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단상] 실패와 성공에서 배워라

2015-09-03     문태준

여름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이 왔다. 여름은 실로 이 우주에서 엄청난 일을 한다. 여름은 화부火夫의 일을 한다. 여름으로 인하여 이 우주의 기관차는 궤도를 간다. 그러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당신은 지구가 가을에/ 무슨 명상을 하는지 아는가?”라고 쓴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였다. 시집 『질문의 책』을 통해서였다.

요즘은 파블로 네루다의 이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읽고 있다. 작품 ‘49’는 이렇다. “내가 바다를 한 번 더 볼 때/ 바다는 나를 본 것일까 아니면 보지 못했을까?// 파도는 왜 내가 그들에게 물은 질문과// 똑같은 걸 나에게 물을까?// 그들은 왜 그들은 그다지도 낭비적인/ 열정으로 바위를 때릴까?// 그들은 모래에게 하는 그들의 선언을/ 되풀이하는 데 지치지 않을까?”

나는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낭비적인 열정’이라는 시구와 ‘모래에게 하는 그들의 선언’이라는 시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실로 이 말은 나의 형편을 혹은 우리 모두의 형편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 혹은 우리는 삶에 대하여 매번 좌절하면서도 바위를 때리는 파도처럼 살고 있지 않은가. 나 혹은 우리는 그러면서도 곧 또 다시 모래알처럼 무너지고 흩어지고 말 맹세들을 마음속에 세우는 것 아닌가.

삶은 우리에게 기쁨과 낙망을 함께 안겨준다. 삶은 우리에게 마음이 잘 통하는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또 나쁜 동행자이기도 하다. 마치 파블로 네루다가 작품 ‘33’에서 “사막의 여행자에게/ 태양은 왜 그렇게 나쁜 동행인가?// 그리고 왜 태양은/ 병원 정원에서는 그렇게도 마음 맞는 친구일까?”라고 썼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멋있다. 곱씹어보아도 그렇다. 사막의 여행자에게 이글이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은 갈증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병원 정원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는 환자들에게 태양은 위로와 기쁨을 안겨준다. 어떤 때의 태양은 회피하고 싶지만, 어떤 때의 태양은 그지없이 반갑다.

삶도 그렇다. 어떤 때의 삶은 우리에게 실패라는 쓴 소태를 입에 넣어주지만, 어떤 때의 삶은 우리에게 성공이라는 달디 단 설탕을 입에 넣어준다. 물론 삶이 우리에게 쓴 소태만을 계속 넣어주진 않으며, 마찬가지로 달디 단 사탕만을 계속 넣어주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 때를 살기도 하고 성공의 때를 살기도 한다. 순탄한 때를 살기도 하고, 사태가 험할 때를 살기도 한다. 모래밭에서 무를 뽑을 때처럼 순탄한 때에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일을 궁리하고, 급류를 만난 것처럼 험할 때에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일을 궁리한다. 궁리하므로 우리는 실패에서도 성공에서도 배운다. 그래서 실패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내일의 성공을 위한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

백낙천(白樂天, 772~846)은 정치적 좌절로 좌천되면서도 그것을 또 다른 하나의 계기로 삼았다. “이 세상의 부귀는 나와 연분이 없으나,/ 사후 나의 문장은 분명 명성을 얻으리라./ 기세가 거칠고 말이 거창하다고 탓하지 마오./ 내 이제 막 시집 15권을 엮었노라.”라고 써서 정치적 좌절을 문학적인 성취로 스스로 보상 받았다. 그는 부귀를 잃었으나 문장을 얻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문장 가운데 돌과 나눈 문답이 있다. 돌이 스스로를 자랑하며 “나는 하늘이 낳은 것으로 땅 위에 있으니, 안전하기는 엎어놓은 동이와 같고 견고하기는 깊이 박힌 뿌리와 같아, 사물이나 사람 때문에 움직이는 법이 없으므로 그 천성을 보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즐겁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써서 답했다. “나는 안으로 실상實相을 온전히 하고 밖으로는 연경緣境을 끊었기에, 사물에게 부림을 받더라도 사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사람에게 밀침을 받더라도 사람에게 불만을 갖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박절한 형편이 닥친 뒤에야 움직이고, 부른 뒤에야 가며, 행할 만하면 행하고 그칠 만하면 그치니, 옳은 것도 옳지 않은 것도 없다. 자네는 빈 배를 보지 않았는가? 나는 그 빈 배와 같은데, 자네는 어찌 나를 책망하는가?”

참으로 멋진 응수이다. 돌은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는, 매우 경직된 요지부동搖之不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규보는 자신을 스스로 완전하게 갖추어서 잘 제어하는 일에 대해 말한다. 심지어 때에 잘 맞추는 시중時中에 대해 말한다. 어느 쪽이 더 안목과 아량이 좁은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역경을 만날 때에도 어느 쪽이 그것을 잘 넘어설지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불교방송 PD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