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해설] 석가(釋迦)
불교용어 해설
인간 석가라는 말도 있지만 석가는 이미 인간은 아니다. 인간 아닌 인간, 거기에 불교의 인간관이 있다고 하겠다. 부처인 석가가 방편상 인간의 모습을 띈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약(略)하여 이렇게도 지칭한다.
석가(釋迦, 원음은 Sakya)는 원래 고대 인도에 있었던 일조의 종족이름이다. 불교의 교조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인도 북쪽의 히말라야 산 밑 석가족의 카필라국 왕자로 태어났으나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부처님이 되셨기에 후세 사람들은 ‘석가족 출신의 종교적 성자(聖者)’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부르는 것이다. 석가모니불을 간략히 석가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실 즈음 인도는 바라문교에 의한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16대국이 패권을 다투던 때로서 석가족 또한 서북인도 코살라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부처님의 정확한 탄생연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올해를 불기 2532년이라 하여 기원전 623년을 태어나신 해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비롯하여 인도에서는 인생을 ‘생(生)’의 시점보다 ‘사(死)’의 시점을 중요하게 보는데, 석존(중국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이렇게 부른다)의 열반을 언제로 잡느냐에 따라 80년 생애를 사신 부처님의 탄생연대는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 측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카필라국 숫도다나왕의 아들 고타마·싯다르타는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 나라를 뒤로 한 채 생로병사가 없는 최고의 자유와 행복을 찾아 출가를 하게 된다. 출가 후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남방의 마가다국의 수도 라아자그리하(王舍城)로서 그곳은 종교문화가 융성했던 곳이었다.
라아자그리하에서 싯다르타는 두 사람의 선인(仙人)을 만나게 되었다. 한사람은 알라라·카라마로서 그에게서는 무념무상(無念無想-無所有處定)의 경지를 체험하였고, 웃다카·라마풋다라는 선인에게서는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의 경지를 배웠다. 그러나 추구하는 궁극의 해결을 발견하지 못해 마음속의 불안이 떠나지 않아, 이제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등과 함께 나아란자나강이 굽이쳐 흐르는 우루벨라촌의 가야산 고행림(苦行林)으로 가서 무서운 고행을 시작하였다. 6년간의 고행, ‘설산(雪山)의 육년 고행’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행을 통해서도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한다고 생각한 싯다르타는 수자타의 유미죽 공양을 받아 생기를 찾았고, 이것을 계기로 다섯비구도 싯다르타의 곁을 떠나갔다.
이렇게 고행림을 떠나 혼자서 도착한 곳이 부다가야,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홀로이 수행하다 35세 12월 8일 새벽별을 보고 홀연 깨달았다. 처음에는 세간적인 학문을 버렸고 나중에 다시 고행실천 끝에 그 형식주의의 한계를 갈파하고, 결국 보리수 아래서 스승 없이 깨달음을 열러 부처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시작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200년 후에 나온 아쇼카왕은 부처님을 기념하는 탑을 각지에 건립하였다. 부처님의 생애를 대표하는 사성지인 룸비니, 부다가야, 구시나가라와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땅 즉 불(석가모니)· 법(중도의 가르침)· 승(다섯비구) 삼보가 최초로 형성된 곳인 베나레스(녹야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성지(四聖地)는 왕사성, 기원정사 등과 함께 불교도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생애는 「불전(佛傳)」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1~2세기경 인도의 문학자 마명(馬鳴)이 쓴 「불소행찬(佛所行讚)」은 운문(韻文)의 형태로 되어 부처님의 전 생애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인간 석가라는 말도 있지만 석가는 이미 인간은 아니다. 인간 아닌 인간, 거기에 불교의 인간관이 있다고 하겠다. 부처인 석가가 방편상 인간의 모습을 띤 것이다.
부처님을 쓸데없이 인간계로 되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 되도록 부처님을 믿고 그와 함께 이 세상의 정화를 꾀하여 불국토의 실현에 힘쓰는 일이 진정한 불교도의 길인 것이다. 나무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