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의 중심사상과 내용

지상강단 11

2009-06-22     관리자

 4 시랑증개(侍郞曾開) 거사의 편지

 서장에 등장하는 42명이 문법(問法)하는 편지 중에 오직 두 사람의 편지만이 실려 있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의 편지에 답한 여러 차례의 편지이다.

 두 사람의 문서(文書) 를 특별히 소개한 것은 증개거사의 경우는 공부하려고 신심을 내어 열심히 노력하나 마음처럼 제대로 순숙되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낸 편지이고 이참정(李參政)은 착실히 공부하여 스스로 사무친 곳이 있어 경쾌한 마음으로 (한번 웃었노라고 표현하고 있다)스승에게 쓴 편지이다. 시랑(侍郞)이라 하면 지금의 각부 차관급이며, 참정(參政)은 송(宋)시대에 재상 다음 가는 벼슬이다.

 먼저 증개거사의 편지를 보게 되는데 여러 가지 편의상 원문은 생략하고 번역하여 요점만 소개한다.

『제가 원오(圓悟 )노스님을 통하여 스님(大慧)은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고 늘 스님의 가르침 받기를 경앙(景仰)하여 온지 8년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발심해서 공부할 뜻을 세웠으나 세간의 여러 가지 인연에 휩싸여 제대로 공부도 못한 채 늙음에 이르렀으니 항상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이제 겨우 세간사를 벗어놓고 큰 뜻을 세워 완전히 쉴 수 있는 땅에 이르고자 입지발원(立志發願)함은 크오나 역량이 부족하고 둔하기 그지없으니 어찌 하오리까.

 일생의 허물을 낱낱이 말씀드렸으니 더 이상 다른 길에 빠지지 않고 바로 견성(見性)할 수 있는 길을 지시하소서, 지극히 비노이다.』

 그에 대한 답장은 스님의 나이 46세 때 쓴 것으로,

『시작도 알 수 없는 오랜 세월부터 반야의 씨알을 훈습해 온 슬기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이와 같은 발심을 할 수 있었으랴.

 과거(科擧)를 보고, 혼인(婚姻)을 하는 갖가지 세간일은 성현(聖賢)들도 당연히 있었던 일, 그것이 병이 되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허환(虛幻)한 것이라 최상의 법이 아닌 줄을 철저히 안다면 반야의 물로써 구렴(垢染)의 때를 씻고 청정히 주(住)하여 발 딛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어 다시는 과거의 그릇된 생활을 계속하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원래 과거의 생각을 일으킬 것도 일으킬 자도 없는 것이 본성이라 하였으나, 우리들의 현실이 엄연히 둘로 갈라져 있다. 씻는 반야수(般若水), 씻어버려야 할 더러움, 보이는 대상, 보고자 하는 나, 이렇게 생각이 두 조각 난 이상 끝내 하나의 진실(一眞)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누누이 허환한줄 알면 일체가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림자에 매달려 죄가 되었다느니, 둔하다, 힘이 부족하다고 걱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지름길임을 지시한다.

 그러나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견고한 신심과 커다란 원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화엄경중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기나긴 세월을, 멀고 먼 길에, 여럿의 선지식을 참례하며 법을 성취했던 위대한 구법행각이야말로 철석같은 신심(信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만대의 모든 수행인에게 아름다운 모범이 될 것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신심이라 함은 일체 희유공덕의 근원이며 생활의 성실성임을 밝혀둔다. 또 편지에,

『근세에 마강법약(魔强法弱)해서 분별망식으로써 구경법(究竟法)을 삼는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계교(計較)로써 맞추려고 하는 것도 식정(識情)이고, 세상에 천류 하는 것도 식정이며, 죽음에 임박하여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역시 식정이니, 현재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병인 줄 알지 못하고 다만 분별 속에서 헤맨다.

 이러한 상황을 경전에서는「식(識)을 따라 행하고 지혜(智慧)을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 하거니와 따지고 보면 이것이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어둠속에 덮어버린 것이다.

