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來 佛敎講院의 敎材와 그 內容
지상강단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됨으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 불교의 승가교육에 있어 어떠한 제도와 교재에 의해서 교육되어져 왔는지? 이를 현재의 승가교육에 계승 발전시켜 기본이 되고 참고가 되고자 이 글을 적는다.
ꊱ 머리말
신라시대에는 오늘과 같은 강원 또는 학교 교육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기 단위 사찰에서 그 산문(山門)의 종풍(宗風)에 따라 교육하여 왔음을 오교 구산(五敎 九山)등의 가풍에 의해서 알 수가 있다. 신라 불교 특히 통일이후의 교세는 국교나 다름없었으므로 교육, 포교, 수행 등 다방면에 걸쳐 눈부신 활약이 있는 의식, 천도법요 포교의식 및 기타 사회활동의 준칙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국외(國外)의 자료로서 그것도 중국에 있었던 교포사원의 제도를 그곳을 순례하면서 적은 기행문중에 일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밖에는 없다.
그 기행문은 일본의 원인(圓仁)스님이 839년 구법차 당나라에 건너가서 등주 문등현 청영향 적산 법화원(登州 文登縣 淸寧鄕 赤山 法華院)이라는 신라원에 있으면서, 그 곳에서 행하는 법요의식을 적은 일기가 원인의 「입당구법 순례기」에 실려 있다. 그는 당나라로 가는 일본 사신의 배를 타고 839년 3월 24일 당나라 초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4월 26일 난산서포(亂山西浦)에서 기마(騎馬)하는 신라 사람 30여명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그들과 함께 신라 교포가 배를 타고 6월 7일 적산 동쪽에 정박하여 청영향 법화원으로 가게 되었다.
이 법화원은 신라의 작군 장보고(張保皐 : ?~846)가 당나라에 있는 교포를 위해 세운 사원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이 절에 머물면서 그 곳 월동 준비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밭에 나가 김장을 꺼리인 무우, 배추 등을 걷어 들여 대중 운력으로 다듬어 김장을 담그며 부엌에 연료가 없으면 대중스님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산에 올라가 땔감을 재취해서 운반하더라고 한다.
ꊲ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의 설법의식
839년 11월 16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 약 두 달 동안 강경하는 기간을 설정하고, 법화경을 강설하되, 성림화상(聖琳和尙)이 법주가 되고, 돈증과 성적스님이 논의가 되어 사부대중을 상대로 주간에는 경을 설하고, 야간에는 예참을 행하되, 조석의 예경의식만은 중국식으로 행하고, 그 밖의 강설과 예참 등은 모두 신라의 풍속에 의거하여 또한 신라의 어음(語音)으로써 행하는데 그 자리에 모인 불자들 중 일본 사람 넷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호사수구(狐死首丘)의 망향의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ꊳ 적산원(赤山院)의 신라식 강경의식(新羅式 講經儀式)
오전 8시에 강경을 위한 운집종을 쳐서 대중을 운집한 다음, 간주 스님이 법상에 오르면 대중들은 동음(同音)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데, 그 음곡(音曲)이 완전 신라의 방식에 의지하더라도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장율사가 당시 국통이 되어 승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스님을 한 자리에 모아 총시(總試)를 실시하였으며, 원광법사는 가실사에서 승가교육을 하였고, 원효스님도 화엄경을 가리켜 교단의 인재를 양성하였음을 제소강잡화(製疏講雜華)란 말로써 알 수 있으며, 의상조사는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3천명의 제자를 모아 90일간 화엄경을 강설한 것 등은 모두 승가교육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송고승전 의상전에 의하면 강수(講樹)에 꽃이 피고, 담총(談叢)에 열매를 맺어 그의 문하에 지통, 표훈, 법체, 도신 등 많은 대덕이 배출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고려불교의 교육기관도 별설기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찰마다 운영실적과 책임자의 의지에 따라 교육하였으며, 실수인 참선에 있어서의 특정기간을 설정하여 결사하기도 했다. 예컨대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와, 요세의 백련결사 등 수선사가 그것이다. 