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언저리 비구니 도량

선어유희[禪語游戱]4

2008-06-01     관리자


얼마 전에 불타버린 남대문을 중심으로 한 도성 안은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도 종각 근처에 신축한 오피스텔과 빌딩의 광고문은 ‘왕가의 명당’이란 문구가 절대로 빠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정작 본래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조차도 잊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중국 속담에 “함원전 앞에서 장안이 어디냐고 묻는다”고 했다. 남대문 앞에서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진짜 서울 토박이는 서울을 잘 모른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도리어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하긴 지방사람이 서울지리에 더 밝을 수밖에 없으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함원전은 당나라의 황궁인 장안성 대명궁에 있던 전각이었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에도 같은 이름의 건물이 경회루와 교태전 사이에 있었다. 조선 세조 12년에 지금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에서 백옥불상을 조성하였는데 함원전으로 맞아들여 점안법회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러고보면 함원전은 내불당 역할을 겸했던 것 같으니, 불교와 관계 깊은 궁궐 내 전각인 셈이다. 『벽암록』 50칙의 “함원전 앞에서 장안이 어디냐고 묻는다”는 말에서 보듯 다른 건물도 많았을 텐데 굳이 함원전을 인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조선 땅에서는 우연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선재선재라. 옳고도 옳도다.
얼마 전에 사대문 바깥 언저리의 비구니 도량 네 곳 [문헌에서는 이를 묶어서 ‘사니사四尼寺’라고 기록했다]을 둘러보게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역사적인 고찰들이, 그것도 왕실의 안주인과 후궁 내지는 상궁들과 인연이 깊은 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경이로움이었다. 서울에서 오래 산 불자라고 할지라도 이 절들을 모두 참배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멀리 있는 4대 적멸보궁이나 3대 관음성지가 훨씬 더 가깝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사니사는 옥수동의 ‘두무개 승방(현 미타사)’,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현 청량사)’, 숭인동의 ‘새절 승방(현 청룡사)’, 보문동의 ‘탑골 승방(현 보문사와 미타사)’이 그것이다. 현재의 청량리 청량사 안내현판에는 청량사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곳까지 함께 열거하는 넓은 아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문 밖 비구니 도량은 왕을 여의거나 나이가 찬 후궁들이 마음 둘 곳이 없어 방황할 때, 그 문을 활짝 열어 그녀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준 곳이기도 했다. 내세의 자신에 대한 기복과 왕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어우러진 그런 기도처였다. 공통점은 먼지 한 점 없이 정갈하다는 것과 같은 영역에 살면서도 각 전각마다 살림을 따로 한다는 것(정화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찰 살림살이가 이렇게 이루어졌다)과 모두가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산 위까지 올라간 아파트촌 사이에서 기도와 수행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긴 세월 동안 무던히도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읽혀진다.
청룡사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 갈 때 정순왕후 송씨와 우화루에서 마지막 이별을 한 곳이라고 한다. 이후 희안, 지심, 계지 세 시녀들과(이름이 법명인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모두가 비구였을 것이다) 함께 살면서 64년 동안 왕의 명복을 빈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왕이 승하하면 후궁들이 궁궐을 떠나 선왕의 명복을 빌며 죽을 때까지 기거하던 곳이었다는 정업원(淨業院)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업을 맑히는 곳’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그녀들은 늘 내세를 기약했다. 나머지 세 군데 절도 거의가 중창 중건주가 왕실의 여인네들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비구니로 출가하여 살았다는 기록도 함께 전한다. 모두가 도심사찰로는 그 규모가 만만찮다.
유주(幽州) 땅의 담공(譚空) 선사는 개당(開堂)하려는 비구니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대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니 개당치 말라.” 그러자 비구니가 말했다. “용녀의 성불에도 다섯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까?”
동산양개 선사의 회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통 큰 비구니가 선방 앞에 와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몽땅 내 자식들이로다.”
보문사는 이미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 보문종으로 독립하여 개당했고, 담장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져 있는 미타사는 현재 조계종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당당한 비구니들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도심 가운데 있으면서도 네 곳의 비구니 절은 한낮인데도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당나라 때 왕창령(王昌齡, 698~756)은 ‘제승방(題僧房)’이라는 선시를 통해 이런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고 있다.

종려화만원(棕櫚花滿院) _ _ _ _ 종려나무 꽃은 담장 안에 가득 피어있고
태소입한방(苔蘇入閑房) _ _ _ _ 돌이끼는 한갓진 방안으로 들어올 듯하네.
피차명언절(彼此名言絶) _ _ _ _ 피차가 서로 말이 없어 더욱 고요하니
공중문이향(空中聞異香) _ _ _ _ 허공에는 천상세계의 향내음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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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_ 해인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 실상사 화엄학림, 동국대(경주)에서 경전과 선어록을 강의했다. 월간 「해인」 편집장과 조계종총무원 신도국장·기획국장을 거쳐 현재 재정국장 소임을 맡고 있다. 번역서에는 『선림승보전』 상·하(장경각 간)가 있다. 불교계의 여러 매체와 일간지 등에 깊이와 대중성을 함께 갖춘 글을 연재함으로써, ‘내공이 만만찮은 필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