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아상(我想),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그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그걸 뭉개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스스로와 남을 분별합니다. 저는 선 수행을 통해서 예전보다는 훨씬 덜 하지만 여전히 분별합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겁니다. 특히 누군가 나를 비방하거나 아프게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남과 자신의 구분을 더 강하게 하게 됩니다. 『금강경』에서는 그게 잘못된 견해라고 말하는 겁니다. 『금강경』은 우리와 타인이 하나이고,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같은 체(同體, same substance)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제 스승인 영화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매우 현명하시기 때문에, 아주 명백히 우리를 모두 똑같다고 보시는 겁니다. 박애주의자를 표방하거나 우리에게 멋진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는 분별하지 않아요”, “우리 불자들은 분별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사실 불자나 스님들에게도 잘못된 견해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감정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한 행동을 비난합니다. 그건 잘못된 견해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두 다릅니다. 키가 다르고, 피부색이나 종교적인 믿음이 다릅니다. 현실이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더 똑똑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싫어합니다. 또 어떤 다른 이는 불교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두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불성이라 불리는 동일한 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뛰어나고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낫고 더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불교에는 무슨 일이 생깁니까? 부처님께서는 그걸 깨달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선, “오 나는 내가 부처이고 그들도 부처가 될 거란 걸 깨달았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선 여러분이 좋건 싫건 부처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애써 불교를 가르치거나, 불교를 믿게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좋건 싫건 미래에 부처가 될 겁니다. 시간문제입니다. 『금강경』에서 보살은 “어떤 중생도 제도한다고 보지 않는다” 했습니다. 우린 일시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모두 같은 원천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모든 강이 바다로 돌아가듯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 돌아가고 결국 부처가 될 겁니다. 누구는 “바다로 가기 싫어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관점의 차이, 시간적 관점 그리고 물리적 위치 차이 때문에 다른 겁니다. 지금 당장 우리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키가 작고 어떤 사람은 큽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믿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건 모두 일시적입니다. 바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우린 모두 변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불과를 향해 진화합니다. 그러니 누군가 묻기 전에 도우려 하거나, 불교에 대해서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현안(賢安, XianAn) 스님
2012년부터 영화 선사(永化 禪師)를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2015년부터 미국에서 명상을 지도했다.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 후 스승의 지침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정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