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심어준 산사(山寺)
신앙수상(信仰隨想)
청년불교운동을 벌리겠다던, 그러나 이렇다 할 실속도 없이 요즘 말로「폼만 잡았던」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물정도 몰랐던 그때가 그랬기 때문에 더욱 애틋하고 순수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수한 체험은 오늘날 나에게 확실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했던「모티브」가 되었다.
쌍계사(雙磎寺)는 지리산 동남쪽에 자리잡은 신라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한 도량(道場)으로 6조 혜능조사(慧能祖師)의 진골사리(眞骨舍利)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사찰의 개산조(開山祖)라든가 골동적(骨董的), 혹은 사적(史的)인 관찰보다는 젊음에 어필해오는 산의 양감(量感)에 더 들떠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나는 법당에 들어가 예배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간단히 산 구경이나 할 셈으로 법당 뒷산을 타고 올라갔다. 법당 뒤의 나지막한 산을 오르고 나니 그 위에 또 하나의 산이 얹혀져 있었다. 나는 그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때는 5월, 신록이 가져다주는 간지러움까지 겹쳐 나의 기쁨은 충만되어 있었다. 때로는 험준한 계곡을, 아슬아슬한 벼랑을 끼고 또 하나의 산을 정복하고 나면 그 위에 또 하나의 산봉우리가 손짓을 보내오고 있었다. 실눈으로 나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오라, 오라, 끝내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은 등산객들이 다녀갔다는 빨간 표지의 글씨를 읽으면서, 군데군데 공비들의 유적을 더듬으면서 등산로를 찾아 자꾸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발걸음이 천왕봉을 한걸음에 달려가버릴 것 같은 지점에 이르렀을 때 상공에 떠있던 태양이 갑자기 빨간 빛으로 물들어간 것을 보았다.
내가 지리산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산비탈로 내려서니 이건 뭐 완전한 원시림이었다. 나는 원시림 속에 여지없이 갇히고 말았다.
날씨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위틈에서 하루 밤을 지샐 각오까지도 해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 마음속으로 여전히 쌍계사로 내려가는 위치를 더듬고 있었다. 나는 바위틈에 앉아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조용히「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내가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고 있을 때였다. 어둠을 뚫고 한줄기의 파란 달빛이 새어들어 왔다. 그 달빛 속에 파랗게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이 보였다. 쭉 훑어 뿌린 듯한 나뭇잎은 숲 사이로 졸졸 줄을 잇고 있었다. (뒷날 알았지만 나뭇잎은 조리 장사들이 산죽(山竹)을 베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다.)
숲 속을 더듬어 내려오니 조그마한 사잇길이 나섰다. 나는 그 사잇길을 타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미친 듯이 뛰었다. 얼마를 뛰었을까 발 아래 빨간 불빛이 나타났다. 그 불빛은 산비탈에 세 가구가 모여 사는 화전민의 마을이었다.
쌍계사는 거기서도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했으며 이십 리가 넘는다고 했다. 나는 마을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들이 가르쳐 준 길로 냅다 뛰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계속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두어 시간 달렸더니 어느 틈에 나는 국사암(國師庵) 뒤에 와 있었다. 내가 국사암에서 큰절인 쌍계사로 돌아왔을 땐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큰절로 돌아와서야 그 캄캄한 밤에 그 험한 산속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예사롭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분명히 어떤 안내를 받고 온 것 같은, 그 안내자가 금방 내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착각이었다.
그때 그 안내자는 지금도 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