 만약 한때라도 이 식정을 놓아버리면 식정이 곧 진공묘유(眞空妙有 )한 우리의 본래 성품이니 식정을 버리고 별다른 지혜를 구하지 말라. 그것은 마치 파도를 여의고 물이 존재할 수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진공묘유한 우리의 본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허공에 갖가지 건물이 건립되어도 방해되지 않듯이 우리의 본성은 생사에 윤회하며 식정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공처럼 언제나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 사무치게 믿고 스스로 볼 줄〈見性〉안다면 이 사람은 자유인이다. 비로소 조주 방하착(趙州防下着) 운문 수미산(雲門須彌山)을 해결 할 수 있으려니와 만일 믿지 못한다면 수미산을 짊어지고 도처마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것이 좋겠다. 한 번 웃노라.』

 어느 때는 술에 취하여 욕설을 하고 꾸짖더니 어느 때는 부처님께 공손히 향을 사루고 절을 한다. 이것은 결코 두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하나의 성품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의 분별을 연출해 낸다. 한 사람의 배우가 여럿의 배역을 잘해내는 것처럼. 그 본체는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은 채 항상 신령스러운 빛을 발(發)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먼 곳으로 그 빛을 찾아 길을 떠날 필요는 없다.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고, 다만 그것이 실증(實證)되어 훈훈한 기운으로 스며 나올 때 나의 바른 생각〈正見〉, 바른 말〈正語〉, 나의 바른행〈正業〉이 자연히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조주「방하착」도 운문「수미산」의 문제도 일시에 해결된다.

 어느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한 때가 어떠합니까?』

『놓아 버려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 했사온데 무엇을 놓아 버립니까?』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거라.』

 또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묻는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한 때가 어떻습니까?』

 운무스님 말씀이『허물이 수미산만 하구나.』

 이와 같은 스승과 제자의 동문서답식 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이란「수미산」·「방하착」하고 토해내는 말머리(話頭)를 참구하는 것을 뜻한다.

 증개거사에게 보낸 편지가 여섯 차례나 되지만 내용은 간략히 위에 소개한 바와 같다. 다음은 이참정의 편지를 개봉해 본다.

『제가 조실스님 방을 두드리사와 기어코 어리석고 막혔던 것이 터져 시원히 살필 줄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평생에 짊어지고 다니던 학해(學解)덩어리는 다 정식(情識)에 뭉쳐 있던 것으로 떨어진 솜옷을 입고 가시덩굴 속에 들어가듯 너절하고 무거웠으나 이제 한 번 웃음에 이렇듯 후련합니다.

 대종장의 상세하고 자비로우신 가르침이 아니었던들 이와 같은 다행과 기쁨을 상상이나 했으리까! 이제 집에 돌아와 밥 먹고, 차(茶) 마시며, 손자를 안아주고 여느 때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여도 한 곳에도 집착됨이 없고, 그렇다고 기특(奇特)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며, 옛적부터 익혔던 악습도 점점 가벼워집니다.

 헤어질 때 일러주신 간절한 말씀은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거듭 청하옵건대 끝까지 이끌어 주시어 구경(究竟)처에 이르게 하여 주시면 스님의 법석을 누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참정거사의 편지를 읽노라면 견성한 것(한 번 웃음)이 마치 스승의 힘에 의하여 된 것 처럼 표현 되었으나 그것은 문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러 말을 동원하여 설명하는 것 보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물이 한 그릇 있을 때 그 물맛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방법을… 결국 참정거사는 스스로 그 물을 마셔본 후의 물맛을 표현했을 뿐이다.

 헤어질 때 일러주신 말씀은『이즉돈오 승오병소 사비돈제 인차제진(理卽頓悟 乘悟並消 事非頓除 因次第盡)』이다.

 이론으로는 몰록 다 알지만 그 알고 있는 이론대로 실천해야 되며 현실적으로 한꺼번에 번뇌가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다하는 것이니 평소에 익혔던 버릇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 그 일을 계속 함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익어가는 것이라고 일러주신 것이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얼마나 단적으로 표현한 교훈인가. 그렇다. 수행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이치대로 점차 버릇을 고쳐가는 행위인 것이다, 보다 좋은 쪽으로 길들여 가는 것이다.〈계속〉【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