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인간회복의 과제
선이란 무엇인가
ꊱ 잃어버린 人間
오늘날 인간회복의 소리는 도처에 드높다. 식자(識者)간에는 인간의 자기상실이니 인간이 외출한 문명이니 하여 인간부채 현상에 아우성이다. 사회가 거대한 인간관리체제로 조직화되면서 인간성을 되찾자는 소리는 처처에서 한숨처럼 풍겨 나온다. 과학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한 현대는 인간을 떠난 기계에로 치닫고 체제에의 적응이 강요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의 비인간화 경향은 거대한 세력으로 압도해 온다. 여기에서 인간성의 자유스러운 발굴, 생활환경의 안정과 보장, 인간의 가치와 그 창조성의 존중 등 온갖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이것을 통틀어 말하면 인간회복의 소리이며 인간의 비명 섞인 아우성이라 할 것이다. 이런데서 심지어는 과학문명을 저주하고 기계화된 사회체제를 죄악시하는 풍조도 일고 있지마는 이것 역시 방황하는 인간의 한 양태일 뿐이다.
이런데서 무엇을 위한 문명이며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이냐를 되묻는 소리와 함께 인간의 주체적 자아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추세다. 사실 인간의 주체적 자아의 문제는 무엇보다 앞서 밝혀야 할 인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경제발전이니 자유신장이니 복지증진이라는 말이 귀가 아프도록 들려오지만 이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없는 자유나 복지시책으로는 참으로 인간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쾌적한 생활환경의 조성과 풍요한 물량의 확보가 인간을 향상시키고 조화 있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향락에 탐닉하고 방종에 치달으며 안이와 나태에 빠져 인간이 타락하고 그 심정이 공허하고 황량해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기우(杞憂)가 아니라 우리사회에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다. 인간자신에 대한 진실한 확인 없이 욕망의 충족만으로 인간의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타락 이상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역시 경제적 성장을 이해서나 복지의 증진을 위해서도 인간의 자각문제는 그 무엇에도 앞서서 추구되어야 할 지상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ꊲ 근본적 착각
원래 인간의 자기상실의 문제는 그 역사가 사뭇 먼 데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인식구조부터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추상이 진실일 수 없고 관념이 실제(實際)일 수 없다. 이런 인식구조로서 다시 육체를 자신으로 알고 물질의 공급으로 자신이 유지되는 것으로 안다. 또 어른대는 생각을 자기 마음이라고 안다. 이 착각에서 인간의 자기 상실은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착각은 또한 근원이 있다. 그것은 자기 진면목(眞面目)에 눈뜨지 못하고 대상(對象)을 보며 이해(利害)를 보고 거기서 대립하고 취사(取捨)하며 집착하고 배척하는 근본미혹이 그 근원인 것이다. 잃어버릴 자기, 도착(倒錯)된 자기, 망각한 자기 진면목을 이렇게 해서 그 근원이 사뭇 먼 데 있는 것이다. 인간불행이 여기서 시작되고 암흑세계의 역사는 여기서 발단된다. 그래서 자기 본분을 모르고 대상을 보고 공포감을 일으키거나 욕망의 도구가 되어 그 충족에 몰려다니게 되는 것이니 중생의 삶은 근원적으로 자기상실인 것이다.
인간의 자기상실의 상태 - 이것이 중생이다. 그렇다면 중생에 있어 최대의 급선무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회복이다. 자기상실, 끝없는 방황, 대립 투쟁의 반복, 여기에 종지부를 찍자면 불가불 자기본분에 눈떠야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각(自覺)이다.
부처님은 3천년 전에 인가의 삶이 도착된 자기로 살고 자기상실의 방황임을 보았다. 그리고 도착된 허무에서 벗어나고 방황의 삶 불안과 고뇌의 삶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3천년 전이나 3천년 후의 오늘이나 인간의 근원적인 착각행(錯覺行)과 자기상실의 상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과학 기술의 발달은 그리고 빈틈없이 조직화된 사회체제 속에서 인간은 도착된 자기에서 불안 고독의 극한을 보고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인간상실의 상황은 심각하고 그런 만큼 인간회복의 소리는 절실하고 드높은 것이다.
선은 반야안(般若眼)이 밝혀낸 최상의 인간회복의 길이다. 미혹의 어둠을 단번에 밝혀 영겁불멸의 인간본분을 직하게 회복케 한다. 이런 점에서 선은 예나 지금이나 인도나 중국이나 오늘의 우리 한국에서나 한결같이 인간이 바로 서고 역사의 방향이 잡히고 문명이 그 빛을 발한다. 참된 인간의 가치와 위덕이 여지없이 발양되고 그것이 보장되는 문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온 우주 온 세계와 모든 생명이 함께 불멸의 빛을 얻고 그것을 희롱하는 아침이 열리는 것이다.
ꊳ 참 자기에 눈 뜨자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지러운 내외정세 속에 국가의 안정과 번영과 국토의 통일을 향하여 줄기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화와 통일은 온 겨레의 한결 같은 염원이다. 그런데 이 염원을 달성하는 길은 경제적 부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배타적 이익추구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자기방종이나 화려한 구호가 이루어주지도 않는다. 생명의 진리를 확고히 보고. 진실한 존재의 주체적 파악에서 살아 있는 자각행이 터져 나와야 한다. 거기서 자신의 자존적(自存的) 존엄과 가치와 무한의 능력과 덕성의 발현이 있는 것이다. 영원히 저물지 않는 자성(自性)태양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겨레도 조국도 나와 더불어 하는 빛이며 한꽃송이임을 자각하는데서 나와 조국과 세계와 진리가 하나로 통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선(禪)은 그릇된 이기적 눈을 돌려 자기 본분지(本分地)에 사무치게 하고 세계와 역사를 자기 생명 속에서 관통하는 눈을 열어준다. 이런 점에서 선은 영원한 인간회복의 바른 길이다.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지혜를 여는 길이다. 세계와 중생 위에 진리의 꽃을 가득 피우는 보살의 땅인 것이다.
오늘날 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선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모르고 정신건강법이니 성격개조법이니 또는 건강법의 하나로 알고 접근해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선을 함으로써 미혹한 군상에 본분 광명의 영상이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선의 목적일 수는 없다. 바다를 얻으면 그 안에 온갖 장엄과 서식물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닌가. 선자는 모름지기 바다를 삼키고 허공을 탄토(呑吐)하는 기개가 절실하다. 그리고 오늘의 역사적 상황에서 본분진리를 현발하여 평화 번영·인간완성의 보살업에 등한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이하에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약간 군말을 늘어놓고자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을 처음 대하는 이에 대한 소개의 말에 불과하며 함께 길을 걷는 길벗들에게는 우정의 군말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연전에 출간했던 선관책진(禪關策進) 역주본을 해판하면서 그에 덧붙이기 위하여 쓰는 것이기 때문에 선관책진의 글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