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성과 禪
2015-06-13 불광출판사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에 나타난 환상적인 작품을 보고 한스 아르프(1887-1966, 프랑스)는 크게 감동한다. 분명 자신의 작업실인데 ‘누가 저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지?’ 하며 작품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환상적인 작품은 그가 전날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 버리고 간 그의 그림이었다. 우연히 조합된 그 그림은 새로운 조형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감동적인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후 우연을 작품에 도입시킨 아르프는 새로운 조형성을 창조하며 작품들을 해 나아갔다.
| 조형성과 선禪의 관계성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인 구도, 형태, 색상 등을 합하여 조형성이라고 한다. 아르프가 발견한 조형성은 우연성에 의한 조합이었다. 그 전의 조형성은 조형적인 요소들이 일정한 법칙에 의해 화면에 구성되는 것이었다. 비례와 균형, 대칭과 비대칭, 색상 등 다양한 법칙들이 작품에 어떻게 배합되는가에 따라서 조형성이 결정된다.
‘조형성과 선禪의 관계성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 답을 찾아보자. 조형성은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아이디어)에서부터 고려해야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조형성을 통한 작품을 창조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나 대상, 기법 등이 비슷한데 어떠한 조형성을 추구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 세계의 작가들 중에 사과를 그리는 작가가 수백 명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작품도 똑같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과를 보는 관점(작가의 생각)이 다르고, 또한 사과를 화면에 배치하고 색칠하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대상은 동일하지만 조형성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각각의 특성을 보여준다.
동일한 대상을 보는 관점과 대상에 대한 이해나 감성, 판단이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수행자는 동일한 대상(자연)을 보지만 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느끼며, 그 내면의 깊이를 찾아가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내용이지만, 깃발이 바람에 흔들릴 때, 바람이 깃발을 흔들리게 하였는가? 아니면 깃발이 흔들리니 바람이 일어났는가? 아니면 마음이 움직였는가? 이처럼 동일한 대상을 보고 있으나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인식이다. 선사는 마음이 움직이니 대상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선사가 되기 전 그들의 인식에서는 여전히 깃발과 바람이 움직인다. 깃발이 움직인다고 보는 사람은 깃발이 중심이다. 만약 이러한 내용을 작품으로 조형화 한다면 그는 분명 깃발을 중심으로 표현하려고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 그가 인식하는 대상은 곧 그의 마음이 된다. 마음이 움직이니 대상에 분별이 생겨나고, 그 분별을 극대화하다보면 분별이 없어지고 마음만 남는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어떠한가?
현대미술이 철학화되어 간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다보니 대상은 사라지고 기호화, 상징화된 형상과 색채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의 코드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암호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그 암호를 해독할 것인가?
수행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많은 수행자들이 선을 체험하면서 또는 선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면서 느끼는 양상이 이와 비슷하다. 동일한 사과를 보면서 설명하고 있으나 각각 기호화되고 상징화되어 해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토로한다. 즉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암호화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체계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현대미술은 새로운 조형성을 통하여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자기 인식의 조형화
여기에서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형성과 선과의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리챠드 세라(Richard Serra, 1939-, 미국)는 대형 설치작품을 하는 미니멀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공간과 재료(주로 철을 사용)의 교감을 이루고자 노력한다. 커다란 크기에서 압도하며 대상과 인식에 대한 새로운 관계성을 제시한다. 세라가 만든 조형성은 크기와 비례, 직선과 곡선, 자연과 공간 등 다양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대상의 인식과 해체, 변형과 공유, 조화와 균형 등 미적인 요소를 통하여 기호화, 상징화한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밖에 설치되어 있어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철로 된 작품들이 비를 맞으며 산화해 부식되어간다. 아마도 몇 백 년이 지나면 그의 작품이 자연으로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라는 작품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그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다(무유정법 無有定法)는 인식을 자신의 조형어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변화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인지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때문에 이러한 변화를 인지하고 감지하기 위해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할 수 있다.
