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찌 열반을 다시 찾으리

선심 시심(禪心 詩心)

2009-07-10     관리자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할 뿐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문화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의 사상 역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규정을 통한 사고(思考)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자연에 대한 인식그것이 곧 문화란 말도 있지만 사실 일체의 인간의 과학문명조차 인간의 자연 정복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기보다, 자연 속에서 자연법칙에 따라 인간이 거기에 순응한 결과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인간은 지구상에 생을 영위해 온 이래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온갖 문화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 이 자연을 보는 동서양의 관점은 다르다 즉 서양의 자연관은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고 자연과의 투쟁, 나아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는 자연과의 조화일치, 즉 내가 곧 자연이요, 자연이 곧 나라 하여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큰 의미의 주관 속에 포함시킨다.
  동양 사상의 하나인 불교의 자연관 역시 마찬가지다. 불교 최고의 경지인 깨달음의 바탕에서 보면 모든 차별과 막힘과 얽매임이 없다.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현상과 본체가 따로 없다. 진속일여(眞俗一如)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삼라만상은 진여일심(眞如一心)의 나타남이기에 객관적 대상이 아닌 나와 동일체다. 자연은 곧 불법의 나타남이며 자아의 무한한 전개 그 자체다.
  자연은 바로 나의 전체요, 나은 또한 자연 그 자체다ㅣ 나는 자연과 대립되지 않으며 일체가 되어 순화된 경지로 승화되어 있다.
  국화꽃 푸른 대 남의 것 아니요
  밝은 달 밝은 바람 진(塵)의 아니다.
  세상 만물 모든 것 다 내 것이니
  손 내어 집히는 대로 가져다 쓴다.

  黃化翠竹非他物
  明月淸風不是塵
  頭頭盡是吾家物
  信乎拈來用得親

  푸른 눈으로 푸른 산을 대하노니
  티끌 하나 그 사이에 낄 수 없어라
  맑음이 저절로 뼈에 사무치거나
  그 어찌 열반을 다시 찾으리.

  碧眼對靑山
  塵不容其間
  自然淸到骨
  何更覓泥恒

  앞의 시는 고려시대 백운선사(白雲禪師) 경한(景閑)의 연작시 ‘거산(居山)’중의 하나이고 뒤의 것은 역시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선당시중(禪當示衆)’ 이란 시다. 두 시 모두 주객이 합일되어 나와 대상이 하나로 되어 있는 깨달음의 경지를 시화하고 있다. 앞의 시는 국화, 대나무, 달, 바람 등이 주객일여의 상태에서 나와 하나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뒤의 시는 청산과 나 사이에 티끌 하나 낄 수 없다 하여 역시 물아일체의 선관(禪觀)을 말하고 있다. 앞의 시 중 둘째 줄의 “진(塵)”은 주체에 대한 객체, 즉 일체의 대상을 말한다.
  이러한 물아일치의 시적 경지는 단순한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고 범신론적(汎神論的) 입장도 아니며 대상에 대한 자연예찬은 더욱 아니다. 치열한 정신적 수도를 통해 이룩한 사변(思辯)과 분별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의 존재의 파악이며 우주적 자아의 정립이라 할 수 있다.
  선적인 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시인 조지훈(趙芝薰)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유교 문인들의 시를 대하다가 유심현묘한 선시를 대하면 가슴이 뚫린 듯 시원하고 이가 시리다.’고 말한 일이 있다. 사실 선승들의 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은 화조월석(花朝月夕)에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조선조 유교적 문인들의 자연 취향의 시들과 한자리에 놓고 볼 수는 없다. 전자가 자연관조(自然觀照)를 통하여 선적자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면 후자는 현실 도피적 운둔 속에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하여 그 아름다움만을 예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