쟁전인가?
진관스님 예 전쟁 전입니다.
석주스님 그때 이승만 박사는 남한 단독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했고 김구 선생은 그렇지 않았을 때였어요. 남북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당신이 직접 평양에 가셨잖았요. 협상을 하러 간다고 갈 적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 갔어요. 불교청년들도 따라갔죠. 불교진영에서는 이구열이니 정상곤이니, 개운사에 혜 모(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좌익이론이 가장 밝은 이였어요. 다른 사람은 그런 이가 없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따라 갔던 거예요.
또 선학원에 용담 스님이라고 있었는데 그이가 한용운 스님 상좌였어요. 나중에 나하고 선학간행회를 만들어 가지고 선가구감을 번역한 분이지요. 그분도 김구 선생을 따라 갔는데, 나에게 얘기하기를 그 분 아우님이 신의주에서 병원을 하고 있었는데 이북 정부에서 이 병원을 접수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 아우님을 데려오겠다고 가셨어요. 이분들이 갔다가 몇분 돌아오셨는데 나중에 도로 다 들어가버리셨어요. 6·25사변중에 나는 피난을 못가고 여기에 있었는데 그분들이 다 나왔더군.
도봉산으로 덕절로 피난 다니는데, 탄허 스님도 같이 다녔고 오녹원 스님도 같이 다녔었지. 처음에는 멀리 갈 생각을 못하다가 8월 추석 지나고 걸어서라도 부산으로 갈려고 그러는데 열나흘 날에 여기 창동 벌판에 유엔군 폭탄이 뚝뚝 떨어지더군. 그래서 못 내려갔어. 그렇게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타나서 밤중이면 이불도 달라고 하고 먹을 것도 달라고 해서 도저히 불안해서 못 견디겠더군.
나중에 수복되고는 내가 또 예감이 이상해서 선학원으로 돌아오고 싶지않았어요. 그러다 어느날 돌아와보니 아니나 다를까 종로경찰서에서 부르더군. 그때는 선학원은 빨갱이 소굴이라고 해서 소문이 자자했는데 종로서 2층 사무실에 올라갔더니 남로당 조직표를 그려놓고서 남로당에 언제 입당했냐고 그러더군. 그래서 나는 불교혁신을 했지 그런 것 한 적이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해를 좀 하는 것 같아. 그러고 또, 백석기가 그때 서울시 사회국장으로 있었고 조명기 씨도 내세워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빨갱이겠냐고 했더니 사흘을 조사받고 무사히 풀리게 되었지.
그뒤에는 군인이 한 번 또 왔어요. 허, 그때는 참 위험한 시대였는데 나는 부처님 은혜로 산 것 같아요.
진관스님 그 당시에 스님께서 학문은 어떻게 하셨나요?
석주스님 학문? 학문은 범어사서 강원 졸업하고 올라왔던 거지. 아, 그전에 대동아전쟁 때, 부산 온천장에 보면 금정사라고 있었어요. 거기에서 원장을 하면서 효봉 스님도 모시고 하다가 올라 왔던 거지. 대동아전쟁 때 모두 보국대에 끌러가고 그랬는데 나는 거기에 안 가려고 상노전이니 중노전이니 하는 부처님 전에 시봉하는 게 있었어요. 그래 중노전에 있었지. 해방하는 날에는 무지개가 섰었지. 그날 일본천왕이 항복하는 방송을 하고 그랬어요. 나는 세상이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 서울로 올라오는데 노스님들이 너무 이르다고 만류했었어. 그래도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선학원에 와서 그런 혁신운동에도 가담하고 그랬던 거야.
진관스님 그럼 한번 이렇게 규정을 지어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근대 우리 사회운동에서 만해 스님이나 용성 스님 이후에는 스님께서 그 대를 잇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석주스님 아니, 나는 아니지. 나 말고 김법린이니 백 박사니 박윤제 씨 등등 쟁쟁한 사람이 많았지. 박윤제 씨는 한독당에서 김구 선생을 돕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도 납치 당했을거야. 장동하니 박윤제니 허영호 모두 여러 사람들이 납치되어 갔는데 허영호는 큰 학자였어요. 동래에서 국회의원 출마해서 되고 그랬어요. 범어사에서 국회의원이 셋씩이나 나왔어요. 김법린 씨도 거기서 나왔지. 모두 쟁쟁한 사람들이고 만해 스님하고 만당(卍黨)인가도 같이 하면서 독립운동도 했던 사람들인데 요즘 친일파 책을 보면 그이네들이 모두 친일파로 되어 있어.
진관스님 일제시대나 해방직후를 겪으시면서 당시의 많은 선지식들과 함께 일들을 많이 도모하시기도 하셨을텐데 스님의 은사이신 남전 스님이나 만해 스님, 석두 스님, 효봉 스님 등의 일화 중에서 후학들이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얘기가 있다면 들려 주십시오.
석주스님 내가 수덕사에서 날 때, 효봉 스님을 함께 모시고 나는데, 효봉 스님이 그때 입승을 하셨어요. 아주 어렵게 수행했지요. 누가 5분만 늦어도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를 않았어요. 그 와중에도 효봉 스님은 일년에 한 번씩 용맹정진을 해요. 칼을 턱밑에 대고 하는 거예요. 요즘에 누가 그렇게 하겠어요. 아니 요즘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 있기야 있겠지
진관스님 만해 스님하고의 기억은 없으십니까?
