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45명 출가수행자의 붓다순례이야기
스스로 깨어난 자, 인간 붓다를 만나다
2015-12-10 김성동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승려연수교육으로 매년 시행하는 인도성지순례에 지안 스님을 지도법사로 비구 16명, 비구니 29명 총 45명의 출가수행자가 순례단으로 함께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홍콩을 경유, 인도 델리공항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 공항을 빠져나오자 공기가 다르다. 한국과 일본, 중국과 다른 인도의 냄새가 육근六根으로 감겨왔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문화와 언어로 불법을 공부한 붓다의 제자들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나고, 자라고, 출가하여 마침내 각자覺者가 된 나라에 온 것이다. 순례단은 잠시 한 호흡으로 숨을 고른다. 10일간 인도와 네팔을 오가며 45명의 한국의 납자들은 어떤 화두와 만날 수 있을까.
엘로라 석굴사원, 아잔타 불교석굴사원
첫날 순례단은 부처님 진신사리와 인도 고대 불교조각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델리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불교석굴사원의 꽃인 엘로라 석굴사원과 아잔타 석굴사원으로 향했다. 엘로라 석굴사원은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가 공존하는 인도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화강암 층으로 된 산 전체를 깎아 만든 총 34개의 석굴사원 중 불교석굴사원은 1굴에서 12굴까지로 약 7세기에서 8세기에 형성되었다. 인도불교사로 보면 이 시기는 후기 대승불교시기로 인도사회에서 불교의 기운이 조금씩 저물어갈 무렵이다. 어쩌면 엘로라 석굴사원에 힌두교와 자이나교가 함께 공존하게 된 것은 이런 불교의 쇠퇴기와 맞물리면서 형성된 역사적인 결과일 수 있다. 엘로라 석굴에서 불교도들이 자주 찾는 곳은 유일한 예배굴인 제10굴이다. 순례단도 제10굴에 참배하며 예불을 올렸다.
아잔타 불교석굴사원은 엘로라 석굴에서 북동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다. 29개의 석굴 전체가 불교석굴이기에 불교도들에게는 더욱 의미 있다. 석굴은 1천 년 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1819년 이곳을 지나던 영국군 병사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지어진 이 불교석굴은 벽면, 천장, 기둥 등에 인도불교의 다양한 특징들이 묘사되어 있다. 초기불교 시대와 대승불교 시대를 모두 담고 있는 것이다. 엘로라와 아잔타 석굴사원은 불교미술사 전공자에게는 중요한 곳이다. 그만큼 불교석굴 사원의 조각은 그 미적 요소가 다채로우며, 특히 석굴회화의 기법은 고대 인도회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 아쇼카 대왕의 참회, 산치 대탑
버스를 타고 인도르를 거쳐 산치로 이동했다. 8시간과 4시간에 걸친 이동이다. 인도에서 붓다순례는 대부분 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버스에서 내려다본 인도 중부와 북부는 가축과 사람이 얽히며 살아가는 인도 지역민들의 고단한 삶의 풍경이다. 산치에 도착했다. 산치 대탑은 아쇼카 대왕(재위 B.C 265~232) 때 건립됐다. 인도불교에서 아쇼카 대왕은 절대적 지위에 있다. 인도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대왕이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아쇼카 대왕이 깊이 회심回心한 것은 바로 스스로 일으킨 전쟁의 참혹함 때문이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불법 홍포로 참회의 길을 걷는다. 인도의 수많은 불적에 아쇼카 석주를 세워 기념했던 것이 그러했고, 여기 산치 대탑도 그랬다. 산치 대탑에서 45명의 대중이 합장하며 마주했다. 아쇼카 대왕이 참괴심을 내어 이루고자 했던 불국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앞서 보았던 아잔타 석굴사원의 불교조각미는 이곳 산치 대탑에 오면 힘을 잃는다. 산치 대탑의 조각은 인도 불교예술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특히 제1스투파의 4개의 문에 장식된 부처님 탄생설화부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 녹야원에서의 최초 설법 등 부처님의 삶과 사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 쉬라바스티, 마침내 기수급고독원에 오다
보팔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인도에서 가장 좋다는 특급열차는 우리나라 80년대 통일호를 타는 것처럼 덜컹거렸다. 그렇게 6시간 가까이 달려 아그라에 도착해 이슬람의 대표적 건축물 아그라성과 타지마할을 둘러보며, 순례단은 럭나우로 출발했다. 럭나우는 실질적인 순례의 첫 길이 될 쉬라바스티, 기원정사로 가는 중간 경유지인 셈이다. 그만큼 인도는 도시를 이어주는 길이 아주 멀다. 다시 5시간 동안 부처님께서 24회 안거를 지내셨고 최고의 대승경전인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로 이동했다.
