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2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는 눈길을 끄는 헤드라인이 있었다.
“자비로운 기술과 선(禪)이 만나다”
뉴욕 주 용커스 시에 선원을 가지고 있는 글래스맨 선사는 ‘일=선 수행’이라는 신념 하에 제과점을 차려 빈민에게 제빵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불교를 통해 삶을 건강하게 꾸려가는 법을 가르치고 인도했다.
스스로 살아가는 독립 기능을 오래도록 잃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빈민들은 마약이나 술에 찌들어 있었고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몰랐기에 그들에게는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글래스맨 선사는 이들에게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 전천후 사업을 펼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명상으로 시작하는 규칙적 제빵 작업 스케줄, 마약을 끊어야만 살 수 있는 무료 아파트, 젊은 엄마들이 일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료 유아원 등을 세워 넘어진 자, 실의에 빠진 자들의 삶 곳곳에 이들을 지켜주는 버팀목을 세운 것이었다.
버나드 데쓰겐 글래스맨 스님은 뉴딜정책을 기획한 자유주의자나 60년대 혁신주의자에게나 가능했던 규모의 인간 계발의 꿈과 사회 변화의 비전을 지녔기에 미국 불교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는 UCLA에서 응용수학 박사학위를 딴 재원이며 미국 유수의 국방산업체인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화성 스페이스셔틀 프로젝트 팀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또 조동종에서 최초로 스님이 된 미국인이기도 하다.
1968년 로스앤젤레스 선원에서 마에즈미 노사에게 선을 배우기 시작하여 1970년 사미계를 받고 1976년 법을 가르칠 자격을 얻은 그는 최고의 학벌과 중역의 자리를 버리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서 1979년 뉴욕선원(Zen Center in New York)을 열고 젠 피스메이커 오더(Zen Peacemaker Order)라는 신종을 설립하고는 그레이스톤 제과점(Greystone Bakery)를 개업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바로 선’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선은 고요히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대중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레이스톤은 방이 26개나 있는 화려한 고건물이다. 1868년 유명한 성패트릭 성당을 설계했던 건축가의 작품이었던 명가의 별장은 후에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되었는데 100여 년이 지난 후 60만 불에 나온 것을 글래스맨이 매입한 것이다. 그 규모와 화려함 때문에 ‘선(禪)의 힐튼 호텔’이라고도 불리었던 그레이스톤은 몇 사람의 보시로 선불금을 내고 나머지는 융자를 받았다.
첫해에 단기 수련회와 장기 수련회를 23번이나 하고 학생들도 점점 늘었지만 선원의 재정은 점점 나빠졌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1981년 리버데일 요트클럽의 구내식당을 1년 계약으로 운영하였다. 학생들은 부자들에게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언짢아했지만 글래스맨은 이를 일축해버렸다.
“선(禪)은 아무런 차별없이 섬기는 자세를 닦는 것이다.”
선원장이 할 일은 학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흔들어놓음으로써 자기 안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던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학생들은 부유층에 대한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업무이고 어디서부터 선수행이 시작되는 것인지 늘 자신의 마음을 주의깊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글래스맨은 재가자들에게 알맞은 수행 프로그램을 따로 개발했고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그에 따른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각 단계마다 발전을 인정해주는 의식을 마련했다. 그리고 수행자가 재가자든 승가자든 관계없이 스승과 가르침에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 진정 승가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가사를 입고는 있지만 귀의 정신은 전혀 없는 승려가 온전하지 않듯이 성관계가 깨끗하다 해도 스승과 가르침에 자신을 다 주지 않는 승려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40줄에 들어선 글래스맨이 구겨진 옷을 입고 반백의 수염을 기른 채 1주일씩 ‘길거리 참선(street retreat)’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었다. 그는 왜 선원을 떠나 노숙자와 함께 지하철 역에서 자고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를 제대로 도우려면 그 사람과 같은 생활을 하며 그 사람의 고통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행위를 ‘그대로 보기(bearing wit-ness)’라고 부른다. 이 세상의 고통을 직접 보고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글래스맨이 대중에게 다르마를 전할 때는 격식 없는 소박함이 돋보인다. 자신을 그냥 버니〔Bernie, 그의 이름 ‘버나드’의 애칭〕라고 부르라는 그는 장난기도 많고 유머감각 또한 풍부하다. 1997년 1월의 한 강연회에서 글래스맨의 거창한 타이틀을 여러 개 나열하며 소개한 사회자의 열띤 멘트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격식없고 진실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버니입니다. 실은 저는 중독자예요. ‘나 중독증’에 걸려 남이나 다른 생물은 잘 보이지 않는 증세지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나 중독증’이 조금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운이 좋아서 한 40년 쯤 전에 선(禪)이라는 치유 프로그램을 만났어요. 그래서 치유가 되었냐고요? 조금은 되었는데요. 완전한 치유는 힘들겠더라고요.”
글래스맨은 현대인에게 가장 심각한 병이 ‘아귀’의 문제라고 본다. 그가 말하는 아귀는 단지 배고픔으로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명예가 부족해서, 권력이 모자라서, 재산이 고파서, 사랑에 목말라서 이들은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배고픈 아귀가 되었다. 더욱 슬픈 것은 불교도를 비롯한 구도자들이 깨달음을 좇는 아귀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서운 의지와 열성으로 공부를 하던 그는 계속 정진했더라면 한소식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통이 너무 심한 것을 본 그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온몸으로 부딪쳐서 불교를 삶과 사회에 실천했던 그는 말한다.
“깨달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좌선만이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좌선을 아무리 해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좌선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도 그 마음과 행이 이미 깨달은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