석주스님 만해 스님하고는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땐데 「님의 침묵」하고「십현론주해」를 내셨을 때지. 유신론은 그 전에 냈고「님의 침묵」을 내셨을 때는 그 심부름을 내가 다 했지. 책을 싸 오면 다 나누어 주고 돈 걷어 들이는 것도 내가 다했지. 그때는 내가 철이 없어서 시봉을 잘 해드렸어야 하는데 잘못해드렸어. 그저 방에 불이나 때드리고 했지.
진관스님 석두 스님에 대한 기억은 없으십니까?
석주스님 선학원이 창립하는 데에 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런지 모르지마는 우리 스님이 인사동 임제종 포교당에서 계실 때, 그때는 전부 임제종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때 돈 삼천오백 원이면 큰 돈인데 그걸 기초로 삼아서 서울에 참선도량을 하나 만들자고 내놓고, 범어사에서는 오성월 스님이 사동 포교당을 내놓고, 석두 스님이 그때 계동 대방심 정승댁에 존경을 받고 있어서 그쪽에서 한 삼천 원 얻어오셔서 보태고, 도봉 스님은 원래 석왕사 스님인데 그때는 간동 법륜사의 포교사로 계셨거든. 그이가 한 삼천오백 원을 냈지. 그래가지고 선학원을 시작한거야.
도봉 스님은 선교에 아주 밝은 분이야. 견성도 했다고 하는 분인데 범어사 조실도 지내고 했는데도 역사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아주 영원히 선학원에 모시려고 하고 있지.
진관스님 스님께서는 현대적인 포교나 역경, 도제양성의 선구자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한글에 대한 애정이 크다고 듣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입장이 굳어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얘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석주스님 그건,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열다섯 살에 선학원에 왔는데 그때 「동광」이란 잡지가 있었어요. 말하자면 그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글을 많이 썼어요. 글도 쉽고 한글을 많이 썼어요. 그리고 그 때에는 한글학자들이 한글강좌도 열고 해서 쫓아가서 듣다보니까 한글이 정말 좋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내가 그래서 한문을 잘못해요. 그런 저런 이유로 나는 한글 주장을 많이 하지.
그렇게 「동광」이나 한글잡지들을 많이 보다보니까 그런 것 같고, 내가 열다섯에 선학원에 와서 그때부터 신문을 꼭 봤어요. 지금도 신문은 꼭 봐요. 선방에 들어갔다 도시로 나오면 신문부터 봐요.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나 항상 궁금해. 그러다보니 나라 사랑하는 마음도 저절로 생겼죠. 6·10만세 때도 내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무슨 일이 꼭 생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파고다 공원 앞에 나가 서있었더니 순종 황제 장례행렬이 지나는데 송학선이란 사람이 뛰어나가서 만세를 부르는데 일본순사들이 입을 틀어막고 때리고 하는데도 계속 만세를 부르고 그래. 신간회 때도 마찬가지야. 내가 날짜까지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큰 사건들은 다 알고 있어요.
진관스님 한글을 얘기하다 보면 자연히 역경의 문제가 얘기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석주스님 한글 번역은 내가 선학원에 있을 때, 운허 스님께서 번역을 하시고 내가 주간을 하면서 처음 유마경을 했고 승만경, 열반경, 법화경을 했고 화엄경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운허 스님께서 하셨지. 그런데 나중에 역경원이 생기면서 처음엔 강사로 가서 있다가 부원장을 오랫동안 했지. 그런데 나중에는 마음에 조금 안 맞는 것도 있고 해서 그만 두었어.
역경에서는 운허 스님의 공로가 제일 크지. 그 스님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또 역경을 하실 거야. 원력도 크시고 평생 소원이 고려장경을 잘되었든 못되었든 다 역경하는 것이었으니까. 요즘에 새로 월운 스님이 역경원장이 되어서 이제 고려장경이 다 번역될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이제 역경할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야.
진관스님 정화 당시에 스님께서는 선학원의 주지 스님으로 계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종단이 있기까지는 정화의 결실이란 얘기가 많이 오가는데 아직까지 정화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없는 현실은 우리 종단의 치부라 생각됩니다. 정화에 참여했던 원로스님으로서 정화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고 간단히 한국불교에 있어 정화가 가지는 의미를 짚어주십시오.
석주스님 그거야 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도 잘하고 율행도 지키려고 그렇게 정화를 한거죠. 그런데 정화할 당시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미치지 못해요. 선방에 용상방 들어온 걸 보면 그 당시와 변한 게 없어요. 그 당시도 300 명은 됐는데 지금도 그 정도밖에 안돼요. 그래서 요새 젊은 사람들이 정화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하는데 들리는 얘기를 판단해보면 확실히 정화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의 개혁도 정화가 아닙니까? 이 개혁을 잘해야 합니다. 개혁을 잘해서 수행도 잘하게 하고 포교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분규가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진관스님 작금의 불교 현실은 큰스님 말씀대로 제2의 정화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미묘하고 복잡한 사안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어느때보다도 종단을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원로, 중진, 젊은 스님을 불문하고 가장 드높게 한 목소리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큰스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석주스님 그거야 지금 개혁을 하자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계획을 듣지 못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수행하고 계율은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화든 개혁이든 그것은 꼭 필요해요.
이런 일이 종단에서 너무 자주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아주 종헌을 고치더라도 안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잘하면 3임이 아니라 열 번 나와도 좋지만 대중이 싫어하면 물러나야지요. 이번에 고치면은 태국처럼 한 일곱 명이 하는 집단지도체제가 되면 좋겠어요.
진관스님 오랜 시간 동안 귀한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건강하시어 후학이나 사부대중의 가슴에 올바른 신심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석주스님 아냐. 나야 이제 볼일 다 봤어. 그래서 아무데도 안 나갈려고 그럽니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김재현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