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없어 보이는 산

 

| 두 뼘의 이정표

우주의 중심인 크기를 알 수 없고 넓이를 알 수 없는 산에서 나를 인도하는 것은 작은 발자국이다.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눈에 덮여 길은 사라졌다. 앞서 간 사람들의 두 뼘 남짓한 발자국이 이정표다. 나의 시선은 온통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발자국들을 따라가야 오늘 밤 머물 곳을 찾을 수 있고 비로소 눈을 들어 산을 찾을 수 있다. 이 숭엄하고 지고한 산에 들어와 부동不動의 마음자리를 조금이나마 감득感得하려 했는데 마음은 눈가루처럼 흩날리어 좀처럼 모아지지 않는다. 야크 떼들은 여유롭게 내려갔는지 더 이상 방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산을 간찰看察할 여유는 사라졌고 조급한 마음이 시야를 더 흐리게 한다. 두 뼘의 공간-발자국에 다시 시선을 모아 걸음을 옮긴다.

참 미욱한 순례자다. 산에서 산을 잃고 길에서 길을 헤맨다. 사람의 몸, 약하고 마음, 허술하다.

멀리 겹겹이 타르쵸로 치장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오색의 깃발이 백색의 설원에 대비되어 더욱 화려하게 돋보인다. 눈은 그쳤지만 강 린포체는 아직 구름에 쌓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밀라레빠의 노랫말처럼 온 세상 설산의 제왕이고 지순하고 흠 없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강 린포체는 구름과 안개 속에 잠겨있어 그 위용을 오늘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리를 건너니 오늘의 목적지인 시멘트 벽돌로 지은, 규모는 작지 않은 이층짜리 숙소가 보인다. 마음이 놓인다. 야크처럼 고개를 떨구고 묵묵히 발자국만 보고 걸었던 눈이 비로소 주위 풍경을 간별看別한다. 먼저 출발한 짐을 실은 야크와 말들이 마당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개울건너 디라푹 곰빠가 숙소와 마주보고 있다. 이제 눈은 거의 무릎 높이까지 쌓여있다. 겨우 숙소에 닿아 짐을 풀고 차를 마시니 몸과 마음이 개운해진다. 강 린포체는 아직 안개와 구름에 가려져 있다.

이번 순례의 안내자인 조선족 가이드 둘이 저녁을 준비한다. 티베트에서 가이드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족이다. 이미 티베트는 서장 자치구로 편입되어 모든 행정, 교육체계가 중국화 되었기 때문에 티베트어를 몰라도 티베트에서 살아가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이 조선족 가이드들도 티베트어를 전혀 모른다. 십년을 살았다는데 티베트어를 모르니 아는 게 별로 없고 한국어로 된 티베트에 관한 책자를 몇 권 읽은 것이 티베트에 관한 상식의 전부다.

“제대로 안내를 하려면 티베트어를 공부해서 역사, 종교, 문화, 지리 등 티베트 전반에 관한 안내도 좀 하셔”

이런 충고 아닌 권고를 했지만 불편함이 없으니 흘려들을 게 분명하다. 티베트는 그들에게 뿌리내리고 살 땅이 아니고 돈벌이를 위해서 잠시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에 사는 사람들도 딱히 모국이라고 부를 나라가 없지 않은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 땅,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반쪽의 모국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땅이 더 신뢰감이 가는 모국이 아닐까?

중국에 강제 합병당한 티베트인들의 조국에 대한 상실감과 남과 북의 분단에 따른 소속감의 붕괴로 인한 조선족들의 조국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요원해 보이는 티베트 독립과 남북의 하나 됨, 그에 따른 어떤 무력감, 이런 저런 망념들이 저녁 준비를 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 스쳐간다.

 

| 잠을 깨고 밤을 깨다

저녁을 마치고 난롯가에 앉아 순례 길에 동참한 일행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고 가이드와 내일 일정을 점검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쌓여있는데 코라를 계속할 수 있을까’ 가이드도 확신을 못한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실은 야크와 말 주인들의 의견을 들어봐서 그들이 갈 수 없다면 이번 바깥코라는 여기서 접어야 한다고 한다. 게다가 오늘 현지 티베트인 두 명이 무리하게 코라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야크가 길을 따라 내려올 때 느꼈던 예감이 현실이 될 듯하다.

잠자리에 들어도 이런 저런 생각과 해발 5,000m에 가까운 고도라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비몽사몽, 선잠에서 깨어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왔는데, 오오!!!

화염에 휩싸인 듯한 강 린포체가 성스런 자태를 온통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눈을 부비고 다시 쳐다보니 강 린포체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늘어선 은하수의 별무리들과 어울려 붉은 빛 덩어리로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산위에서 별이 꽃처럼 피어나듯 수많은 별들에 에워싸여 붉게 빛나고 있는 강 린포체. 보석 같은 흰 산이 아니라 보석같이 빛나는 붉은 산이 거기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것이 청정한 티베트 하늘의 일반적인 자연현상인지 아니면 기상이변으로 인한 특수한 상황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나의 당시 메모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왜 감동이나 감탄사가 부족한 걸까’ 분명한 것은 일찍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광경이었다는 것이다. 한참을 서 있다 추위 때문에 방에 들어와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게 뭐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밝는 대로 서둘러 밖으로 나가 다시 서북 벽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강 린포체는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고 얼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 백운과 백설의 차이

아침을 먹고 코라를 계속할 것인가, 예서 돌아갈 것인가 마부들하고 상의를 했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아쉽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항상 변수가 작동되는 곳 히말라야,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변수는 항상 또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정상적인 일정이라면 잠깐 들렀거나 그냥 지나쳤을 디라푹 곰빠를 천천히 돌아보기로 했다.

사실 강 린포체 코라는 디라푹 사원을 창건한 괴창빠 스님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밀라레빠의 십만송에 의하면 밀라레빠는 티베트의 토속신앙인 뵌교의 사제 나로뵌충을 굴복시키고 제자들과 함께 강 린포체를 한 바퀴 돈 다음 꾸탕에 있는 ‘불멸성의 동굴’로 돌아갔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도 코라의 길이 열려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형식의 오른쪽으로 강 린포체를 한 바퀴 도는 형태의 코라는 괴창빠 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유추해보면 이 땅은 원래 뵌교의 성지였다. 밀라레빠와의 신통력 대결에서 패한 후 비록 물러나기는 했어도 티베트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뵌교이기 때문에 그들이 거주하는 동안 강 린포체를 도는 길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는 방향이 반대이기는 하지만….

디라푹 사원은 개울 건너 숙소 반대방향 산 중턱에 있다. 눈에 덮여 길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작정 디라푹을 향해 걷는다. 개울이 길을 막는다. 멀리 다리가 보인다. 그래도 그 길밖에 없다. 우회해서 다리를 지나 디라푹을 향한다. 순박한 미소를 지닌 티베트 여성이 내려오며 인사를 한다. 마음이 환해진다. 합장으로 답한다. 돌아다보니 아직 강 린포체는 백운白雲산이다. 언제쯤 백설白雪의 본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백운과 백설의 차이가 있는가. 구름이 눈이 되고 눈이 구름이 되고 강이 되고 내 몸에 흐르는 물이 되고…. 보여주지 않아도 내안에 흐르고 쌓여 있음을…. 내 속에 수미산, 저 수미산이 보이지 않아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볼 수 없어도 볼 수 있어도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희고 붉은 산.

 

 

만우 스님
계룡산 갑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에서 잠시 수학하고 월간 「해인」 편집위원과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황사 부도암 한주로 머물며 히말라야를 여행하고 돌아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익은 삶에 대한 특별한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