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년대 중반 서양의 불교도 수를 보면 1위는 불교도 3백만~4백만명으로 총인구의 1.6%를 차지하는 미국이 차지했다. 2위는 러시아, 3위는 프랑스, 4위는 영국, 5위는 독일이다.
미국에서는 90%의 불교단체나 수행센터가 모두 70년대와 80년대에 생겨났다고 한다. 미국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고 이질적으로 다른 문화를 공부하던 초기단계를 넘어서서 이제는 미국불교를 논하고 미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할 때라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자신이 불교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문화와 철학과 예술로서 불교를 좋아하는 잠재적 불교인구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서양이 불교를 만난 효시는 기원전 1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장군 메난데르(Menander)가 인도를 침공한 이후 결국 인도 북서부의 왕으로 남게 되었다. 훌륭한 장군임과 동시에 현명한 통치자였던 그는 후에 불교도가 되어 인도인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고 그가 비구승 나가세나에게 불교를 배운 기록이 밀린다왕문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인도 대륙을 침공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내면을 침공한 것은 그가 정복한 백성들의 철학이었다.
이후 1800년대에 서양에서는 힌두교와 노장사상 같은 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메난데르 이후 거의 2000년 동안 잊혀졌던 불교가 서양에 다시 전해진 것도 1800년대 중반이었다.
이후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정신 문화와 삶의 방식에 의심의 눈길과 의문을 던지며 대안을 찾는 대대적 움직임을 세 차례 겪는다.
1870년대에 일어났던 첫번째 움직임은 불교가 다시 전해진 지 얼마 안 되어 생겼고, 이후 1920년대에 세계종교회의의 여파로 다시 한번 움직임이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1960년대에 서양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한 번씩 서양대륙의 변화의 물결이 지나갈 때마다 동양학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매번 더욱 커졌다. 이런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불교의 무엇이 서양인들에게 어필하는 걸까?
첫째, 서양문명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나 세대(Me Generation)’라고 해서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고 살다보니 그 ’나’가 주체할 수 없는 골치 아픈 것이 된 것이다. 또한 물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쌓인 물건에 소유당한 삶이 되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사유(思惟)의 끝을 본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여 물질과 정신을 이원화하고 생각과 이성을 인간의 상위 개념으로 놓았다. 숭산 스님은 바로 이러한 서양인의 이성과 사유의 밑바닥을 치는 질문을 한다. “생각이 끝나는 그 곳에 무엇이 있는가?”
둘째, 물리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不二)의 원리가 당연한 것으로 정립되어 있었다. 물리학의 발달, 특히 양자역학의 발달로 인해 이성적·합리적인 사고로도 불이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셋째, 사람들의 스트레스 수위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권이 점점 더 흙과 멀어져가고 직업 역시 세분화하다 보니 인간의 소외가 가속화되고 몸 따로, 마음 따로의 경향이 극에 달했다.더구나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보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도 속출했다. 70년대에 들어 불교 명상이 기공과 함께 스트레스 치료와 예방에 효과적임이 판명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가속화했다.
넷째, 불교가 창조주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 서양의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에게 어필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논리에 어긋나는 점이 많았던데다가 근본주의 그리스도교들의 극단적이고 편협한 신앙행위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더 이상 내리누르는 신, 억압적인 신을 모시고 싶지 않은 마음이 팽배해있었던 것이다.달라이 라마는 바로 서양인의 이런 마음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일종의 무신주의이며 동시에 뭇 생명을 고루 소중히 여기는 일종의 휴머니즘이라고 늘 말한다.
다섯째, 불교의 융통성과 포용성이다. 불교는 문학과 예술로 전해질 수도 있고 철학으로 전해질 수도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다도, 검도, 합기도, 꽃꽂이, 서예 등이 선불교의 일환으로 서양에 전해졌다. 또한 불교 내에서는 각 종파간의 포용성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타종교에게도 불교만큼 포용성을 보이는데 이러한 포용성은 타종교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다. 오늘날 서양에서 이는 신선한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간 화합회의를 주재하는 것도 불교쪽이 많이 하고 있다.
여섯째, 불교를 처음 전수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국가적 차원으로 불교를 믿고 있는 티베트와 동남아 일대의 정치적 불안으로 수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가서 활동을 편 것이 서양불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일곱째, 새로운 문화권에 맞는 불교의 변신이다. 여기서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은 위의 아시아권 스님들과 이분들이 키워낸 서양인 제자들이다.
아시아의 불교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전파하던 불교는 이민자들이 고향에서 믿던 종교를 그대로 믿고자 절을 짓고 스님을 모신 경우인데 이런 불교를 서양에서는 ‘수하물 불교(Baggage Buddhism)’라고 한다.
새 지역의 문화에 맞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던 이들에 반하여 ‘백인 불교(White Convert Buddhism)’라고 부르는 것이 대두되었다. 바로 자국민이 불교를 배워 스님이나 법사가 된 후 가르침을 펴는 경우인데 수많은 저술이나 연구도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불교는 ‘아시아의 옷’을 벗고 서양의 땅에서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변형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정수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