조계종 소의경전, 한국인이 가장 많이 보고 읽는 경전, 『금강경』. 이 『금강경』 첫 장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을 여는 ‘사위국기수급고독원舍衛國祇樹給孤獨園’ 장면이 펼쳐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쉬라바스티. 바로 기원정사祇園精舍다. 부처님께서 24회의 안거기간을 보내면서 수많은 설법을 하고 승가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던 곳이다. 기원정사는 부처님 설법의 중심지였다. 실제 경전의 많은 내용은 이곳 기원정사에서 설해진다. 때문에 불교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일까. 세계 각국 불교도들이 인도순례에서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다. 우리 일행이 기원정사를 찾았을 때도 각국의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지금 부처님께서 현현해 우리들에게 설법하는 듯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참선과 명상에 잠긴다.
기원정사는 당대의 부호 수닷타 장자가 기증한 사찰이다. 부처님께서 죽림정사를 머물 때 수닷타 장자가 찾아왔다. 우리 지역에도 오시어 법문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머물 곳이 있는가, 하니, 수달타 장자가 부처님 머물 곳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한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께서 머물 곳을 찾다가 이곳 쉬라바스티를 발견하고, 땅 주인 기타祇陀 태자太子에게 땅을 팔라고 했다. 기타 태자는 땅을 팔 뜻이 없음을 에둘러 표현하였다. “그 땅에 전체를 황금으로 깔면 팔겠다.” 수닷타 장자는 실제 금을 깔기 시작했으며, 이에 놀란 기타 태자는 그 속사정을 듣고 흔쾌히 땅을 넘겼다. 순례단은 기원정사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수닷타 장자 스투파stūpa와 불교사에서 최고의 교화된 인물의 한 명인 앙굴리마라 스투파를 찾아 예를 올리고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로 향했다.
| 룸비니, 그리고 쿠시나가르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를 가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가야 한다. 네팔은 관광자원으로 경제가 유지되는 나라다. 때문에 석유 등 많은 물적 자원은 인도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유지된다. 인도-네팔 국경 지대는 물류를 가득 실은 트럭으로 길게 이어진다. 우리 순례단이 국경 지역을 넘어갈 때 네팔 지역 소요 사태로 트럭이 길게는 2개월 동안 국경 지대에 머물고 있었다. 트럭과 관광버스가 얽히면서 순례객들은 2시간 이상 발이 묶인다. 우리는 인도-네팔 국경 지역에서 끝없이 펼쳐진 트럭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햇볕이 뜨겁게 내려왔다.
국경을 통과해 6시간을 달려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에 도착했다. ‘동산’이라고 했지만, 평지에 가까웠다. 저 멀리 부처님의 모친인 마야 부인을 기념하는 마하데비 사원이 보인다. 그 옆에는 아쇼카 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 20년째 되는 해, 이곳에 와서 부처님 탄생지임을 알리며 세운 석주가 자리 잡고 있다. 석주에는 이곳 주민들에게 일반 조세를 면제하고 생산물 징수도 대폭 낮추는 등 혜택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아쇼카 대왕의 부처님을 향한 무한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가기 위해 순례단은 다시 네팔 국경에서 인도로 넘어간다. 5시간 동안 버스는 덜컹거리며 인도 시골길을 달린다. 그나마 이렇게 길이 넓어진 때는 10여 년 전이다. 인도 정부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불교유적지를 관광자원화하면서 순례객을 위해 도로와 불교유적지를 다듬어 놓은 것이다. 순례단 지도법사인 지안 스님은 “1988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도로와 불교유적지 주변이 관리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2천 6백여 년 전 부처님과 제자들은 이 멀고 험한 길을 수없이 걸어가며 법을 펼쳤다.
