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온 금산사였다”

템플스테이-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2007-01-08     관리자


이상기온으로 40여 일 동안 가뭄이 계속되고 때 아닌 모기떼만 극성이더니, 비를 뿌린 후 기다렸다는 듯이 하룻새 기온이 뚝 떨어졌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의 변화만큼이나 마음이 흔들린다. 마음에도 휴식이 필요한 계절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황금빛 들녘을 지나, 금산사에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인 홍예문(虹霓門)에 이르렀다. 그 이름이 무지개를 뜻하는 것처럼 둥근 아치형을 그리고 있다. 후백제 견훤왕 당시 돌로 쌓아 만들었다는 석문(石門)의 예스러운 모습은 마치 옛 정취를 흠뻑 느껴보라는 듯,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어서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다.
조계종 17교구본사 금산사는 모악산 서쪽 기슭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모악산은 계룡산만큼이나 각종 토착 종교의 산실이 되는 곳으로서, 금산(金山)과 모악(母岳)은 옛말 ‘큼뫼’, ‘엄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큼뫼는 ‘금이 많이 생산되는 산’이고 엄뫼는 ‘어머니 산’이라는 뜻이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처럼 모악산은 금산사를 품에 안고 있다.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 계단을 오르니 너른 마당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가슴마저 뻥 뚫리는 기분이다.
금산사 템플스테이는 참가자들이 한 번 입었던 수련복은 꼭 드라이클리닝을 할 정도로, 그 어느 사찰보다 운영이 잘 되고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높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내심 기대가 크다.

미래에 오실 부처님
템플스테이 진행을 맡고 있는 강만곤 사무처장의 안내를 받아, 지난밤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산사 체험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과 합류하여 점심 발우공양을 했다.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과 격식이 부담스러워 밥과 반찬을 조금만 덜어 먹었는데, 금산사 역시 맛 제일의 호남에 있는지라 숟가락 놓기가 아쉽다. 전주에서 온 외국인 원어민 교사 2명이 서툰 젓가락질로 옆 사람을 따라 공양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하다.
발우를 설거지하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서녘 하늘에 하얀 낮달이 걸려있어 낯선 그리움을 부른다.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오후 1시부터 구수한 사투리를 곁들인 홍수자 문화유산해설사의 정감있는 안내로 금산사 경내를 둘러보았다.
금산사는 미륵(彌勒)신앙 근본도량으로서, 백제 법왕 원년(599년)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혜덕왕사탑비(보물 제24호), 오층석탑(보물 제25호), 방등계단(보물 제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당간지주(보물 제28호), 석등(보물 제828호), 대장전, 적멸보궁 등 발길 닿는 곳마다 귀한 유물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국내 유일의 3층법당 양식으로 건립된 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미륵전의 내부는 3층이 하나로 통하여 있으며, 미륵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중앙의 미륵불상은 높이가 11.82미터, 좌우 협시보살상은 8.79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미륵부처님은 일체중생을 모두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다. 미륵부처님이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시는 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비와 평화를 기원하며 악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선업을 쌓아갈 때 그 날은 가까워질 것이다.
금산사에 미륵신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고 있듯,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 없이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추고 있는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의 사찰이다.