세라가 보여주는 작품은 마치 간화선의 화두와도 같다.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은 쉽게 오지 않는다. 대상은 단지 내 마음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대상에 매이면 대상을 떠나지 못한다. 대상에 대한 형상과 색을 여의었을 때 비로소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인식체계를 조형화하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한곳에서 전체를 볼 수가 없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작품에 가까이 갈수록 작품의 부분들만 보인다. 때문에 관람객이 보는 그의 작품은 하나의 벽면 같기도 하고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회화작품은 다른 느낌이다. 검정색 물감을 사용하여 절제되고, 간결한 느낌을 도출하기도 하고 질감을 줘서 입체적인 느낌과 역동성을 도출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은 조각 작품에서 철이 자연 속에서 산화하여 변화하는 이미지를 회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간결한 구도와 색채를 통하여 세라는 자신의 정신성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자신이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성찰을 자신만의 조형성을 통하여 보여주며, 새로운 인식의 깊이를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것은 새로운 기술보다는 새로운 인식에 있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쿤스트하우스 브레겐츠(Kunsthaus Bregenz)를 방문해 세라의 회화작품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스위스 바젤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관람하고 호수가 아름다운 브레겐츠를 방문했을 때 세라의 작품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유럽에서 회화작품을 대규모로 전시하는 경우가 처음이었다. 미니멀하면서도 상징성, 정신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세라가 추구하는 인식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었다. 새로운 조형성으로 표현된 작품들은 공간을 압도하며 조형언어를 통하여 무언의 말을 걸어왔다. 마치 숭고한 공간에 와있는 느낌은 나와 동행한 작가들도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작품이 주는 영향은 대단하다. 특히 시각예술 중에서 회화작품들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작품을 구성하는 형상과 색채(무채색 포함)는 보는 사람의 인식과 교류하게 된다. 즉,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등 모든 인식체계를 가동하여 작품을 풀어내려고 한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그리고 마침내 암호를 해독해 그 내용을 공유하게 되면 강한 감동을 받게 된다.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의 인식과 공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일한 작품을 감상하더라도 각 개인에 따라서 느끼는 감동에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거나, 해독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에 그러한 인식체계가 형성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감동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감동 받는 것은 선사가 화두를 던졌을 때 단박에 알아차리는 경우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화두에 관심이 없고 인식의 체계가 정립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화두가 전혀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언어의 인식에서 머무를 뿐이다. 화두는 언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언어의 기호와 상징에 머물지 않고 그 내면에 존재하는 마음의 깊이를 공감하는 것이다. 암호를 해독하고 그 의미를 공유할 때 선문답이 가능하듯이 작품도 공감하는 경우에만 그 정신적인 가치가 공유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라의 작품은 화두와 같다하겠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의 조형성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인식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과 인식을 공유하며 감동을 받는다.
따라서 작품은 작가와 관객을 연결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조형성이라는 기호화되고 상징화된 방법들에 작가의 독창성이 더해져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다. 작품은 모방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롭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순간 그 창의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시 새로운 창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 전혀 다른 표현을 하는 것과 같다. ‘왜일까?’ 하고 의문을 던져보니 ‘동일한 언어나, 표현을 하면 모방이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깨달은 바가 과거의 선사들과 다르지 않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각 독창적이다. 때문에 초보수행자는 혼동하기 쉽다. 언어가 다르니 그 내용이 다르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서양의 예술가들이 선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한다는 강한 압박감을 극복하고자 선방을 찾은 작가들은 새로운 것은 새로운 기술보다는 새로운 인식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보이는 대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인상파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무수히 많은 화가들이 다양한 실험과 노력을 통하여 많은 조형성을 창출했다. 따라서 그들이 해놓은 조형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성을 형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형상이나 구도, 색채의 유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예술의 특성 때문에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
| 비행기 안에서는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현대미술은 표현(대상이 있음)에서 대상이 없는 인식을 표현하는 과정에 와 있다. 마치 철학자들이 인식논쟁을 하듯이 작가들도 보이지 않는 인식의 범주를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고 있다. 개별적인 인식이 조형성을 통하여 표현이 될 때 공유되며 그 정신적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선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제자는 그 뜻을 알아듣는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예술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언어, 말, 행동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면서 상대의 인식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즉, 상대에 대한 관념적 사고이다. 우리는 흔히 상대가 갑자기 머리스타일이나, 의상 등에서 변화를 주면 상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하며 이야기한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어떠한 심리적인 충격이나 자극을 받았을 때 자신의 외모에 변화를 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커다란 충격이 와도 외부적으로 전혀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외형적인 변화나 일상적인 행동을 보고 상대가 어떠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생각의 변화는 느리다. 즉, 나의 인식이 상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과거의 생각으로 ‘상대는 언제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노력이며 작품을 통하여 새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동일한 작가가 제작한 작품이라도 동일한 작품은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설령 가능하다할지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술품이 가지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술의 발달로 동 시간에 전 세계가 소통하는 시대이다. 빠른 속도로 진행이 되는 변화에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며 어떠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담아내고자 하지만 한편에서는 변화하지 않는, 아니면 천천히 변화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찾고자 노력한다.
100년 전에 제작된 작품을 보면서 지금도 감동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무수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며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았지만 작품에 존재하는 예술성, 정신성, 조형성 등은 지금도 유효하다.
禪의 정신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무수히 많은 선사(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들이 과거에 진리에 대하여 밝혀주신 내용들은 지금에도 유효하며 커다란 삶의 지표가 된다.
예술과 선의 공통점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본질적인 사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시대적인 표현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모두가 가리키는 것은 인식의 전환이다. 세상이 변화한다고 하며 자신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시속 800km 이상을 날아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어도 비행기 안에서는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다. 속도를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그 정점에서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조형성을 통한 정신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순간에도 적적성성寂寂惺惺한 경지를 찾는 것이다.
윤양호
독일의 국립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마이스터쉴러 학위를 받았다. 2005년부터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선조형예술학과를 개설하여 국제적인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대미학의 새로운 관점을 선사상을 바탕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현대미술에 영향을 끼친 선사상」, 「선사상에 나타난 조형성 연구」, 「조형예술에서 본 불교의 미학적 특성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작품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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