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창간 2주년] 선禪과 정신분석精神分析
불광창간 2주년기념 강연(요지)
1. 내가 선을 만나기까지
내가 교육을 받던 시절에 한국사람들은 한국의 것은 모두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말하여 왔고 내가 의학 공부 하는 데도 서양에서 발단한 공부를 배우는 관계로 동양의 것은 모두가 볼 것 없다는 식의 환경에서 지내 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리가 없어 보였다. 우리나라 역사가 반만년이요, 동양의 역사가 또한 장구하다. 그런데 그 역사속에 무가치한 것만이 담겨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결국 동양의 정신과 문화는 심원한 것이고 다만 현대의 서양식인 정돈과 표현법으로 이것을 번역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 것이 당시의 결론이었다. 이런 생각은 내가 정신의학에 치중하면서 사뭇 새로운 것을 알기 시작했다.그것은 동양의 정신문화는 서양을 멀리 앞섰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서양의 정신치료는 정신분석이 최고다. 나도 이것을 공부하였지만 동양에는 없는 것일까? 의심해 왔었는데 한 번은 동국역경위원으로 계신 분이 입원하여 내가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이 대혜선사의 서장(書狀)을 읽으면서 나에게 물어왔다. 그가 묻는 것을 자세히 듣고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정신치료였다. 불교의 핵심은 집착을 없에는 것이란 것을 알았다. 서양의 정신분석은 근래에 그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국의 목사 「알란 .워쓰」는 말하기를 「동양의 종교는 서양의 종교도, 철학도, 아닌 정신치료다.」하였는데 정말 불교의 서장을 대해 보니 이것이 바로 정신치료법을 말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이행원스님 김월운 · 이지관 등 여러분과 만나 조사어록도 이야기하고 참선도 하였으며, 탄허스님을 만나 여러 가지를 배웠다. 불교의 기신론 · 능엄경 · 보조법어 · 영가집 등 여러 경론을 살핀 바로는 분명히 불교의 정신치료법은 서양보다 훨씬 깊고 역사가 사뭇 긴 것을 알게 되었다. 서양의 정신분석학은 20세기에 성립하였지만 동양의 도는 벌써 2천5백년 전 부터 열려 있던 것이었다.
2. 禪과 정신분석의 비교
신과 정신분석에 대하여 잠깐 비교하면서 말해 보자. 선은 불심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번뇌가 없고 때묻지 아니한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여 만인이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깨달을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서양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초기에는 그렇지 아니 하였으나, 근자에 와서는 「자기실현을 촉구하는 것」이라 하며 「진정한 자기에 돌아가는 것」이라 하며 「잠재적 자기를 현실화 하는 것」이라 말한다. 탁월한 정신의학자 「융」은 정신분석은 「남이 아니고 자기가 되는 것」이라 말하였다. 불교에서는 범부를 중생이라 하는 것은, 자기본성을 잃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다소간에 노이로제 상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의사도 그러하다. 자기가 참 자기를 다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인간본성을 다 드러낸다든가 자기 보배를 자신에게서 구한다는 말은 결국 노이로제 현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이루실 때 바깥의 경계를 취하지 아니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어 봄으로써 도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투사라고 말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밖에서 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욕하고 있을 때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그것을 누르고 있으면 상대방 사람이 무서워 진다. 상대방 사람이 그를 해치려고 하는 마음이 없건만 그 친구가 적개심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투사다. 또 가족이 외출하여 늦게 돌아 와서 미운 감정이 나 있을 때, 이 것은 나타내지 못 하고 눌러서 의식을 못할 때 밖에 나간 사람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라도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사랑하니까 미워하고 미워하니까 불길한 생각이 나는 것인데 이것이 투사다.
불교에서는 중생세계를 착각에서 나타나는 경계라 한다. 그래서 착각심이 없어져 참된 자기를 돌이켜 비춰 보면, 자타가 그대로 명료하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중생세계가 인간이 자성을 잃은 착각경계라 하는 점에서 정신분석과 공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서장에서 대혜스님은 마음의 애응지물(碍凝之物)을 제거하면 이것이 곧 각이라 하였는데 애응지물이란 시람 마음속에 엉켜서 장애가 되고 있는 물건이란 뜻인니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콤프렉스를 말한다.이 콤프렉스를 없애는 것은 집착을 없앤다는 뜻이며 집착을 없애면 이것이 바로 도가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정신이 건강하려면 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거은 마음의 콤프렉스를 없앤다는 말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을 없애라. 이것이 불도로 가는 길이다.」라고도 말할수 있는 것이다.
