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은 어디고 지옥은 어디인가?
공空(3)
2015-06-13 불광출판사
도인 한 분이 외딴 산속에 혼자 살고 있었다. 도인은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고 늘 말했다. 실직한 거사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산속 그곳에는 차도가 없어 걸어서 가야 했다. 절 입구에 당도하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마침 입구 바로 옆 대나무 숲에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세파에 시달린 그의 마음까지 씻어 내렸다. 밤이 되니 낙락장송 사이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솟아오르고 맑은 시냇물 소리가 귓가를 즐겁게 했다. 거사는 함께 살기를 간청했고, 도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 열반이 윤회이고 윤회가 열반이다(대승불교)
그곳 하루 일과는 이랬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예불하고, 좌선. 하루 세 끼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 먹고, 설거지는 물론 밭에서 야채도 길러야 했다. 마당과 밭에는 웬 잡초가 그리도 많이 나는지. 땡볕에서도 일을 해야 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시간에 맞춰 예불하고 좌선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TV와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으며 말동무할 친구도 없었다.
한 달 두 달 살아가는 사이, 똑같이 생활하는 도인은 늘 유쾌하게 사는데 거사에게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산사의 그윽한 정취는 어디에도 없고, 뼛속을 저미는 하루 일과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거사는 석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산속을 떠났다. 도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극락이었지만 거사에게는 견디기 힘든 지옥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생활을 했다. 동일한 곳이 도인에게는 극락인데 거사에게는 지옥이다. 그곳이 진짜 극락이라서 극락으로 느껴질까? 또 진짜 지옥이라서 지옥으로 느껴질까?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떤 곳인가? 극락이라고도 지옥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극락’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이름일 뿐, 그 명칭에 맞는 ‘진짜 극락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극락이고 언제 어디서나 극락이라야 ‘진짜 극락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성’, ‘아我’, ‘실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극락’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 명칭에 부합하는 자성이 없다. 따라서 극락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하다. 지옥도 마찬가지로 공하다. 극락은 어디고 지옥은 어디인가? 당신은 지금 극락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라고 한들 그곳 자체가 극락이거나 지옥은 아니다.
산속의 그곳을 도인과 거사는 각각 극락이라고 하고 지옥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곳이었으니 “극락이 곧 지옥이요, 지옥이 곧 극락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극락과 지옥 둘 다 공하므로 “극락이 곧 지옥이요, 지옥이 곧 극락이다.” 이처럼 둘은 서로 별개가 아니므로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위의 내용에서 극락과 지옥이 들어간 자리에 열반과 윤회를 대입해도 결론은 똑같다. 열반도 공하고, 윤회도 공하다. 열반이 곧 윤회요, 윤회가 곧 열반이다. 둘은 둘이 아니라서 ‘불이’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대성한 용수 보살은 “열반은 윤회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용수 보살은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한다. 나의 일상생활을 내가 아무리 열반이라고 하거나 윤회라고 해도 그것의 진실한 모습은 그와 무관하다. 열반도 윤회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열반이나 윤회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고 집착이며, 이 때문에 괴로움은 시작된다. 반대로 그것은 열반도 윤회도 아니라고 바르게 알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이라고 용수 보살은 말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 다시는 붙지 않는 열반과 괴로움 덩어리로 보이는 윤회는 결국 하나의 동전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용수 보살이 “당신의 삶을 행복하다 할 건가, 불행하다 할 건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무미건조하다는 말인가? ‘무미건조하다는 것’도 공하다. 따라서 무미건조한 것도 아니다.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 이것이라 해도 틀리고 저것이라 해도 틀린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 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 열반은 열반이고 윤회는 윤회다(부파불교)
부파불교, 즉 소승불교의 대표 격인 유부有部는 열반과 윤회에 대해 위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다. 유부는 나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비물질적 존재가 ‘75법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법’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요소’를 말한다. 물이 수소와 산소로 구성되어 있듯이, 모든 것은 이 75가지 법 중의 어느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75법을 성질상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색법・심법・심소유법・무위법 등의 다섯 범주로 분류하고, 이것을 ‘5위位’라 하여 아래와 같이 ‘5위 75법’이라는 체계를 세웠다. 괄호 안의 숫자는 각 범주에 속하는 법의 가지 수를 표시한다.
색법色法은 물질적 존재를 말한다. 심법心法은 마음을, 심소유법心所有法은 마음의 작용 즉 심리 작용을,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은 물질도 마음도 아닌 특수한 힘을 가리킨다. 무위법無爲法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 그래서 변화와 소멸이 없는 것을 뜻하며 유위법有爲法의 반대이다.
이렇게 5위로 분류된 75종의 법들은 자신만의 특성과 작용을 가지면서 영원히 존재한다. 75법 하나하나는 바로 ‘공’에 의해 부정되어야 할 ‘자성’, ‘실체’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각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열반도 75법 가운데 하나이며 무위법에 속한다. 따라서 무위법인 열반은 끊임없이 변하는 윤회와 같을 수가 없다. “열반은 열반이고 윤회는 윤회다. 양자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크나큰 간격이 있다.”는 것이 유부의 생각이다. 열반과 윤회에 대해 당신이 유부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공의 사고방식은 아니다. 실체에 근거한 사고이다.
