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가정을 다스리는 법

불광법단

2009-12-17     관리자
  반야는 지혜의 빛을 말합니다. 내 생명에 이미 깃들어 있는 부처님의 광명 이것이 지혜의 빛 반야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의 빛 반야는 두 가지로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허무한 것을 없앱니다. 대립· 고난· 장애· 미움· 원망과 같은 진리에는 없는 바라밀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 부처님의 세계에는 없는 허망한 것들을 쓸어버립니다. 『반야심경』의 말씀에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하신 것과 같이 무무무(無無無)해서 우리들이 의식하고 있는 세계 이 모두는 반야의 세계에서는 무로 시현하는 것이고 없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그러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없어서 텅 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로 거기엔 진리로 충만하고 부처님의 은혜와 위신력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항상 쓰는 비유처럼 구름이 걷히면 태양의 햇살이 가득합니다. 허망된 것, 거짓된 것, 나쁜 것, 내 마음 내 가슴을 가리고 있던 그런 것들을 제거해 버리면 원래로 있는 진리광명이 나타납니다. 범부성이라 하고 중생성이라 하고 업보성이라 하는 것들을 반야는 단번에 없애버리니까 남은 것은 진리광명이 충만하고 부처님의 은혜의 신력이 충만한 은혜의 세계 은혜의 덩어리 그것밖에 없습니다.
  바라밀의 세계는 일찍이 우리 생명에 완전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은혜의 세계 그것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반야는 이와 같이 해서 우리 생활 가운데의 나쁜 것, 부정한 것들을 모두 소탕하고 그 위에 부처님의 위신력을 가득하게 합니다.
  이러한 반야의 빛이 제일 잘 나타나는 곳은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의 마음을 좌우하고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가정입니다. 아무리 사업이 번창할 시기가 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가정이 불화하고 사고의 연속이라면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이유는 어디밖에 있는 나쁜 사람이나 위압 때문이 아니고 불화한 가정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을 맡겨놓고 지내는 이 가정 내부가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고 흔들려 아픔을 준다면 밖의 성공이 제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 더 힘을 발휘한다.
  어떤 분은 “불교는 철학적인 것이고 수행을 하고 도를 깨쳐서 생사를 초월하는 것이지 개인 일신의 안녕과 가정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속된 것이고 저질적인 것이다.”하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만 햇빛이 어디 맑고 깨끗하고 높은 곳에만 비칩니까? 좋고 나쁜 곳 가리지 않고 비치며 지저분한 데도 비쳐서 그 지저분한 것을 맑혀 거기서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원래로 차별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빛은 어두운 곳에서 더 힘을 발취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 반야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의 일신과 가정에 진실의 광명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평화와 기쁨과 번영이 넘쳐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뿌리가 박힌 정착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것이나 이론적인 것이나 교양적인 것으로 갖고 있다면 그것은 겉치레로 갖고 있는 불교지식이지 바로 생명의 길로서 믿음의 길로서 불법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순수 투명해야
  가정에 있어서의 반야의 가르침의 특징은 무엇일까? 본래 반야는 제법(諸法)의 무(無)를 말합니다. 세간적인 대립상활의 무 세간적인 마음과 고난과 장애의 무를 말합니다. 반야광명 진리광명에는 그런 것이 다 없습니다.
  그러니까 반야의 믿음· 진리· 불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가슴 속의 미움이 없어집니다. 대립심이 없어집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슬픔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없애려고 노력하여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나 자신과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나타나서 그 가정을 완전히 하나의 맑은 물처럼 하나로 화합하고 하나로 엉키고 하나로 움직이는 투명한 가정을 만듭니다.
  이렇게 가정을 만드는 것이 반야를 배우고 불법을 믿는 불자들의 자세입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의 가정은 완전무결하고 순수· 순일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대립도 미움도 원망도 없고 항상 하나로 엉기는 따뜻함도 공존성만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신뢰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그것은 미움과 원망이 생기는 종자가 됩니다.
  한 가정의 모두는 한 생명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수가 많고 여러 생명이 크고 있더라도 그 가정 단위로서 한 생명입니다. 순수한 한 생명이 되어서 하나로 따뜻하게 엉겨서 커가는 것이 불법을 믿는 사람들 가정의 모습입니다. 거기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들이 있고 형제가 있고 부모님이 계셔서 제각기 하는 일은 다를지 몰라도 가정에 있어서는 하나입니다.
  우월한 자가 없고 못난 자가 없습니다. 완전한 공동자입니다. 밖에서 받아들인 것은 모두 안으로 들어옵니다. 손해도 이익이 되는 것도 모두가 그 집안에 담깁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그 모두가 한 집안에서 하나로 엉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에는 대표자가 있고 안주인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를 그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밖으로 집안을 대표하고 집안의 가장으로서 문패를 대문에 달지만 실지로 집안의 알맹이를 담당하는 이는 아내입니다. 그래서 모성으로서의 아내의 역량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근일 가정문제에 대해서 상담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기도도 같이 하고 합니다만 대개의 경우 두 가지의 경우가 제일 많았습니다. 극복하기 힘든 가정문제와 병고에 관계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가정으로서 당연히 이루어져 있어야 할 상태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였습니다. 당연히 하나의 맑은 물과 같이 투명하게 하나로 엉겨 따뜻한 생명의 둥우리가 되어 있지 않고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부분은 통하고 어느 부분은 통하지 않고 핵이 각각인 것이 있었습니다.
  핵이 각각이란 말은 가치기준을 다로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어떤 문제를 갖고 의논해 왔을 때 그 부인이 가정단위의 깊은 생명 동일자로서의 판단 기준을 갖고 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판단 기준을 갖고 계산하고 따지고 분석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판단기준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아집과 고집을 세웁니다. 이러한 자세로 인하여 하찮은 일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장애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질적 요소의 무(無)상태로 가정이 하나를 이루고 이렇게 이룬 화합이야말로 참으로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성장시키고 자녀가 충실하게 성장하게 하고 집안에 행복이 담아지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고 깨가 쏟아지는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신성을 지키고 가정의 순결을 지키고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 가정의 밝음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이 가정의 순결과 행복이 지켜지지 않는 한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 모두가 크게 흔들려서 멍들어 어두워질 것입니다.