기분이 나쁜 일이 있늘때 그 원인을 없애는 것이 콤프렉스를 제거하는 것이다. 삼조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말하기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하리라」하였는데 이말은 정신분석학에서도 같은 말을 하게 된다. 걸림 없는 경지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정신분석을 하다보면 환자는 칭찬받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은 생각이 왕성함을 보게 되고 그런만큼 사랑받지 못하면 적개심이 생기고 적개심이 생기면 불안하고 이것을 누르면 죄악감이 생기고 자학감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니 노이로제는 이렇게 해서 진전된다. 사랑받고 싶은데 원하는 만치 사랑받지 못하고 미운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며 억누르고 더 미운 감정이 생기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노이로제는 사랑과 미운의 윤회적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정신분석으로 이것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3. 노이로제 치료의 원리
정신분석학에서 어떻게 건강회복을 하게 하는가. 환자가 건겅회복을 하자면 정신분석 의사는 다섯가지 장애를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환자의 마음속에 엉켜있는 애응지물 즉 콤프렉스를 알아야 하는데 한자의 일거수 일투족 이르기까지 모든 동작과 표정을 지배하는 핵심 또는 동기를 이해하고 파악하여야 한다. 둘째는 환자로 하여금 모든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여야 한다. 세째로 의사는 환자가 부모형제 관계와의 감정이나 환경에서 느낀 감정을 의사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신치료를 하다 보면 환자는 의사가 몸만 움직여도 화를 내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부모 등 가족관계에 대한 감정을 의사에게 무의식 중에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을 전이(轉移)라고 한다. 의사는 그것을 먼저 파악하여야 한다.
즉 전이감정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환자로 하여금 의사에게 비현실적인 부모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각(覺)이 근본인 것이다. 다섯째 장애물은 과거는 감정이 났을 때 그것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니 이것을 깨달았으면 깨달은 바를 망각하지 말고 의식과 협력하여 녹여야 한다.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마치 선에서 깨달은 마음에 보림을 하는 거와 흡사하다. 불교에서 돈오점수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 만으로는 안되고 깨닫기 전의 오랜 동안의 잘못된 환경에서 비뚤린 습기를 제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간이 걸린다. 이것이 정신분석치료의 과정이다.
절에 가면 십우도가 있는데 정신분석 치료과정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검은 소가 흰소가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있어 가깝고 고마움을 느껴야 할 사람에게 어떤 사정으로 미움을 갖게될 때 그 미워하는 데서 오는 적개심은 눌러 버린다. 이것이 노이로제다. 그런데 정신분석 치료에서는 이런 억눌린 감정을 그대로 다 내놓도록 한다. 정신치료에 있어서 적개심이 터져 나온다는 것은 이것이 치료가 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어머니를 칭찬하는 얌전한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치료를 하다보니 어머니에게 감정이 있어 보였다. 그러다가 그 감정은 어머니를 죽이고 싶은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180도의 전환이다. 선에서 말하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데 이른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풀어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어머니에게 좋은 감정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360도의 전환이다. 본래 제자리에 돌아온 것이니 산이 산이요 물이 물인 것이다.
노이로제에 있어서 완전한 것을 보지 못하고 콤프렉스나 애응지물을 가지고 편협된 것만 본다. 이 착각을 떠나서 완전한 것을 보게 하는 거이 정신분석의 목적인 것이다.
4. 선사와 치료사
선사와 정신분석 치료자와를 잠시 비교해 본다. 마명보살의 기신론(起信論)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에는 業識 · 轉識 · 現識 · 智識 · 相續識으로 파생 된다. 그리하여 업식이 완전히 정화되면 거기서 파생되는 다른 식이 자동적으로 정화 되는 것인데 부처님은 업식이 완전히 정화되어 白淨識이라 하고 보살은 업식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나 전식하여 밖으로 투사하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식 이하가 완전히 정화되어 있는 거이다. 서양의 정신분석에서는 성숙된 치료자는 노이로제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이것을 스스로잘 조절하여 투사을 하지 않는다. 이점은 선사와 공통적인 점이라 하겠다.
정신분석에서는 자기분석에 성공한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을 분석할 수 있게 돤다. 5년 되든 10년이 되든 깨달아야 한다. 불교에서 근기에 따라 깨치는 차가 있는 거와 같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치료하지 못한다.그래서 졸업장을 못 받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솔직히 자기를 털어 내놓지 않는데 원인이 있다.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자기를 속이지 않아야 정신건강이 오는 것이다. 이 점은 불교에서 스스로 깨달은 자여야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
다음에 서양의 정신분석 치료자는 개인을 넘어서 환자나 이웃 국가 민족 사회 인류전체에 대하여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하는 것인데 이 점을 보살도 정신과 같은 것이라 하겠고 또한 보살은 중생상을 내지마라 하는 것이어서 나는 보살이다 너는 노이로제 환자다, 난 의사다 너를 치료해 준다 하는 샏각??가지면 안 된는 거이다.
禪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지만 대개로 건강한 마음을 총동원해서 망상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 녹여 버리는 것이라 하겠는데 覺이 되면 몽각일여라 하여 꿈과 현실이 일치하게 된다. 정신분석치료에서도 치료가 잘 되면 처음에는 엉뚱한 꿈을 꾸다가 차차 꿈이 현실과 가까와짐을 볼수 있다.
끝으로 정신분석과 동양의 선을 비교해 볼 때 선은 높은 곳을 지향한다 하겠다. 그래서 지도자 없이 혼자 하게 되면 근기가 약한 정신상태가 약한 사람은 도리어 악화할 수도 있는 것이며 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도하는 사람에 따라서 방편을 쓰게 된다. 그러므로 참선하는 사람은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선은 최고를 목표로하고 있지만 정신분석은 그런 방향을 지향하고는 있으나 그와 같은 높은 목표까지는 목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文責 · 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