유부가 말하는 열반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유부의 이론 체계는 머리카락을 헤아리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핵심만 압축시켜 말해 보자. 유부가 5위 75법이라는 체계를 세운 목적은 이 세계가 이들 법들의 이합집산에 의해 생겨나는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연기의 세계임을 여실히 보여, 그 반대로 보는 어리석음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75법이라는 실체를 정립하고 만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실수였다. 연기의 세계를 보이기 위해 연기와 양립할 수 없는 실체를 인정함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불교용어의 개념을 정교하게 정립한 것은 실로 유부의 크나큰 공적이고 이후의 불교 전개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정립된 개념으로 5위 75법이라는 체계를 세우고 그것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한 것에 대해 후대 불교는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 번뇌는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인가?
유부에서 ‘연기’란 실체인 72법 사이의 인과관계, 바로 그것이었다. 75법이 아니고 72법인 이유는 무위법에 속하는 3가지 법에는 인과성・시간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부에 의하면, 인과관계는 법과 법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나에게 번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유부의 이론에 따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5위 가운데 심소유법은 심리 작용에 해당하는 46종의 법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46종 가운데 다수의 심리 작용이 번뇌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탐・진・치(무명)도 이 중의 일부이다. ‘탐’ 즉 ‘탐욕’은 75법 중의 하나이므로 언제나 존재한다. 나에게 탐욕이 일어났다는 것은 쉽게 말해 내 마음에 ‘탐욕’이라는 법이 결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란 찰나생멸하면서 이어져 가는 오온의 상속이다. 10분 후에 탐욕이 멈추었다는 것은 그때 내 마음에서 탐욕이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탐욕은 내 마음과 결합해야지만 실제의 탐욕 작용을 일으키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기는 해도 작용을 일으킬 수 없다.
유부는 탐욕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상태를 ‘현재’라고 규정한다. 작용을 일으키기 전의 상태를 ‘미래’, 일으키고 난 후의 상태를 ‘과거’라고 한다. 탐욕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현재의 한 찰나뿐이고, 다음 찰나에는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져 그 작용이 멈춘다. 다시 말해 미래의 영역에 있는 탐욕이라는 법이 현재에 나타나 단 한 찰나만 작용하고는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진다. 현재에 나타나는 것을 ‘생한다’고 하고,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것을 ‘멸한다’고 한다. 10분간 탐욕 작용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위와 같은 과정이 10분간 지속되었다는 뜻이다.
탐욕의 작용은 한 찰나이지만, 탐욕 자체는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 채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언제나 존재한다. 유위법에 속하는 여타의 법들도 마찬가지여서 현재에서는 순간순간 생멸하지만 삼세를 통하여 실재하며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것을 ‘삼세실유三世實有 법체항유法體恒有’라고 한다.
그런데 유부에 의하면 법은 그 자체 단독으로는 현재에 생하여 작용할 수 없다. 72법 중의 다수의 다른 법을 원인(因)으로 하여 그 결과(果)로서만 현재에 나타나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체인 법과 법 사이의 인과관계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그것이 연기의 세계라고 유부는 이해했다. 72법 사이의 이러한 다양한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이 ‘6인六因・4연四緣・5과五果’이다. 현재 나타난 법을 과果라 하고 그 원인이 된 법을 인因이나 연緣이라 하여 그들 사이의 연관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탐욕이 현재에 생해 실제의 작용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중의 일부만 언급하기로 한다. 어떤 것을 보고 탐욕이 일어났다고 하자. 우선 탐욕의 대상인 그 어떤 것은 75법 가운데의 어느 법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그것을 보는 눈, 즉 안근이 필요하다. 안근은 색법에 속하는 법 중의 하나이다. 탐욕의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마음은 심법에 속하는 법이다. 이상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미래의 탐욕 + 탐욕 대상의 법 → 현재의 탐욕
+ 안근 + 마음
⇓ ⇓ ⇓
인因 과果
실체 실체 실체
(작용이 없다) (작용이 있다) (작용이 있다)
도표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위에서 인因에 속하는 여러 법이 현재 나타나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여러 법을 원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부는 번뇌를 마치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는 도둑과 같이 생각했다. 내 마음과 번뇌가 결합했다는 것은 도둑이 침범한 것이요, 양자가 분리되었다는 것은 도둑을 쫓아낸 것과 같다. 도둑이 침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둑은 어디선가 늘 도사리고 있다. 도둑인 번뇌는 항상 존재하는 실체이다.
반면에 공사상에 의하면, 번뇌는 공하여 실체가 아니다. 눈병 환자의 눈에는 있지도 않은 헛것이 보이듯이, 어리석음 때문에 번뇌가 아닌 것을 번뇌로 보고 괴로워 한다는 것이다.
| 유부는 열반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유부가 생각하는 열반은 비유해서 말하면 이렇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번뇌는 늘 있다. 이 번뇌가 나와 결합하면 나는 번뇌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번뇌 자체는 실체이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다. 따라서 번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와 번뇌가 결합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 번뇌가 우글거리는 이 세상은 윤회의 세계이다. 번뇌가 나와 결합하지 않는 것이 열반이다.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출가하여 오랜 기간 동안의 전문적인 수행을 통해 지혜를 증득해야 한다. 이 지혜의 힘에 의해서만 번뇌는 나와 결합하지 않는다. 당신이 번뇌와 열반에 대해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부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번뇌는 나와 결합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어딘가에 있다. 여차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 결합할지 모른다. 지혜의 힘으로 번뇌라는 도둑을 쫓아내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담을 쌓았지만 도둑의 침범 가능성은 언제나 있고 그래서 불안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유부가 말하는 완전한 열반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무상한 이 세상을 괴로움으로 보고 역겹도록 싫어하여 완전히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육신조차 없어져 이 세상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般이 유부의 이상이었고, 그것은 대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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