그리고 염불종에 있어서의 건봉사의 만일회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조에 접어들어서는 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선수에 있어서는 저마다 산간에서 독자적 수행이 가능하였지만, 교리연구에 대해서는 교육의 기관, 교재의 편성, 강사의 충원 등 많은 조건이 수반ㄷ괴는 것이므로 승가교육의 교육기관은 유명무실한 상태를 계속하다가 확실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야운비구의 「자경문」, 보조의 「계초심학인문」, 원효의 「발심수행장」등이 초보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점차적으로 치문경훈(緇門警訓), 서장(書狀), 절요(節要), 도서(都序), 선요(禪要), 금강경, 능엄경, 염송 등 11개 과목이 고려의 말기부터 선종사원에서도 독습과목으로 편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11개 과목이 반드시 전후의 차서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벽송(智儼 : 1464~1534)스님은 도서와 절요로써 학인의 여실(如實)한 지견(知見)을 세우게 한 다음, 선요와 서장으로써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하고, 향상의 활로(活路)를 열어주는 사교입선의 지도이념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1534년 수국암에 제자를 모아놓고 법화경을 강성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제법의 적멸상은 말로 선설할 수 없다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서 열반에 드시었다.
이 당시에는 각 종파들이 자기 종파의 소의경전에 의하여 종지를 펴기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화엄, 법화 등경을 강설한 것이 아마 벽송스님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서산대사의 4세 법손인 월담(1632~1704)화상 당시에는 이미 천태, 화엄 등 많은 종파가 통폐합 되고, 명목상으로는 선, 교 양종이 남아 있다지만, 실은 태고보우의 법맥인 선종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어서 선 교종의 인칭을 합하여 부종수교(扶宗樹敎)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내경, 네경을 구태어 구별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선종의 스님들도 화엄, 법화 등 교종에서 숭상하는 경전을 기한 없이 강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월담스님이 대회(大會)를 개설할 때 강원교재의 이력과정이 정연하게 조직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는 이미 화엄종의 성전이던 화엄경과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과 그리고 원효의 발심수행장이 선종의 학과 중에 편입되어 초심, 발심, 자경, 지문 등 사미과와 서장, 도서, 선요, 절요 등 4집(四集)을 독습하고 다음 능엄, 법화, 금강, 원각경 등 4교를 연구하였으며 이어 화엄경과 염송 등의 순으로 엮어져 있었는데 얼마 후 4교중 법화경을 제외하고 그 대신 기신론을 넣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현재의 제방강원 교재의 골격이 월담스님 때, 편제되었는데, 그 많은 대장경 중 강원교재로 뽑힌 경들이 가장 핵심이 된다고 확언할 수가 있다. 사미, 사집, 사교, 대교, 수의과 등 많은 교재 중에 담고 있는 그 심오한 사상을 한정된 지면에 일일이 서술할 수는 없고, 다만 원효스님이 불자들의 일상생활과 수행의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을 소개해 본다.
진실한 불자가 되는 길은 자리이타의 구현과, 행동의 실천, 지혜의 완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는 지혜와, 실천적 행동을 갖춘 사람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그의 생활에 있어 용기와 보람을 느끼면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불자로서의 걸어야할 길은 자신을 돕는 근면한 노력과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에 대해 자비의 연민을 보내는 희생정신이 있어야할 것이다. 그 희생정신이란 남에게 베푸는 보시에는 물질적 보시, 정신적 위로 등이 있다. 무엇을 받기보다 주는 정신과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과 같이 열길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혜가 결여된 사람은 마치 어둠 속에서 바늘을 찾으려는 것과 같아서 헛된 수고만 하게 될 것이고, 실천이 없는 공론은 열매를 맺지 않는 꽃과 같아서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이므로 우리는 마음의 등불과 지혜의 칼날을 부처님의 말씀 중에서 찾아 자기의 생활을 바르고 윤택하도록 영위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