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정신을 되살리고 싶다

한국채색화가 김범수

2014-07-07     불광출판사

 관음보살32응신도


 

 

혹시 고려불화를 본 적이 있는가? 고려불화는 불화 중 백미로 손꼽힌다. 그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고려불화의 가치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991년 10월, 세계 최고의 미술품 경매장인 소더비Sotheby’s에 고려불화 한 점이 출품됐다. 경매장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고 당초 예상가의 10배를 훌쩍 넘기고서야 이 작품은 낙찰됐다. 고려불화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 모사는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중요한 행위
고려불화는 세계인들을 매료시킬 만큼 우수한 종교미술의 결정체였다. 현존하고 있는 고려불화는 160여 점. 그런데 국내에는 10여 점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나머지는 대부분 일본에 있고, 일부가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이토록 뛰어난 종교미술의 결정체를 만들어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더욱 가슴 아픈 건 고려 이후 저런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단절돼버렸다는 점이다. 특히 뼈아픈 근현대사를 보내며 우리는 찬란했던 문화유산의 상당수를 상실했고, 새로운 문화재를 만들어내지도 못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과연 찬란했던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기를 되돌릴 방법은 없는 것인가. 한줄기 희망을 찾아 전라남도 장성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국채색화가이자 회화 문화재 모사 및 복원 전문가인 김범수 교수를 만났다. 김범수 교수는 현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장성 출신인 김 교수는 한적한 시골마을 한 편에 작업실을 만들어놓고 제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작품은 순천 송광사 16국사 진영 모사模寫다. 모사는 주요 문화재의 본을 떠서 똑같이 그려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해당 문화재의 특징이나 기법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프랑스 파리에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이 있어요. 이곳에 한국 문화재가 1,000여 점 정도 있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가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8폭 병풍이에요. 이 작품은 기메 박물관이 한국에 돌려주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이 한국에서 만나기 힘들겠죠. 그럼 한국에서도 이 작품을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하나 있어요. 모사를 하는 거죠. 모사라는 행위는 단순히 그림을 베껴 그려내는 게 아닙니다. 문화재 원본의 보존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만나기 힘든 문화재들을 대중들이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도 하는 거죠. 16국사 진영 원본도 언젠가는 자연의 힘에 의해 사라지겠지만, 그때쯤에는 제가 모사한 이 작품들이 문화재로서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을 거예요.”

 
 


| 전통 회화를 그린다는 건 그 자체로 수행
그는 지금까지 30여 년간 기메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8폭 병풍뿐 아니라 일본 교토 고산사에 보관 중인 원효 대사 진영, 일본 정토종 본산 지은원이 소장한 도갑사 관음32응신도, 전주국립박물관 영조대왕 어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벽화 등 각종 문화재들을 비롯해 여러 사원과 사찰의 고승 진영 등을 모사하거나 복원해왔다. 그렇다고 단순히 모사와 복원만을 전문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창작 작업을 하고 있으며, 전통방식 그대로 고승들의 진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전통회화, 그중에서도 한국채색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첫 인연은 대학 때부터다. 그는 원광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렇게 그림과 인연을 맺은 김 교수는 그림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예술대학에 진학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은 학생들에게 옛 그림의 복원을 시키더군요. 당시만 해도 그런 광경은 저에게 아주 생소했어요. 한국의 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과정들이 다 이유가 있어요. 전통 안료의 특성이나 기법, 기술 등을 몸으로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죠. 당시에 조선의 민화, 불화도 참 많이 그렸지요. 그 경험들이 저의 밑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지금은 저 역시 그런 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전통 방식의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적어도 10년 이상의 견습 과정과 수련이 필요해요. 그래서 전통 회화를 한다는 건 수행이나 다름없지요.” 
전통 회화를 그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안료다. 안료와 염료를 어떻게 적절히 사용하느냐, 그 지점에서 작품의 수준과 질이 결정된다. 안료는 색상 별로 원재료인 천연 석채가 다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성질도 제각각이다. 안료를 자유자재로 다루기 힘든 것은 이런 색상별 성질을 잘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접착제인 아교의 성질까지 감안하면 전통 안료의 사용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 교수는 전통 안료의 성질을 잘 알아야만 복원도 가능하고 창작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 우리에게는 고려의 장인 정신이 필요하다
그는 최근 한국사회에 대해 할 말이 참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현상들이 벌어지는 이유를 한 마디로 압축해 “고려불화를 그리던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려불화가 세계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깊은 빛깔과 세밀한 선의 사용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불화 한 점에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15,000명의 부처를 그려 넣을 수 있는 초정밀 기술과 집중력,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려인들의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인들은 늘 높은 수준의 목표치와 의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려청자 역시 그런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장인 정신이라고 김 교수는 말했다. 장인 정신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면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그는 단언했다.
고려의 장인 정신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김범수 교수는 요즘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는 대표적인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의 복원이다. 이 작업은 얼마 전부터 이미 첫 발을 떼었다. 현재 수월관음도는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기법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작업은 그에게 일종의 도전이다. 또 한 가지 목표는 폭 20m, 높이 4m 규모의 영산회상도 제작이다. 이것은 기존에 보기 힘든 규모의 대작이 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작품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필생의 작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실을 나오며 바라본 하늘은 어느새 파란 여름의 색을 띄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 색을 온전히 화폭 위에 옮길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한 사회가 된다면 우리는 분명 고려의 문화 전성기를 다시 한 번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김범수 교수가 꿈꾸는 고려의 정신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다시 되살아나는 날이 오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김범수
한국의 회화 문화재 모사 및 복원 전문가이자 한국채색화가. 원광대학교를 졸업한 후 교토예술대학에서 문화재보존수복 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현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회화문화재보존수복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문화재보존수복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천연 석채로 만든 전통 안료를 사용해 작품을 하는 작가로서 문화재 복원과 창작활동을 활발히 펼쳐가고 있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전통 회화를 디딤돌 삼아 현대적 미감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김홍도 행려풍속도 8폭 병풍 현장모사, 일본 지은원 소장 도갑사 관음32응신도 현장모사, 월정사 한암·탄허·만화·지암 대종사 진영 제작, 일본 고산사 소장 원효 스님 진영 현장복원, 법정 스님 진영 제작 등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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