5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당이 보인다. 이곳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으로 안에 부처님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이 열반상은 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경전에 묘사된 것처럼 오른편을 아래로 하고 발 위에 발을 포갠 모습이다. 순례단은 준비해온 가사를 부처님 열반상에 모시고 삼귀의, 예불문, 반야심경을 올렸다. 열반당 안에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의 부처님 제자들이 왔음을 알리는 장엄한 염불 소리가 가득하다. 마치 아난 존자를 비롯한 부처님 제자들이 함께 예를 올리는 것처럼 시공간을 넘어 2천 6백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오기 전에 쿤다의 공양을 받고 지속적인 설사로 인해 탈진한 상태로 겨우 이곳 쿠시나가르에 도착했다고 한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사라수沙羅樹가 있는 숲에서 자리를 펴고, 45년 전법과 80세의 삶을 마치셨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다. 부처님에게도 늙음은 찾아온다. 죽음도 찾아온다. 늙음과 죽음을 벗어났다는 것은 늙음과 죽음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 부처님은 말씀한다. “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으로서 붓다를 이루었다. 我身生于人間 長于人間 于人間得佛”(『증일아함경』 권28).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 있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유명한 문구다. 오늘날 우리 불교의 종교적 위치가 어디인가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열반당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다비장은 열반하신 부처님을 화장한 장소로 이곳에서 부처님 사리가 8개로 나뉘어 각각의 나라에 분배되었다. 순례단을 실은 버스는 다시 3시간을 달려 부처님께서 처음 삭발하신 곳으로 알려진 케사리아 스투파를 순례한 후, 이어 제2차 경전결집지인 바이샬리로 이동했다.
| 대림정사터, 나란다 대학터
바이샬리에 도착했다. 제2차 경전결집한 곳이다. 부처님 입멸 후 100년 경 이곳에 거주하는 비구들이 계율에 대해 열 가지 새로운 주장을 하였고, 이것을 판정하기 위해 700여 명의 비구들이 바이샬리에 모여, 계율의 새로운 주장을 비법非法이라 판정했다. 1차 결집이 경經과 율律을 정리했다면, 2차 결집은 율을 중심으로 정리한 셈이다. 일찍 아침공양을 한 후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탑 유적을 순례하고, 싯다르타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여성으로 처음 출가하여 최초의 여성출가공동체가 형성된 곳, 대림정사터로 이동했다. 경전에 원숭이들이 부처님께 공양했다는 원숭이 연못과 아쇼카 대왕 석주石柱를 함께 만날 수 있다.
대림정사는 부처님께서 최초로 교단에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 곳으로 유명하다. 부왕 숫도다나 왕의 장례식을 마치고, 그 다음해 이곳을 찾은 부처님에게 마하파자파티와 석가족 부인들은 출가를 청한다. 세 번의 거절 이후에 마침내 제자 아난까지 이들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한다. 결국 아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부처님은 몇 가지 계율을 말씀하며, 교단에 처음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다.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이곳이 고향 같은 곳이다.
순례단은 대림정사터를 나와 인도 최초의 불교대학인 나란다 대학과 죽림정사, 영축산이 있는 라지기르로 향했다. 버스는 인도 농촌 풍경을 가로지르며 4시간을 달린다. 순례단을 실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인도 농민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인도의 빈부 격차는 세계 최고라고 순례단 가이드가 말한다. 인도의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지역에서 태어나 지역에서 자라고, 살아가며, 삶을 마감한다. 개, 닭, 소와 얽히며, 곧 무너질 것 같은 벽돌집과 초가집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희망이 보이는 것일까? 우리가 보는 그들의 비루한 생활 모습은 그들에게도 비루한 것일까?
