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요
2014-12-30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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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휘옥과 김사업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외딴섬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으로부터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 지도를 받으며 피나는 수행을 해 왔다. 현재 오곡도 절벽 위 폐교를 수리하여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두 사람이 그동안 학문과 수행을 통해 얻은 삶의 불교를 제시하고자 한다.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연기緣起이다. 연기는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세계 사상사의 견지에서도 실로 귀중한 사상이다.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형해만 남은 연기가 아니라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연기, 여기서 그 첫 번째 이야기를 듣는다.
- 편집자 주
| 내 삶의 자화상
당신의 세상을 바꾸고 싶지 않으세요?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가요? 그러면 다음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세요.
회사원 준호가 있었다. 그는 동료 동수가 죽도록 미웠다. 동수만 보았다 하면 뒷골이 당기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근무처가 같다 보니 동수를 만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준호의 기분은 엉망이 되었다. 준호는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지 생각해 보았다. 평온하던 마음이 동수만 보았다 하면 괴로워지니 원인은 동수에게 있었다. 남은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준호는 회사 사람들에게 깊은 신임을 받기 위해 훨씬 더 성실하게 일했다. 다툴 일도 좋은 웃음으로 양보했다. 준호에 대해 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 갔다. 이때부터 준호는 사람들에게 동수의 약점을 부풀려 슬쩍슬쩍 말하기 시작했다. 신임을 얻고 있는 준호의 이야기였으니, 가랑비에 옷 젖듯 동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혹심한 불경기가 찾아왔다. 그 회사도 감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떠난 사람들 중에는 동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수의 해고에는 장기간에 걸친 준호의 험담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준호는 내심 기뻤다. 내일부터 동수를 만날까 노심초사할 일도 없었다. 퇴근 후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가 서운해서 술집에 들러 기분 좋게 취하고 노래도 서너 곡 불렀다. 건너편에서 한 젊은이가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진 듯한 얼굴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준호는 젊은이에게로 다가가 한 잔 따라 주면서 말했다. “젊은이, 너무 괴로워 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동수가 떠나자 준호의 회사생활은 밝았다. 매일 매일이 즐거운 가운데 준호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은 최소한 자신에게서만큼은 끝난 줄 알았다. 한데 웬걸, 반년이 지나자 동수만큼 미운 놈이 회사에 또 한 사람 생겨났다. 괴로움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준호는 이런 서울이 싫었다. 한적한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겼으나 그곳에도 미운 놈은 있었다. 허탈해 하던 준호는 미국으로 전근을 갔지만 살아 보니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준호는 이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미워하고 앙갚음하면서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퇴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로병사의 그림자는 예외 없이 준호에게도 찾아왔다. 중병에 걸린 것이었다.
생을 마감하게 된 시점에 와서야 준호는 자신의 생을 차근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일생 동안 내내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고 후회했지만 생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몇 십 년 전 젊은이에게 술 한 잔을 권하며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 큰소리치던 그도 후회하며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준호는 일생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에서, 지방에서, 미국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고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신문에 오르는 기사들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세상을 경험한 그였지만 그의 생애 내내 변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미움의 대상은 수없이 바뀌어 갔지만 미워하는 자신의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였던 것이다.
여기서 준호는 누구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바로 대답할 것이다. “나도 사람을 미워하긴 했지만 적어도 그렇게까지는 살지 않았다.”고. 그러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우리다. 욕심·욕망이라는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한, 미워하는 대상이나 미워하는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준호는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 대부분도 준호와 같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 준호처럼 후회하며 세상을 하직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준호를 통해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 해탈과 열반의 길은 내가 변하는 데서 열린다
우리는 언제 미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까? 준호 이야기에서 보듯이 미운 사람이 생겨날 때마다 그 사람을 제거하거나 자신이 그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처방일 뿐이다.
내 마음에서 미움이 완전히 녹아떨어질 때 비로소 미움으로부터의 해탈은 가능해진다. 나에게서 미움이 없어졌을 때 과거에 미워했던 사람이 옆에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다른 번뇌도 마찬가지이다. 내 속의 모든 번뇌가 흔적 없이 사라진 그 자리가 해탈이요 열반이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의 길은 남이 아닌 내가 변하는 데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준호처럼 문제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고 있다. 바깥의 원인 제거에만 전 생애를 소모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변하려 하지 않고 남만, 세상만 본인 입맛대로 변화시키려 하다가 한 번뿐인 삶을 마감한다. 마지막에는 허무만 안고 후회하며 간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바꾸어야 할까? 마음이 바뀐다고 진정으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을 바꾸었을 때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석가모니는 깨닫고 난 뒤 광활한 인도 땅 곳곳을 다니면서 가르침을 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알아듣도록 가르쳤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그 광대한 지역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만 다녔다. 날이 저물면 나무 아래에서 눈을 붙였고 탁발한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5년 동안 이 가르침의 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곳, 쿠시나가라도 바로 이 가르침의 길 위에 있었다.
