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인물전] 환적 의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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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생토록 성내는 일이 없었다. 마음이 너그러워 성급하지 않았다. |
[1]벽곡(辟穀)의 수도자
온 산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은 가을의 어느날, 겨우 뎔 한살의 소년이 속리산(俗離山)의 큰 절 법주사(法住寺) 앞을 지나 복천암(福泉庵)으로 찾아들고 있었다.
마침 복천암에는 진정당 탁린(塵靜堂 琢璘)이라는 학덕 있는 선사 한분이 있었는데 소년은 그 스님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글공부 한다는 명목으로 찾아 온 소년을 인자로운 탁린스님은 반가히 맞아 주었다.
소년은 선산(善山)이 고향이며 문(文)씨 문중의 행세하는 집 도련님이었으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다. 열 한살 되는 그해 봄에 어머니를 따라 충청도 보은 종골리(報恩 種谷里)의 외가로 와서 살게 되었는데, 양반집 자제로 글공부를 해야 하는 그였으나 모든 일이 뜻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혼자 몸으로 아들을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게 된 어머니밑에서 학업을 계속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복천암의 탁린스님에게서 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외가댁 어른들으 졸라서 절을 찾아 왔던 것이다.
어머니의 슬하를 떠나 산중 절로 들어온 소년은 복천암에서 삼년을 지냈다. 처음엔 불교공부를 할 목적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으나 차츰 세월이 지나고 절 생활에 적응되면서 그는 불교를 알고 싶어졌고 또 승려가 되고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탁린스님의 가르침을 배웠으며, 탁린스님도 어버이처럼 소년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었다. 그가 열 네살 되던 해에 스님을 따라 금강산으로 갔으며, 정양사(正陽寺)에 가서 당대 고승인 편양대사(鞭羊大師 彦機)를 뵈었다. 유명한 서산대사의 법을 이은 편양대사가 마침 그 때 금강산 정양사에 머물고 있으면서 배움을 찾는 불자들을 일깨우고 이었다.
소년이 탁린스님을 따라 편양대사에게 인사를 올리다, 편양대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의 얼굴을 보니 도(道)를 닦아 얻을 근기가 있을 것 같구나. 불법을 배우겠다는 첫뜻을 번복하지 말고, 힘써 공부하여 티끌세상의 번뇌 그물(塵網)에 걸리지 않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 소년은 이 곳에서 일년을 지내고 이듬해 속리산으로 돌아왔다.
속리산 복천암으로 되돌아 온 소년은 십륙세 되는 해 봄에 비로소 머리를 깎았다. 그동안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의 만류도 없지않았으나 그는 굳게 결심을 하고 끝내 머리를 깎았던 것이다.
물론 효심이 지극한 그였으므로 어머니의 승락을 받고 출가를 결행하였을 것이다. 그족계(具足戒)를 받고 완전한 스님이 된 그는 영남 팔공산 동화사(八公山 桐華寺)로 가서 송계당 유현(松溪堂 惟賢) 대사에게 경론(經論)을 배웠다.
이 스님의 법명은 의천(義天)이요 자(字)가 지경(智鏡)이며 호가 환적(幻寂)이었다.
동화사 유현대사에게서 경론을 배워 교학을 공부한 그는 21세 때에 청량산(淸凉山)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도자 본연의 자세에서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고자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때 부터 그는 곡식으로 만든 음식을 일체 먹지 않고 솔잎만을 먹으면서 청정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 31년 동안을 줄곧 벽곡(辟穀)하면서 솔잎으로 연명하였던 것이다.
29세 때에 그는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편양대사를 뵙고 배움을 청하였다. 대사는 그에게 목주 진존숙(穆州 陳尊宿)의 공안(困字 公案)을 주었으므로 그는 맹세코 그 화두를 꿰뚫코자 매일 매일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였다. 그리고는 명산 승지(名山 勝地)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큰 스님들의 문을 두드리곤 하였다.
[2]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도인
인조(仁祖) 22년(1644) 5월에 그의 법사인 평양대사가 6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때 그 소식을 듣고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중도에서 병이 들어 다음 해 일주기(一周忌)때에야 참례하고, 스승의 탑과 비를 세웠다.
명산 대찰을 두루 찾고 이름있는 고승을 빠짐없이 만나보면서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던 수도자 환적당의천스님은 어머니가 계시는 보은(報恩)으로 돌아갔다. 수도자의 길로 들어선지 이십여년, 실로 오래만에 다시 늙은 어머니를 찾아 온 것이었다. 그가 출가한 이후 하루도 어머니를 잊은 적이 없었다. 다만 불법을 닦는 수도자로서 힘써 공부하고 정진하는 것만이 참된 효도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생각하는 사모의 정을 수도로 승화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어머니를 찾아뵈었던 것은 인조 25년(丁亥 1647)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그는 쓸쓸히 늙어가는 외로운 어머니의 곁을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하인까지 데리고 절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 절이 임파현(臨陂懸)의 보천사(寶泉寺)였는데 그는 그 절 옆에다가 조그맣게 별채를 지어 거기에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사원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지극히 받들었다. 언제나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보살폈으며, 끼니 때 마다 손수 진지시중을 들어드렸다.
