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를 시작하다
2015-03-31 불광출판사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된 게 언제였더라. 떠올려보면 그 기억의 시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외증조할머니에서 외할머니를 거쳐 엄마에서 나로 이어지는 이른바 모태 불자이기 때문이다. 절기와 명절 그리고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외가의 문화는 불교에 기반을 둔 것이 확실했다. 어린 시절 탁발을 오신 스님께 어머니와 할머니가 쌀을 시주하며 합장을 하던 모습도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신심이 깊기로는 외할머니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외할머니에게는 부처님은 물론 장독대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은 정화수 한 그릇과 방생을 위해 구입한 미꾸라지도 신앙의 대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절에 가기 전, 우리에게 꼭 이렇게 물어보시곤 했다.
“부처님께 빌고 싶은 소원 있으면 딱 한 가지만 말해봐. 할머니가 가서 꼭 이루어지라고 기도해줄게.”
우리 사남매가 소원 한 가지씩을 차례로 말해주면 외할머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 그 얼굴이 얼마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는지 나는 시험 점수가 잘 안 나오거나 학급임원 선거에서 떨어지면 외할머니가 기도를 열심히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대학교 때의 일이다. 그때는 기도의 힘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곧바로 문제에 봉착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IMF의 광풍으로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구직사이트를 뒤지며 수십, 수백 통의 이력서를 기계적으로 보낸 끝에 간신히 회사에 들어갔다.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은 이내 그럼 그렇지 하는 잘난 척으로 바뀌었다. 그 후 경력을 쌓자마자 곧바로 더 멋지고 화려해 보이는 곳으로 이직을 했다.
하지만 야근 때문에 뒤집어진 피부에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박봉을 쪼개 명품 가방을 들며 위안을 삼고 거래처나 친구들 앞에서 허세를 부려야하는 생활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돌파구를 찾고 싶었지만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이런 내 마음을 부처님께 전달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절에 다니고 있긴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시고, 남동생이 있고, 큰 언니와 작은 언니까지 있는데 과연 어머니가 셋째 딸인 나의 기도를, 나의 간절한 마음만큼 부처님께 하고 있는 것인가?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깊어졌다. 절에 다녀오는 어머니를 붙들고 내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냐며 닦달하기도 했다. 결국 어머니가 제대로 기도를 하는 것인지 확인하려면 내가 직접 부처님을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이 의심이 나를 부처님께 이끌었다. 별반 의미 없는 모태신앙으로서 불교가 아닌 내 스스로 불자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였다.
내 발로 절에 가서 부처님을 처음 뵙던 날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씩씩대던 여자와 차분하게 앉아 미소 짓던 남자, 이것이 나와 부처님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부처님께 그 동안 쌓인 온갖 하소연을 제대로 퍼붓고 앞으로 바라는 일들을 잔뜩 조르려고 작정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법당에 들어선 순간 바보가 된 것처럼 멀뚱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절을 하는지 몰라 곁눈질을 하며 정신없이 삼배를 올린 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뛰쳐나왔다. 그 많던 말들을 마음속에서조차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나의 기도를 누군가 대신 해줘야 한다는 생각, 내 기도를 대신 해주는 사람이 불성실하여 내가 지금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창피했다. 부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한참을 충격에 빠져있던 나는 부처님에 대하여 비로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시작이 아니던가.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난 지금 부처님과 열애 중이다.
조민기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던 중 칼럼 ‘광고쟁이의 상상력으로 고전읽기’ 시리즈가 큰 호응을 얻으며 본격적인 글쟁이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해 발간한 『조선임금잔혹사』로 조선의 임금들에 얽힌 뒷이야기들을 풀어내 출판계의 불황을 뚫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현재 조계사보 「가피」에 ‘부처님의 여자들’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 『조선임금잔혹사』와 『외조 - 성공한 여자를 만든 남자의 비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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