나란다 대학이 보인다. 나란다 대학은 당시 세계 최대의 대학이었다. 5세기 경 건립되어 중국 순례승 현장 스님과 우리나라 스님들도 여러 명이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1만 명의 학생들과 1천 5백여 명의 교수들이 함께 머물고 불교뿐 아니라 철학, 수리, 어학 등 다양한 학문을 함께 공부했던 종합대학이기도 하다. 입학도 어려워 지원자의 70% 이상이 탈락했다고 한다. 1191년 이슬람 군에 의해 나란다 대학이 파괴될 때 6개월 간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수많은 승려들 중에 단 한 명도 살아남은 이가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파괴되었다. 지금 복원은 채 10%에 불과하며, 당시 승려가 머물던 개별 방 곳곳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중국 순례승 현장 스님이 635년 경에 수행했던 2평 정도의 방도 남아있다.
|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
부처님께서는 승가의 수행처는 시내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누구나 찾아와 법을 청할 수 있도록 하며, 수행하는 데 적합한 적절하게 조용한 곳, 죽림정사竹林精舍는 이런 곳이다. 불교 최초의 사원이다. 기록에 따르면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때, 칼란다가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이다. ‘죽림竹林’이라는 이름만으로 대나무 숲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몇 군데 대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 연못과 터만 남아있다. 경전의 곳곳에 죽림정사를 언급한 것으로 볼 때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머물고 오랜 기간 동안 법을 설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정사와 함께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다.
이곳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靈鷲山이다. 영축산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 아난 존자의 수행처라고 추측되는 작은 동굴이 나오며, 좀 더 오르면 수보리 존자의 수행터도 보인다. 이곳을 지나면 부처님께서 즐겨 주석하며 『법화경』을 설한 장소가 나온다. 지금은 작은 터만 남아있는데, 빼곡하게 앉아도 1백여 명이 채 둘러앉기 협소한 곳이다.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시는 모습을 그려본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다. 우리 한국불교 예불문에 보이는 “영산 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이란 표현의 ‘영산靈山’이 바로 이곳 영축산이다. 순례단은 이곳에서 장엄한 예불문을 올렸다.
영축산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인도 빈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순례단 가이드에 따르면 이곳에서 각국 순례인들을 대상으로 구걸하는 이들은 대부분 불가촉천민이라고 한다. 이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아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 구걸로 생활하거나 농사로 하루 한 끼를 겨우 먹고 사는 이들에게 불교는 무엇일까?
|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와 초전법륜 녹야원
마침내 깨달음의 땅, 보드가야에 도착했다. 티베트, 태국, 중국, 일본, 대만, 미국, 호주 등 세계의 모든 순례객들이 이곳으로 모인 듯했다. 새벽 5시 15분. 마하보디사원으로 들어서자 52미터의 피라미드형의 보드가야사원이 어둠 속에 솟아있다. 순례단은 벅찬 감동을 숨길 수가 없는 듯 모두들 “와-”하고 합장하며 감탄했다. 별과 달 속에 빛나는 마하보디사원은 깨달음의 사원이다. 바로 이곳에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는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방자, 붓다가 된다. 붓다는 누구인가?
29세에 왕자의 지위와, 부인과 아들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따라온 마부 차익과 말을 돌려보낸다. 외로운 길이다.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풀리지 않는 의문은 해결해야했다. 이 명민하고, 예민한 청년은 수많은 스승과 만나 지혜를 넓히고, 뱃가죽과 등가죽이 붙으며, 살갗의 털들이 바스라지도록, 극단의 고통과 죽음 밑까지 스스로를 내몰았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다시 깊이 명상에 들어가며 극단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음을 알았다.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은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무엇인가 먹어야했다. 수자타는 우유죽을 내밀었다. 뼈와 살이 말라붙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의 죽을 먹인 것이다.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의 하나이다. 비로소 35세의 청년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인다. 몸을 회복한 싯다르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 어둡고 고요하며 깊은 새벽, 그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 달리 할 일이 없다.”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붓다는 길을 떠난다.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와 함께 고행했던 다섯 비구를 만나기 위해서 보드가야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사르나트까지 걸어갔다. 불교사에서 전법의 첫 장을 연 초전법륜지 녹야원. 그 먼 길을 걸어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신과 마지막까지 함께 수행했던 이들이었기에 그들에게 가장 먼저 진리를 전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일까. 그곳에서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를 설한다. 연기緣起와 중도中道를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우리들에게 알려준 마지막 말씀, “자등명법등명 자귀의법귀의”의 실질적인 내용이다.
우리 순례단은 다른 곳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마하보디 사원에 머물며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를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평온하게, 평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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