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년 독일인 제주이트〔예수회〕의 라잘레 신부는 일본 도쿄 근처에 빈민구제소를 설립하고 포교를 시작했다.
9년 후인 1938년에 히로시마로 옮긴 그는 그 곳에 선방을 차렸다. 포교를 하려면 일본인을 좀 더 잘 알아야 했기에 시작했던 선불교 공부에 스스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참선을 잘 하면 더 좋은 카톨릭교도가 될 수 있다며 다른 카톨릭교도에게도 참선을 권유하게 된다.
선방을 차려놓고 서양인을 지도하던 라잘레의 행적은 카톨릭교단으로부터 자칫하면 이단이라고 비난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계속했고, 불교에서 궁극적 목표로 삼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불교도 아니요 그리스도교도 아니요 어떤 종교와도 연관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잘레 신부는 1978년 야마다 노사에게 선사 인가를 받았다. 이후 전세계를 다니며 그리스도교도를 위한 참선 수련회를 연 그는 ‘크리스천 선(禪, Christian Zen)의 시조 격이 되었다. 크리스천 선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을 저 위에 계신 분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시고 내 주변에 계신 분으로 느끼고 또 그분과 대화하기 위해 참선을 수행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교에서 내가 부처이고 모든 이가 불성이 있으니 수행을 하면 누구나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이 그렇게 있음을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선을 하는 그리스도교도가 불교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이 ‘인격적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크리스천 선원은 독일, 네델란드, 프랑스에 여러 곳 있다. 카톨릭과 불교는 둘 다 수도원을 중시하고 그 안에서 세속과 격리된 채 수행을 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1978년부터는 양측이 서로를 방문하여 카톨릭 교도는 절에서 살고 불교도는 카톨릭 수도원에서 몇 달씩 살며 상대방의 수행방식에 몰입해보는 일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방문을 끝내고 돌아가며 한 베네딕트 수사는 말했다.
“수도를 통해 우리는 우주적 원형에 이른다. 어느 종교에서든 수도자는 자신의 인격의 하나됨과 본원적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 수도한다. 이제 작별의 시간을 맞이하고 보니 나는 그 동안 헤어졌던 형제를 다시 만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와 불교 신비주의 및 선불교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던 라잘레 신부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모아놓고 카톨릭 수도원 안에서 선을 가르칠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도를 위한 선(Zen Meditation for Christians)’에서 밝힌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선은 그리스도교를 더 쉽게 믿게 하고 믿음을 소생시킨다. 선을 통한 깨달음은 어떤 면으로는 신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깨달음을 정의하는 선사는 없다. 이는 이원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존재의 실현’이라고 달리 정의해보자. 이 상대적인 존재를 벗어나 궁극적인 존재를 체험하는 것이 불교식 깨달음이라면,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깨달음은 신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절대적 ‘그것’을 봄에 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적 ‘당신’을 봄이 다를 뿐이다.”
실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 한 말이 같은 뜻을 가진 경우는 꽤 있다. 예를 들어 선에서는 “휴식이 운동이요, 운동이 휴식이다.”고 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휴식은 모든 운동의 근원이며 목적이다. 움직임은 쉼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다시 그 곳으로 흘러 돌아간다.”고 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빙겐의 힐데가르트 같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의 말들은 불교권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에크하르트는 “하루가 짐이 되고 시간이 너무나 지루한 사람은 내면으로 들어가 신을 만나라. 그 곳에서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만물은 쉬고 있다.”고 했다. 힐데가르트는 신에 대한 체험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푸르른 것들을 키워주는 산들바람이다. 나는 이슬에서 생긴 비, 모든 풀들이 삶의 기쁨으로 웃음짓게 한다.”
힐데가르트의 이 말은 불교에서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와 내 밖의 것은 다 하나”라고 하는 말과 같다.
15세기에 살았던 니콜라스 추기경은 신에 대해 “경계선이 아무 데도 없고 중심점이 모든 곳에 있는 무한한 원”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불교의 화엄경에서 현상계의 상징으로 보는 인드라의 보망(寶網)과 흡사한 이야기이다.
선사이면서 동시에 조동종의 선사였던 라잘레 신부! 그런 두 개 종교의 직함을 동시에 가지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라잘레 신부가 선사 인가를 받은 산보교단, 즉 하라다-야스타니 법맥은 조동종의 묵조선과 임제종의 간화선을 혼합한 개혁적인 지류였으며, 종파로서는 임제종과도 조동종과도 상관이 없는 독립종파이다. 야스타니 선사에게 불교를 배운 사람으로는 로버트 아잇켄과 필립 카플로가 있다.
1973년에는 고은 야마다 선사가 종파를 이끌게 되는데 서구인 크리스천들에게 개종을 하라거나 인격적 하느님의 개념을 버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없이 제자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야마다 선사가 불교를 가르쳐도 좋다고 허가한 그리스도교도는 총 12명이며 이 중 노사의 자격을 받은 사람은 라잘레 독일 신부, 야게르 독일 신부, 매키네즈 캐나다 수녀, 리엑 독일 수녀로 총 4명이다.
수도원 안에 선방을 차리고 명상을 정기적으로 하는 신부들은 1990년 사망한 라잘레 신부 외에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신부가 있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좋은 불자가 되고 싶다.”
또 “나는 다른 그리스도교도와도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특히 틱낫한 스님과 가장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으며, 불교와 그리스도교 대화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윌리엄 존스턴(William Joh-nston) 신부는 크리스천 선에 대한 저서를 냈다. 조앤 리액 수녀는 매리놀 수도회의 수녀였지만, 선불교 스승이 된 지금은 독일에서 법회를 하고 시애틀에 삼보 승가를 세웠다. 또 제주이트 신부였던 루벤 하비토는 76년 사미계를 받고 동경대에서 박사학위를 한 후 텍사스주에 마리아 캐논 선센터를 설립하고 좌선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