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의 선담禪談] 수행의 목적은...

수행의 목적은 선정보다 자비심에 있다

2015-10-08     금강
 
 
 
 
 
달그림자가 천개의 강에 비추인다
고려시대 나옹화상의 시구에 “천강유수천강월天江流水天江月” 천개의 강에 천개의 달이 뜬다는 구절이 있다. 하늘에 달은 하나지만 천개의 흐르는 강물에 천개의 달이 뜬다는 말이다. 이와 뜻을 같이하는 노래가 있다. 바로 세종대왕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시의 형식으로 읊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달그림자가 천개의 강에 비추인다는 노래이다. ‘부처님이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창작해 그의 가르침을 만 백성들에게 쉽게 전하고자 한 세종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책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한기리에 사는 희명이라는 여인의 아들이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는데 분황사에 있는 천수관음의 벽화 앞에서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더니 아이의 눈이 밝아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천의 손, 천의 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
얼마나 클 것인가.
- 도천수관음가
 
관세음보살의 큰 자비의 마음을 밤하늘의 달이나 천 개의 손과 눈으로 표현한 것은 적절하고도 아름답다.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들은 직립을 하고 두 손을 사용할 수 있어서 식識이 발달하고, 많은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중생계는 차별이 있고, 고통이 있고, 한계가 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있다면 통찰의 지혜와 자유자재한 능력으로 무엇이든 살피고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 처처에 가득한 관세음보살의 손
오늘도 수행에 관심 있는 프랑스에서 온 남매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연변에서 온 조선족 처녀와 친구들, 남편을 잃은 지 일 년이 되어서도 죄인처럼 살고 있는 육십 중반의 여인이 절에서 삼사일씩 머물다 떠나며 고민들을 털어 놓았다. 그럴 때면 나의 손도 가끔 관세음보살의 손처럼 여러 개의 손이 되기도 한다. 처처의 필요한 곳에 맞춤한 쓰임새로 쓰이는 것이다.
 
절집에 함께 살고 있는 대중들의 손이 나의 손이 되기도 한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직원의 세심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나의 손이 되고, 객실의 방을 닦고 이불빨래를 하는 침모의 손이 나의 손이 된다. 나물을 다듬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공양주의 손이 나의 손이 되고, 깜빡이는 전등을 고치는 관리처사의 손이 나의 손이 된다. 
 
또한 삼사일씩 절에 머물러 고민을 해결하고 밝은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손이 세상 밖으로 내려가는 나의 손이 되고, 8일 동안의 참선수행을 하고 대장부의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나의 손이 된다. 물론 나 또한 다른 이의 손이기도 하다.
 
한 달에 한 번은 교도소에 다녀온다. 해남교도소는 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물이 현대식이다. 갈 때마다 교도소가 참 양지바르고 깨끗해서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법회 장소에서 수감된 이들을 만나면 그 생각은 간 데 없고 측은지심이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곳에 비해 환경이 좋아도 자유가 구속되어 답답함과 불만, 체념과 후회가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격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려서는 나의 아픔과 답답함을 어머니의 손이 다독거려 주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나를 다독거려주고 받아줄 따뜻한 손은 없다. 자신의 본래 성품에 잘 하고자 하는 마음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비심이다. 그 자비심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부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자비심을 일으켜 자신을 다독거리는 게 현명한 일이다. 
 
세상에도 자비심이 가득하다. 밝은 햇살이, 생명을 기르는 땅이, 맑은 바람이, 내리는 비가 다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덕德이고, 자비심이고,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마음으로 부른다면 세상의 자비심이 나를 도울 것이다. 
 
 
| 도道는 자비행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비로소 일체종지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 일체종지의 지혜는 자비를 바탕으로 생긴다. 일체종지의 뿌리는 오직 자비심이니 처음부터 이 수행을 익혀야한다. 보살은 많은 수행법을 익히지 않는다. 하나의 법을 잘 지니고 완벽하게 익힌다면 그는 부처님의 모든 법을 손에 넣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법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대자비이다.”
 
자비심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가지 수행법이 있다고 『수행차제론』에서는 밝히고 있다. 첫째는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는 평등심을 갖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중생이 괴로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애심을 갖고 ‘모든 중생은 내 친구다.’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수행은 집착과 분노를 버리고 아무런 감정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작하여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또 미워하는 적을 대상으로 점차 수행하는 것이다. 
 
자비심은 수행의 시작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수행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대비심을 일으킬 것을 서원하고 시작해야 그에 따르는 선근들이 돕는다. 수행을 통해 삼매三昧의 선정禪定을 성취하고, 그 선정의 마음이 대상을 만나 연기적 통찰의 지혜를 얻는다. 이 선정과 지혜가 담겨져 있는 실천이야말로 도道이고, 자비행이다.
 
한국의 전통적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간화선을 해야 한다. 간화선 수행의 목적은 사홍서원四弘誓願에 있다. 번뇌를 끊고, 진리를 배우고, 자비행을 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은 곧 보살행이다. 따라서 선수행의 목적은 선정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선정과 지혜와 보살행은 한 꾸러미로 연결되어 있으며, 남는 것은 머무름 없는 관세음보살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모두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금강 스님
미황사 주지. 조계종 교육아사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람 결사운동’, 무차선회를 진행하였고, 고우 스님을 모시고 한국문화연수원의 간화선 입문과 심화과정을 진행하였다. 홍천 무문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참선집중수행 ‘참사람의 향기’를 80회 넘게 진행하며 일반인들과 학인스님들의 참선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저서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이 있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