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무 관세음보살 !

테마가 있는 사찰 기행-해돋이가 아름다운 양양 오봉산 낙산사(洛山寺)

2007-03-02     관리자

잠시 도심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시대다. 스모그 현상까지 겹쳐 더욱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울에 짧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는데, 고속도로 진입부터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탐욕으로 불어터진 손길을 냉정히 뿌리치고 겨울바다를 향해 상큼한 질주를 시작한다. 원주, 횡성, 평창, 강릉 등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휴식을 가져다주는 강원의 지명들을 따라 양양 낙산사에 이르렀다.

폐허의 현장에서 다시 소생하는 관음성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다는 인도 남쪽 해안의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유래한 낙산사(洛山寺)는 강화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관음도량이다.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만일 중생이 온갖 고뇌를 받을 때에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즉시 그 목소리를 듣고 모두 해탈을 얻게 하느니라.”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상심하고 괴로운 일이 닥치면, 마음을 달래고 위로를 받기 위해 관세음보살의 따뜻한 품을 찾아 달려간다.
2005년 4월 4일, 한 등산객이 무심코 버린 담뱃불에 의해 고성과 양양 일대에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번지고, 식목일엔 낙산사마저 태워버렸다. 일주문, 원통보전, 원장, 홍예문 등 주요 전각과 동종이 소실되고, 7층석탑이 일부 손상되었다.

▲ 김홍도의 낙산사도
671년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했다는 낙산사가 화마에 휩싸인 것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786년 처음 화재로 소실된 이래, 잦은 산불과 임진왜란·한국전쟁을 거치며 10여 차례 타고 타고 또 탔다. 그러나 낙산사는 비운의 화재를 자연 순환의 섭리로 받아들일 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꿋꿋이 복원 재건되어 관음성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낙산사에 들어서자 아직도 곳곳에 불에 탄 흔적이 확연하다. 대형트럭과 굴삭기, 건축자재들이 먼저 눈에 띈다. 현재 낙산사는 가람복원에 필요한 고증자료 확보를 위한 발굴조사를 끝마치고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한겨울이지만 소생의 기운이 넘쳐난다. 지난 한 해 동안 홍련암 요사채인 연화당의 상량식 봉행을 비롯해, 공중사리탑 및 7층석탑 보수 처리공사, 해우소 중창 불사, 홍예문 누각, 동종 등을 복원했다. 또한 30년생 이상의 소나무 1,500여 그루를 옮겨 심는 등 본격적인 경내 조경에도 착수했으며, 2008년까지 김홍도의 낙산사도에 맞게끔 가람배치를 추진해 천년고찰의 면모를 되찾을 예정이다.