석가모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일까? 그것은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될 온갖 괴로움을 겪고, 필요 없는 구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괴로움과 구속에서 영원히 벗어나 평안과 대자유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영원한 평안과 대자유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에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했든 출현하지 않았든 늘 있어 왔던 진리, 석가모니는 그 진리를 보여 주었다. 진리에 대한 무지가 무명無明이고, 이 무명에 의해 끝없는 애착인 갈애渴愛가 생겨난다. 무명과 갈애 뒤에는 괴로움과 속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 진리대로 살면 모든 대자유인들이 걸었던 영원한 평안과 자유자재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는 문은 바로 당신 앞에 언제나 열려 있다.
|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를 설하는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 단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연기緣起’이다. 연기는 불교 교리 전체를 꿰는 실이요, 정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세계사상사의 견지에서도 실로 귀중한 사상이며, 앞으로도 인류에 크게 공헌할 사상이다.
연기를 축으로 하여 불교사상사가 전개되어 온 만큼 실로 다양한 연기설이 있다. 12지연기,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법계연기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특정 연기설에 국한하지 않고 연기 일반의 핵심만 말하고자 한다.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 『중아함경』
연기를 깨달아야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를 말로 정의하고 설명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하늘의 달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달을 가리켜서 보게 하는 손가락이 필요하듯이, 언어는 연기를 이해시키고 보게 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 진리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필요하기는 하나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자 한다.
연기緣起의 ‘연緣’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를 뜻하고 ‘기起’는 ‘일어나다, 생겨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연기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다.”를 뜻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라디오를 켜면 소리가 난다. 없던 소리가 생겨난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것이 연기의 ‘기起’에 해당한다. “소리가 왜 날까?”를 설명하는 부분이 연기의 ‘연緣’으로, 소리가 날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라디오 소리가 나기 위해선 실로 무수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예로 들어 보자. 전파를 보내는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전파를 수신하는 라디오라는 기계, 그리고 라디오를 켜는 사람의 동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쟁이 나서 방송국이 파괴되었다고 하자. 그런데도 계속 나는 라디오 소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방송국이 파괴되면 왜 나던 소리가 멈출까? 라디오 소리는 방송국에 의존해야만 비로소 나기 때문이다.
만약 라디오 소리가 방송국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의 파괴와 관계없이 소리는 계속 날 것이다. 따라서 의존해야만 있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조건이 갖추어질 때만 생겨나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결과물인 그것도 함께 변하거나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의 문자상의 의미는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변하거나 소멸하면 함께 변하고 소멸한다.”이다. 이때의 조건을 불교에서는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연기의 이치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연기의 이치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바람 소리
멀리 소나무 숲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날 만한 조건이 갖추어져 소리가 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항상 있다가 지금 홀연히 여기에 나타나서 소리가 난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을 것이다. 이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을 때, “그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그 소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소리가 났다가 인연이 다했기에 그냥 소멸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연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그 바람 소리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해서 똑같은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방금 전 바람 소리와 지금 바람 소리는 다르며, 설사 녹음을 해 놓았다고 해도 실제 그 바람 소리와 녹음기에서 나는 소리는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소리라는 것이 변치 않고 어딘가에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다시 불러올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소리는 인연이 다하면 소리 그 자체로서는 생명을 다해 소멸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예외 없이 모두 바람 소리와 같이 연기한 것이다. 나 자신도 연기한 것이요, 기쁨과 슬픔도,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연기한 것이다. 물질적・정신적인 무엇 가운데 연기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뭔가가 연기했다는 것은 조건(인연)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났다는 것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모든 것은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생겨난 것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구절은 골수에 새겨 되씹고 되씹어서 내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이 구절처럼 보이고 느껴지도록 사무쳐야 한다.
눈을 크게 뜨고 내 앞에 펼쳐지는 연기의 세계를 보라! 순간에 생겨났다가 순간에 사라지는 다이나믹한 세계를!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영겁의 세월을 지나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소리이고, 지금 이 순간의 그대 얼굴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우주에 단 하나뿐인 얼굴이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에는 좋은 것은 끝까지 손에 쥐려 하고 싫은 것은 절대 수용하지 않으려는 집착이 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연기의 소산물 아닌가? 떠나보낼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는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진리를 등진 무명과 그로 인한 집착은 연기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괴로움과 얽매임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방금 전의 바람 소리가 듣기 좋았다고 해서 또다시 들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목을 매달면 매달수록 골병만 깊어질 따름이다. 그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망 때문에 애석하게도 지금 불고 있는 청량한 바람 소리는 놓치고 만다.
떠나간 소리가 변치 않고 머물러 있는 세계는 결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소리의 세계, 곧 연기의 세계 안에서 그 초월을 찾아야 한다. 떠나간 사람, 과거의 원한과 영광 등은 지나간 소리와 같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초월할 수 있을까? 다음 호에서 그 길을 발견하기 바란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했다.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불교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해동고승전 연구』, 『자 떠나자 원효 찾으러』,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1, 2, 3』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학사 편입하여, 같은 과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불교학 전공)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는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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