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과 보람
보리수 그늘
믿음이란 본래 믿고 싶어서 믿는다는 것보다는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로 나의 믿음이란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없다. 오로지 흐르는 물의 이야기를 듣고 열리는 꽃의 언어를 듣는 그런 곳에 나의 참 믿음이 있다고 할까.
촛불을 밝히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기도 드리던 그 시절이 지나서 절할 곳도 생각할 곳도 없으면서 살아움직이는 거기에서 한가로이 시연을 운용하며 닫는 곳마다 여래와 상친하고 중생과 화동하며 파안 미소를 전하며 이러이 사는 그런 곳에 나의 참믿음이 있다고 할까!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면서 애써 찾아 헤매고 한번도 뵈온 일도 없는데 무한히 우러러 사모하며, 무엇하나 받은 것도 없는데 가슴깊이 은혜를 새기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러한 곳에 나의 참믿음이 있다고 할까.
하여튼 분명히 손에 잡을 수는 없지만 우주에 가득 찬 나의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나의 존재는 인정되고 나의 생애가 있는지 모른다.
시원스러이 한번 웃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 후에 다시 조용히 문을 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신을 알게 되고 꿈같은 현실이 아니기에 또 다시 쉬지 않고 정진하는 그런 자신을 사랑하며, 걸음마 중생을 애모하고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현실과 이상을 공유하며, 이렇게 사는 자신을 믿고 오늘을 사는 것이 나의 믿음의 전부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뜰앞에 아스파라잎 푸른 사연도, 범종의 타성도 귓전에 머물지 않는 시절이고 보면 무슨 말이 또 필요있겠는가.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으면서 그 존재를 모른다. 인간의 소명이 무엇이며 살려는 희망은 또 무엇인가.
인간은 주어진 업의 소명으로 태어났고 생명의 영원한 축복 자체가 희망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주어진 업연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복을 찾아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끝없는 항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존재된 현실을 사는 지혜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찌기 불법에서는 인간은 막히고 트임에 있어 그 삶의 차원이 다르고, 얼마나 신선하고 멋지게 사느냐 하는데 존재된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생각 한번 바꾸어 놓고 분수대로 살며 바른 눈 크게 뜨고 후회없이 살면 되는 것이다. 밥 한 그릇 잘 먹고 능력껏 노력하고 주고 받는 이익에 타산이 없다면 보현보살행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스님. 마산중앙포교당 정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