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정토 만들어 갈 주춧돌이 놓였다

용성진종 스님 탄생 150주년 기념법회

2014-08-12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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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먼 길을 나섰다. 전북 장수로 향하는 길이다. 이른 시간임에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건 녹록치 않았다. 마침내 쭉 뻗은 고속도로 위에 올라 달리기를 시작했다. 꽤나 오랫동안을 달린 끝에 맑은 계곡물을 곁에 끼고 굽이길에 접어들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느림보 걸음을 걸어야 했다. 장수군 산골짜기는 이미 전국에서 모인 차들이 빽빽했고 저 멀리로 보이는 사찰 초입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모두 용성 스님의 탄생 150주년 기념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새벽부터 전국에서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 “과거 백년 치유하고 미래 백년 만들어 갑시다”
나라 잃은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나침반이자 3·1 운동의 막후기둥의 역할을 했던 용성 스님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법회가 열렸다. 독립운동가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는 6월 5일 장수 죽림정사에서 ‘용성 진종조사 탄생 15주년 기념식’을 봉행했다. 
이날 법석은 단순히 용성 스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일제 말기 용성 스님이 열반 직전 상좌인 동헌 스님에게 내렸던 ‘유훈10사목遺勳十事目’의 회향을 선언하는 법석이었다. 용성 스님의 유훈10사목의 내용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지의 성역화, 경전 100만 권 번역과 배포, 100만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줄 것, 부처님 주요 성지에 한국 사찰을 건립할 것 등 10가지다. 유훈은 동헌 스님에게서 다시 도문 스님에게로 이어져왔고 이날 비로소 회향을 하게 됐다.
용성 스님의 탄생지인 장수 죽림정사에서 열린 이날 법회에는 전국의 정토회 불자들을 포함한 사부대중 5,000명이 동참했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밀운 스님, 대각회 이사장 도업 스님, 조계종 포교원장 지원 스님, 전 조계종 포교원장이자 용성문하 자운문도의 대표인 혜총 스님, 부산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등 고승대덕들이 운집한 것은 물론이고 김희중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박남수 천도교 교령, 김명혁 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 김대선 원불교 평양교구장 등의 이웃종교 지도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또 정의화 국회의장,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정동영 새정치민주연합 공동위원장 등 정재계 인사들도 이 자리를 찾았다. 명실상부한 불교계 잔치였다.
“용성진종 스님은 불교의 정법안장을 확립한 수행자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서 태극기를 독립운동의 깃발로 쓰도록 이끄셨고, 대한민국의 국호를 제정한 온 겨레의 육신보살입니다. 용성 스님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것을 오늘에 맞게 행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 부처님 법에 따라 수행에 정진해 나와 이웃의 행복을 도모하고, 외적으로는 분단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해 과거 백년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 백년의 희망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법륜 스님은 법회의 첫머리에서 대회사를 통해 이처럼 강조했다. 방송인 김병조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법회는 기념식과 용성음악제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밀운 스님은 기념사에서 “용성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법맥과 율맥을 바르게 세워주셨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막후기둥으로서 온 겨레의 사표가 되셨다”며 “용성 스님의 유훈 실현을 위해 매진한 불심도문 스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전 국민이 유훈에 담겨 있는 참의미를 계승해 나아가길 간절히 발원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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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각사상으로 마음의 등불을 켜라
용성 스님의 유훈을 실천해온 도문 스님은 기념법어를 통해 용성 스님의 대각사상을 소개하며 불자라면 응당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륜 스님이 법어 하나만 말하고 내려가야 있어 보인다고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자리에 올라오니 한 말씀을 안 드릴 수 없습니다. 마음을 잘 쓰면 부처, 보살, 연각성문緣覺聲聞이 되고 하늘도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마음을 씁시다. 용성 스님은 이 마음을 잘 쓰기 위해 먼저 깨닫자는 자각自覺, 남들도 깨닫게 하자는 각타覺他, 모두가 함께 깨달음을 행하자는 각행覺行, 깨달은 바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자는 각만覺滿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각사상입니다. 어두운 밤길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등불을 밝히면 보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등불을 켜고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도문 스님은 적절히 농담을 섞어가며 우렁찬 목소리로 법문을 진행했다. 재치 넘치는 도문 스님의 법문에 법회 참석자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화답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법회에서는 용성 스님 유훈10사목의 회향을 맞아 유훈 실현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들에게 도문 스님이 직접 공로패를 전달하는 순서도 진행됐다. 
법회에 이어 죽림정사 인근 물빛공원에서는 용성 스님의 사상을 주제로 작곡된 교성곡 ‘용성’이 연주돼 잔치의 정점을 이뤘다. 교성곡 ‘용성’은 박범훈 중앙대 명예교수가 작곡한 작품이다. 이날 공연에서는 중앙국악관현악단, 국악인 김성녀, 유희성 교수의 협연으로 진행됐다.
이날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인천에서 왔다는 장성희(43) 씨는 “이 법회를 통해 평소 만나기 힘든 여러 스님들을 직접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며 “용성 스님이 현재의 한국불교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친 큰 스승이었는지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용성 스님이 남긴 유훈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올바로 가꿔가고자 하는 선각자의 꿈이었을 터. 유훈에 담긴 참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널리 알리는 것은 도문 스님이 아닌 이 법회에 참석했던 불제자들의 몫이다. 이날 죽림정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그 뜻을 세상에 퍼트릴 비옥한 텃밭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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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법을.세상에.널리.퍼트린.한국불교의.큰.스승
용성 스님
암울했던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에게는 아무리 짓밟혀도 포기하지 않는 민들레 같았던 독립의 염원이 있었다. 그런 독립의 기운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에서부터 불이 붙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였던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다.
용성 스님 문중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당초 예정했던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헤어지면, 독립운동이 용두사미로 끝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때 용성 스님의 지혜가 빛을 발했다. 태화관 기생들을 시켜 민족대표 33인의 두루마기와 신발을 감추게 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인 동헌 스님을 시켜 총독부에 신고전화를 해 자신을 비롯한 33인을 모두 잡아가게 했다. 민족대표 33인의 구속을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기폭제로 만든 셈이다. 용성 스님이 민족의 등불이었다고 평가받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용성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가 기복신앙에서 불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춧돌을 놓은 선각자이기도 하다.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같은 불교 비판에 맞서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쓰고 창덕궁 앞에 대각사를 열어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는 한문 경전을 한글화하면 승려의 권위가 추락한다는 인식이 파다하던 시절이다. 찬불가를 만들고 어린이 포교를 시작한 것도 용성 스님이 최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현재 한국불교의 정신과 포교방법론은 용성 스님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불광운동의 뿌리 역시 용성 스님의 그런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님은 또 불교가 우리의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며 간도에 대규모 농장을 갖추고 선농일치(禪農一致, 농사와 선 수행이 다르지 않음)를 온몸으로 보여줬다. 스님이 저술한 수행 문답집 『각해일륜』을 살펴보면 용성 스님이 얼마나 대단한 선승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스님은 1864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6세 되던 1879년 남원 덕밀암 혜월 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리고 1940년 77세, 법랍 62세로 열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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