보천사에서 삼년을 지낸뒤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어머니에게 명산 대찰을 구경 시켜드리기 위하여서 였다. 그가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 미타전(金沙寺 彌陀澱)에 있을 때 그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로 인해서 지금까지의 벽곡(辟穀)을 그만두고 정상적인 음식을 먹기로 하였다. 그것이 그의 51세 때의일이었으므로 그가 21세 때 청량산에서 처음 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기 시작한 이후 꼭 31년동안을 계속하였던 벽곡이었는데,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다시 옛 음식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효성이 지극한 불자였고 도인이었다.
그와 같이 항상 어머니를 모시고 받들면서도 스님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항사 불자의 모범이 되어왔던 그는 54세 되는 해 5월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평소에 그렇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였으므로 세속의 어느 효자 못지 않게 정성과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다.
그가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외가로 갔다가 그 어머니를 혼자 남겨두고 산으로 간 뒤에 언제나 마음은 외로운 어머니 곁으로 가 이었으나, 불자 본연의 자세에서 수도에 전념하는 동안만은 잠시 어머니를 잊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공부가 이루어진 45세 때부터 직접 자신이 거처하는 절 곁에 어머니를 모시고 또 여러 곳으로 모시고 다니면서 효도를 다 하였던것이다.
[3]찬운 방장(攢雲方丈)의 노스님
그 어머님의 장례를 지낸뒤에 환적 스님은 홀가분한 몸차림으로 운수행각의 길에 나섰다. 그는 자유로히 발길가는 대로 두루돌아 다녔고 마음 내키는 곳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러 곳에서 적지않은 불사(佛事)를 이루어 놓았다.
그는 청정한 도인으로서 입는것과 먹는 것에 애착이 없었고 물욕도 전연 없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누더기 한벌과 바릿대 한벌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학덕이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이루어졌다. 그는 재령(載寧)의 장수산(長壽山)에다 절(幻寂庵)을 세웠고 대야산(大也山)에는 비로암(毘盧庵)을 지었으며, 석왕사(釋王寺)의 서쪽 골에 환적암(幻寂庵)을 세웠고,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진여암(眞如庵)을 중건(重建)하고 환적암을 수리 하였으며, 문경 봉암사의 서쪽에 환적암을 지었고, 또 오대산에다 신성암(神聖庵을 세웠다.
그러한 그는 숙종(肅宗)13년(丁卯 1687)에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의 백련암 한 칸의 방장(方丈)을 만들고 찬운(攢雲)이라 편액을 붙였다. 이 찬운방장의 앞에는 자연의 바윗돌이 우뚝서 있었는데 그는 매일 이것을 마주보고 정좌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 때 그는 이미 85세를 넘어선 노스님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성내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마음이 너그러워 성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말이 진실하여 조금도 꾸밈이 없었고, 일찍부터 성품이 깨끗하여 명리(名利)에 초연하였으며 그의 마음 속에는 한점의 티끌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신분의 고하(高下)나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대하였으며 그를 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으로 봄바람을 대하는 것같은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와같이 그는 도와 덕이 높고 그도달한 경지가 맑고 깊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일개움을 받았고, 그가 머무는 곳에는 적지않은 신도들이 따랐다는 것이다.
그가 해인사 백련암의 찬운방장에 자리잡은 그 이듬해 즉 숙종 14년(戊辰 1688)의 8월 어느날, 그는 제자들에게 염불하라고 권하고 간곡히 당부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 새벽에 시자를 불러 잘 있으라는 이별을 고하고는 서쪽을 향해 앉아 자는듯이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7일후에 그 절의 동족에서 다비(茶毘)하였는데 많은 사리가 나왔으므로 그의 생전에 인연이 깊었던 절들에 사리탑과 정골(頂骨)탑을 세웠다.
그가 가장 좋아하여 최후를 마칠 곳으로 택하였던 가야산으 찬운방장에서 바위를 상대하여 정좌하다가 입적한 그에 대하여 「幻的堂大師行狀」을 썼던 풍계 명찰(楓溪 明察)은 「西山스님의 전한 법을 鞭羊스님이 얻고, 편양스님의 心印을 얻은 이는 곧 (幻寂 義天)이다」라고 하였다. 明察은 환적당 의천대사의 동문 버형제인 풍담 의심(楓潭 義諶)선사의 제자이다. 의심 선사는 서산대사의 법손(法孫)으로 편양대사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