    모성은 바라밀행
  근래에는 여성들이 많은 교육을 받고 많은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이 갖는 능력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근본적인 특징과 장점은 바라밀 생명의 직접표현입니다. 즉 유순한 것, 밝은 것, 부드러운 것 그리고 모두를 받아들이는 너그러움, 모두를 이해해주는 자비스러움 따뜻함 어머니에게서 발견하는 모성애입니다. 이것이 모성이 갖는 장점이고 특징이며 바라밀행입니다.
  가정에서 아무리 부인이 나이가 적고 젊다고 하더라도 그런 여성이 갖는 특징과 장점 때문에 그는 (가정의 중심이 되고 태양이 되어서) 그 집안 식구를 다 감싸고 아픔도 치료해 주고 밖에서 다친 충격도 집안에 들어오면 치유가 되게 하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바라밀적인 인격은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밝고 따뜻하게 하고 무엇이고 이루게 하는 생산적인 토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잘못을 끝없이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부드러움 그 모성이 집안 식구들의 힘을 재생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밖에서 하는 일이 잘되고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아내가 기능화 된 기능인으로서 무장을 하고 모가 나게 자로 재고 분석하고 따지고 한다면 그것은 집안에 응어리를 만듭니다. 겉으로는 똑소리나게 문제가 없는 집같이 보이지만 수많은 대립과 잡음을 생성시키는 집안이 됩니다.
  집안엔 싸늘한 바람이 불고 남편은 위축되어서 밖에서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의 재생을 집안에서 얻지 못합니다. 집안에 들어와서 완전히 자기를 해방하고 모든 것을 다 털어 놓아서 재생의 힘을 거기서 얻고 충전해서 희망과 용기를 갖고 밖에 나가 뛰어야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에 생산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런 모성적 바라밀적인 장점이 결여된 가정에선 그런 힘을 회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술집에서 풀든지 노름으로 풀든지 하면서 밖으로 나돌게 되고 한눈을 팔고 불건전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근본적으로 힘의 재생처 모든 것을 이루는 생산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내적인 알맹이 관리자가 여성이기에 여성은 자신의 특징과 장점을 충분히 발취하여서 그 집안의 태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성은 만물을 생성하는 땅
  경에는 “어머니는 바로 대지[땅]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대지이기에 능생(能生) 즉 능히 모든 것을 창출시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덕성을 갖춘 아내는 자녀를 낳아서 기르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남편을 만들어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남편들이 거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 여성 성격에 따라서 남편의 태도가 바뀌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성은 생산자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울 뿐만 아니라 남편도 사업도 집안의 분위기도 다 그 집안의 주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주부에 따라서 그 집안의 습식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의 치장· 장식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크는 아이들의 성격만 바뀌는 정도가 아닙니다. 집안의 모든 것이 다 그 안내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겉으로는 남편이 주인이고 문패도 다는 가장이지만 그 집안의 내실은 그 아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아내가 여성의 기본자세를 망각하고 특기가 있다든가 기술이 있다든가 돈벌이에 재능이 있다든가 해서 기능인으로서만 내닫고 여성으로의 덕성· 너그러움· 따뜻함· 부드러움을 잊고 있다면 그는 여성을 잃은 여자라고 할 것입니다. 기능공이지, 아내나 모성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성이 결여된 그 집안엔 찬 바람이 불고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크지 못하는 결손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순화하고 그릇된 것들을 비워버렸을 때 자기 내면에 이미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 빛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야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존경받는 아내 존경받는 여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고 감싸주는 모성애가 넘치는 그런 따뜻한 아내 여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때를 막론하고 이러한 여성의 특징과 장점이 키워져야 그 사회는 존속되고 번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여성이 거칠고 싸늘하고 편협하고 타산적이고 외고집이고 하다면 그 가정 그 사회는 문제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런 주부가 있는 집안은 생활도 곤란해집니다.
  가정의 주부가 외형성으로 내어닫고 기능화로 내어닫고 모성의 덕성을 회면하면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한 가정 식구 모두가 불행해지고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정신 형성과정이 불건전해지기 때문에 문제아가 됩니다. 그런 아이들은 후에 교정하기도 힘이 듭니다.
  반야를 배우고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야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불법은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행하는 그 사람과 그 가정과 그 사회에 밝음과 기쁨과 생산을 줍니다. 나와 가정을 관리하는 높은 지혜가 내 생명바닥에서부터 부처님 신력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원래부터 내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