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저 편의 아름다운 세상

광덕과 엄장의 열반 이야기

2014-12-30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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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까지 가시거든 부처님 앞에 아뢰어 주시게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흥미로운 스타일이 동반자형이다. 동반자형 이야기는 설화에서 2인 주인공이 출연하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같은 유형인데, 그들의 동반자 관계는 때로 우호적이기도 하고 때로 적대적이기도 하다. 우호와 적대의 관계 속에서 작품 전체로는 제3의 캐릭터를 창출한다. 그래서 동반자형 이야기는 1인 주인공에 비해 보다 폭 넓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삼국유사』에 바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광덕과 엄장’이다. 이 이야기는 향가인 「원왕생가願往生歌」와 더불어 많이 알려져 있다. 

신라 문무왕 때, 분황사를 가운데 두고 남쪽과 서쪽 마을에 살던 두 친구 광덕과 엄장이, 어떻게 성불하여 정토에 왕생하였는지 소개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동반자형 이야기의 특징인 우호와 적대가 있고, 우호와 적대를 극복하는 제3의 지점이 있다. 

제3의 지점, 그것은 바로 두 주인공이 이뤄낸 아름다운 열반의 세계이다.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부지런히 서방정토를 염원하되, 먼저 이루는 사람이 알리고 가자 약속하였다. 약속은 아내를 두고 살았던 광덕이 먼저 이루었다. 햇빛이 붉게 지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드리운 저녁참인데, 광덕은 엄장에게 자신이 먼저 가노라 알리는 것이었다. 구름 밖으로 하늘의 음악소리가 울리고, 밝은 빛이 땅에 깔리었다고, 일연은 그 신비스러운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아름다운 향가 「원왕생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달아 이제
서방까지 가시거든
무량수 부처님 앞에
일러 주게 아뢰어 주시게
다짐 깊으신 세존 우러러
두 손 모두어 비옵나니
“원왕생, 왕생을 바랍니다.”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 아뢰어 주시게
아, 이 몸 버려두시고
마흔여덟 가지 큰 소원 이루실까

광덕은 밤마다 단정히 앉아 한결같은 소리로 무량수 부처님을 불렀다.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광덕은 그 빛을 받으며 가부좌 틀고 오래도록 앉아 있곤 했다. 아내는 분황사의 계집종 출신. 그러나 아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소원이 그만큼 깊었던 까닭이다. 그런 광덕을 부인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 엄장에 대한 꾸짖음, 그리고 엄장의 참회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광덕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정말 사건은 그 다음부터 일어난다. 광덕이 죽은 다음 부인을 데려 온 엄장은 밤이 되자 몸을 섞으려 했다. 이제 엄장의 부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부인이 꾸짖는 것이었다. 
 “스님이 서방정토를 찾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거라 하겠군요.”

엄장은 놀라고 괴상스러워 물었다.

“광덕은 이미 그대와 지냈소. 그런데 나는 왜 안 된단 것이오?”

“남편이 나와 함께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저녁이면 같은 침상에 눕지 않았지요. 하물며 몸을 섞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몸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부르며 염불했지요. 때로 16관觀을 짓고, 관이 다 되어 밝은 달빛이 집안에 비쳐올 때, 그 빛을 타고 가부좌한 채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고자 아니 해도 어디를 가겠습니까? 천 리를 가는 사람은 첫 걸음부터 알아보는 것이지요. 이제 스님을 보니 동쪽이라면 그렇다 하되 서쪽은 알 수 없겠습니다.” 

진정한 수행을 하지 못하는 엄장에 대한 꾸짖음, 그리고 엄장의 참회. 

사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장이다. 그리고 그는 엄벙덤벙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인물일 것이다. 광덕은 치밀하고 정성스레 예불하여 목적한 바를 이룬 점에서 의상을 닮았다면, 엄장은 실수투성이의 원효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래서 더 우리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엄장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실수와 무지 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助力者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다. 
 


|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서방정토 가는 길

한 연구자는 이 이야기를 ‘비속한 것과 숭고한 것의 관계를 이중으로 나타내고 있음’으로 풀이하였다. 광덕의 수행은 비속한 데서 숭고한 데로 나가는 것인데, 광덕이나 아내는 현실에서 비속하고 미천한 생활을 지속하였다. 지향점은 득도와 해탈이라는 숭고한 위치에 가 있다. 이는 현실의 비속이 비속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가 숭고로 이행해 가는 과정이라 해석하게 만든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가치의 울림을 중요시 여긴다. 흥미 위주에 치우치지 않는 이야기 속의 숨은 주제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교훈이다. 이것을 숭고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전개가 숭고의 진중함에만 빠지지 않고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덕은 시종 숭고함을 지키는 사람인데, 그 대척점에 놓이는 엄장은 다르다. 광덕이 죽자 그 아내를 취해 함께 살고 육체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야기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아 독자에게 재미를 주는 대목이다. 이런 재미는 단순한 재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선악善惡과 성속聖俗이 어울려지는 인간 형상의 입체적인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엄장은 비속함 그 자체이다. 그것은 세속의 평범한 인간의 전형이다. 엄장을 보며 우리는 동질적인 우리 내면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엄장 같은 인물을 과감하게 배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한편에 광덕이 있기 때문이다. 광덕을 배후로 엄장의 인간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동반자형 이야기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두 사람을 동반자 관계로 설정하고 거기에 부여하는 대조적인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의 다면적 성격 창조에 이르는 것이다. 서사와 재미가 함께 가는 유효한 방법이다.

물론 이야기의 종착점은 엄장이 이룩하는 숭고함이다. 

“엄장은 부끄러워 낯을 붉히며 물러나 바로 원효 법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간절히 깨우침에 필요한 법을 물으니, 원효가 삽관법鍤觀法을 지어 가르쳐 주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반성하며 한 뜻으로 수도하더니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쓰고 있는 광덕과 엄장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이다. 그것은 독자가 희망하는 결말이기도 하다. 


고운기
한양대 국문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방문연구원(1999~2002), 메이지대학에서 객원교수(2007)를 역임하고,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삼국유사』에 실린 신화, 설화, 노래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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