아기가 엄마 젖을 보채듯이
가을 한낮의 햇볕이 차츰 세력을 잃어갈 무렵, 산내암자인 심원암까지 호젓한 산길을 올랐다. ‘악(岳)’자가 들어가는 산인 만큼 오를수록 가파른 경사가 만만치 않다. 심원암에 도착해 아무 바위에나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숲 속 어디선가 기분 좋은 소슬바람이 불어와 자연스레 땀을 식혀준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홍빛 감을 주렁주렁 단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어, 한적한 암자에 운치를 더해준다. 외국인 통역 자원봉사를 맡고 있는 유병직 씨가 대나무 막대를 들고 감나무에 오르자, 참가자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까치발을 든 채 뚝뚝 따주는 감을 건네받는다. 산을 내려가는 참가자들의 손엔 힘든 산행의 전리품인 양 감이 하나씩 들려져 있다.
출출해진 배를 과일 간식으로 간단히 채우고, 요가를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예원 씨로부터 요가를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호흡에 맞춰 기본동작을 취하는 것에서부터 점점 고난도의 자세로 진행되었다. 수월하게 따라하는 여성 참가자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삐걱대던 몸이 나중에는 고통으로 아우성친다. 그래도 한 시간에 걸친 요가가 끝나고 나니, 한결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는 느낌이다.
저녁공양과 예불이 끝난 후, 서래선원에서 덕림 스님(금산사 포교국장)과의 화기애애한 만남이 있었다. 스님은 시종일관 넉넉한 웃음으로 참가자들을 대하며, 화두와 미륵불 등 불교에 관한 궁금증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답변을 해주신다.
스님은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하루에 10분만이라도 무념무상으로 명상을 해보십시오. 자신도 모르게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라며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마음공부를 강조하셨다.
밤 9시부터는 일원 스님(금산사 수련원장)을 모시고, 좌선이 이어졌다. “화두를 참구할 때는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아기가 엄마 젖을 보채듯이 간절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울린다. 참가자들은 스님의 죽비 소리에 맞춰 고요히 마음을 비춰본다.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새벽 3시, 도량석 소리가 산사를 깨운다. 새벽예불을 드리고, 다시 간밤의 좌선을 이어간다. 좌선을 끝내고도 산사는 어둠에 휩싸여있다. 산문 밖 홍예문까지 산책을 하니 어느덧 어둠과도 친숙해져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일까, 아침공양을 하고 잠깐의 휴식이 꿀맛 같다.
아침 7시 30분, 우진 스님(김제 흥복사 주지)으로부터 다도를 배웠다. 스님은 “차(茶)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것만 알면 된다.”시며, 다구를 다루고 차를 우려내는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스님을 따라 직접 우려낸 차를 서너 잔씩 마시고는, 서래선원 옆에 있는 야생차밭으로 갔다. 찻잎을 관찰하며, 수줍게 피어난 하얀 차꽃에 코를 갖다대니 은은한 향이 온몸을 간지럽힌다.
이어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절 한 배에 염주 한 알을 꿰며 108염주를 만들어보았다. 정성을 다해 108염주가 완성되자, 참가자들의 얼굴에 환희심이 일어난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자신이 만든 108염주를 볼 때면, 금산사에서의 소중한 체험이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이들은 남편에게 맡기고 홀로 참가했다는 임미경(43, 직장인) 씨는 “아이들 키우고 직장생활 하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제 삶에 정작 제 자신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작년부터 산사 체험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참가하게 되었어요. 바깥에서 볼 때는 절은 왠지 엄숙해보이고 스님은 어려운 분들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대하고 보니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아주 편안한 느낌입니다. 수행할 때 힘들면 힘든 대로, 휴식할 때 편안하면 편안한 대로 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금산사를 다녀와서 금산사 산사 체험 참가자들의 온라인 모임인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http://cafe.
daum.net/geumsansa)’에 들어가보니, 오래도록 잔잔한 여운을 주는 글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 금산사를 찾지 못한 이들이 있으면 너무 늦지 않게 가볼 일이다.

석가모니불을 붙들며/1배 1배 할 때마다/운명 같았던 가난과/일찍 잃어버린 어린 동생과/굳어버린 육신에 갇힌 내 어머님과/내 욕심에 맞추느라 무던히도 힘들었을 남편과/나의 아들로 딸로 와 준 고마운 아이들과/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업들이….


      너무 늦게 온 금산사였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그 절마당에 다시 그렇게 서 있고 싶다

     새벽 안개 자욱했던 방등계단

     그 마음 놓지 않으리라


                                            - 수덕화, ‘금산사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