▲ 낙산사의 상징인 높이 16m의 거대한 해수관음상. 뒷쪽으로 멀리 설악산 봉우리가 보인다.
설악과 동해의 만남
낙산사의 중심법당인 원통보전 터에 이르니 참혹함이 이를 데 없다. 산불로 인해 완전 소멸된 데 이어, 지난 여름 태풍에 의해 담장마저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다만 부분적으로 파손된 7층석탑(보물 제499호)만이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땅을 고르는 굴삭기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원통보전을 감싸 안으며 울창한 푸른 숲을 이루었을 오봉산은 아름드리 소나무의 밑동만을 시커멓게 드러낸 채, 능선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한편 시야가 확 트여 북쪽으론 멀리 흰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설악산의 준령(峻嶺)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동쪽으론 해수관음상과 의상대 너머로 동해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경관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원통보전에서 오봉산을 가로질러 가면, 높이 16m의 거대한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 왼손에 감로수병을 들고 서있다. 무려 700톤의 화강암 석재가 사용된 이 순백(純白)의 불상은 착공 5년 만인 지난 1977년 점안했다. 바닷가 언덕 위에서 동해를 굽어보는 해수관음의 포근한 미소가 미끄러지듯 흘러내려와, 참배객들로 하여금 무한한 자비심을 느끼게 한다.
의상대를 향해 언덕을 내려가다 보면 좌측에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 우측에 보타전이 있다. 1683년 홍련암에서 개금불사를 거행할 때 공중에서 유리처럼 광채를 내는 영롱한 구슬이 떨어졌다. 이에 탑을 쌓고 그 구슬을 봉안했는데, 이 탑이 공중사리탑이다. 지난 4월 28일 산불로 손상된 석재를 보존하고, 동시에 오랫동안 기울어진 채 서있던 사리탑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해체 보수 작업을 하던 중 부처님 진신사리로 추정되는 사리를 발견하였다. 탑신석 상면 중앙의 원형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와 보자기, 금제합 등 사리장엄(탑 내에 봉안하는 사리용기와 함께 납입되는 각종 장엄구)이 발견되어, 현재 보타전에서 전시하고 있다.
의상대로 내려오니 육각정 바로 밑으로 망망대해에서 밀려오는 물결이 철썩이며 부서진다. 밑바닥까지 선명하게 비치는 청명한 바닷물에 잠시 혼탁한 마음을 비추어 씻어본다. 의상대는 의상 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산세를 살핀 곳으로서, 의상 대사의 좌선 수행처로 전한다.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 화재로 소실된 원통보전의 7층 석탑 앞에서 한 보살님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아, 나무 관세음보살!
어느덧 바닷가 천년의 산사에도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의상대 옆으로 홍련암(紅蓮庵) 가는 길에 목탁소리와 하루 작업을 마무리하는 굴삭기, 돌 다듬는 소리가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암절벽의 깎아지른 바위 틈 사이에 홍련암이 아득한 관세음보살의 이야기를 전하듯 불을 밝히고 있다.
홍련암에는 의상 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의상대사는 파랑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지극정성으로 7일기도를 했다. 마침내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세워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홍련암 마룻바닥에는 조그맣게 구멍이 뚫려 있어 파도가 들이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홍련암을 나서는데 한 무더기의 보살님들이 앞을 다투어 밀려든다. 다음날이 관음재일(매월 음력 24일)이었던 것이다. 관음재일 전날이면 전국에서 대형버스 10여 대를 나눠타고 낙산사에 와서 홍련암 철야기도에 동참한다고 한다. 법당에 자리를 잡지 못한 보살님들은 바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차디찬 바닷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기도에 여념이 없다. 아! 나무 관세음보살….

▲ 홍련암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서있는가  

다음 날 새벽 6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의상대로 나왔다. 낙산사 의상대는 우리나라에서 해돋이가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으로, 관동팔경의 제1경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이른바 강원도 양양 땅은 오를 양(襄), 해 양(陽)자를 써서, 일명 ‘해오름의 고장’이다. 의상대에서 홍련암 가는 길에 시조비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소설가 조정래 씨의 부친이신 철운 조종현 스님(시조시인)의 ‘의상대 해돋이’라는 시조다.

“천지 개벽이야!/눈이 번쩍 뜨인다./불덩이가 솟는구나./가슴이 용솟음친다./여보게,/저것 좀 보아!/후끈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날 가슴을 후끈 용솟음치게 만드는 천지 개벽의 불덩이를 볼 수는 없었다. 여명이 밝아오지만, 뿌옇게 흐린 하늘은 좀처럼 갤 줄 몰랐다. 해뜨는 시각인 7시 38분이 훨씬 지나도록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태양이 야속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서있는가’ ‘나는 무엇을 보려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조급한 마음을 미련없이 바다에 첨벙 던져버리고, 여전히 포근한 미소를 베풀어주는 해수관음상을 참배한 후 오봉산 정상에 올랐다. 잿더미를 딛고 불끈 생동하는 낙산사가 새삼 삶의 의욕을 충동한다. 그 때였다. 어두운 하늘이 열리더니, 붉은 기운이 잠깐 바다를 물들이고는 이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관세음보살이 낙산사에 늘 상주해 있듯이 태양도 늘 그 자리에서 빛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 마음이 어두워 관세음보살을 보지 못하고 태양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양양 오봉산 낙산사 033)672-2447~8, www.naksan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