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천안관음보살
인간 삶 속 깊숙이 스며든 관세음보살
고대 삼국의 역사 기록이자 불교 설화집인 『삼국유사』에는 관음설화가 유독 많이 수록돼 있다. 관음신앙이 신라 시대에 크게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현세이익을 기원하는 대상으로서 일상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관음보살,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불리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자비로써 구제하는 보살이다. 흔히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일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진 모습으로 형상화해서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이라고도 한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에 의하면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音]을 관(觀)하고 해탈시켜 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큰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큰물을 만나도 얕은 곳을 곧 찾게 되며 어떤 악귀도 괴롭힐 수 없다. 칼과 몽둥이는 부러지고 수갑과 고랑과 칼과 사슬은 끊어지고 깨어진다. 중생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을 물러나게 한다. 복덕 많고 지혜로운 아들이나 단정한 딸을 바라는 이가 원하는 자식을 얻도록 하는 영험함도 있다. 결국, 관세음보살은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없애줌으로써 인간의 본원적인 속박을 해체한다.
중생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인 관음은 고통의 탄식부터 낮은 소리의 한탄, 심지어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숨의 숨결까지 듣는다. 중생은 관음의 구제 원력을 소망하는 절실함과 관세음보살을 읊조리는 소리만 있으면 어떤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면 고난에서 벗어나게 된다니, 관세음보살은 최상이자 최적의 고난 해결책인 셈이다.
『아미타경』에서도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좌측 협시보살로서 중생을 보살피고 도와줄 뿐 아니라 극락정토 왕생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기술돼 있다. 살아서 보살피고 죽어서 극락왕생의 길에도 함께 하는 관음의 원만 광대한 자비심은 인간의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관음보살은 마치 인간사의 고난을 헤아려 듣고 온유한 곁을 내주는 만능 해결사 같다. 이처럼 세상을 구하고 현세적인 실익을 베푸는 관세음보살은 인간의 일상 안으로 파고들어 신앙이자 생활 구제 방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눈먼 아이 눈뜨게 한 분황사 천수대비
『삼국유사』 관음설화 가운데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은 비애를 감동으로 승화해 신심을 돈독하게 하는 관음 영험담이다. 이야기를 간추려보자.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살던 희명(希明)은 난 지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미가 아이를 데리고 분황사 천수대비 앞으로 나아가 아이에게 기원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니 아이가 눈을 뜨게 됐다.
희명이 눈을 달라는 기도의 말을 올린 천수천안관음은 6관음의 하나로, ‘천수천안관세음’, ‘천비천안관음’, ‘대비관음’이라고도 한다. 천은 무량·원만을 의미하며, 천수(千手)는 무한한 자비를, 천안(天眼)은 지혜의 원만자재함을 나타낸다. 천수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천안은 중생의 고통을 살펴 모든 서원을 성취시켜준다. 즉, 천수천안관음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를 극적으로 형상화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천수천안관음을 향해 부른 향가 「도천수대비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릎을 곧게 하고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천 손의 천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으사 둘 없는 저입니다. 하나를 그윽이 고치기 바라나이다. 아아, 놓아주신 자비야말로 클 것이외다.”
기도문의 보편적 형식인 ‘칭명-예경-청원-찬탄’을 따르고 있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음이 눈 하나쯤 내어주는 자비를 베풀어주길 간청하는 노래이다. 천 개의 손바닥 하나하나에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구제하는 천수천안관음의 한량없는 자비심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그렇기에 향가 「도천수대비가」는 절실한 애원의 언어이다.
중생의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관음 영험
위 이야기에서 ‘희명’이 아이의 이름인지 어머니의 이름인지, 가상 인물인지 실존 인물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명명법으로 미루어 볼 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아이의 정체성을 ‘밝음을 바란다’는 뜻의 ‘희명’으로 표상했을 것이다. 향가 「도천수대비가」를 어머니가 지었든, 5세 아이가 지었든, 분황사의 기도문을 그대로 인용해 불렀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노래를 부른 주체를 규명하기보다 향가가 초래한 결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본질은 관음이 눈먼 아이에게 광명을 가져다주었다는 신묘한 영험에 있다.
눈먼 어린아이와 가난한 어머니, 이 무력하고 소외된 중생이 의지할 곳은 관음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너른 품이었고, 눈먼 아이는 결국 눈을 뜨게 됐다. 이처럼 관음의 자비심은 관음보살을 늘 생각하고, 환난에 닥쳤을 때 그 이름을 부르고 예를 올리는 것만으로 구제력을 발휘한다. 관음보살의 자비(慈悲)와 위신력(威神力)은 중생의 희망이자, 고난을 감내하게 하는 힘인 셈이다.
궁핍한 현실을 사는 중생은 희망에 기대기 쉽다. 무모해 보였던 희망과 기대가 현실이 될 때, 신앙심은 증폭한다. 관음은 힘든 삶은 견디는 중생의 애잔한 탄식을 듣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줌으로써 중생을 위로한다. 중생의 기원에 답하는 관음보살의 영험담은 힘든 삶은 견디는 중생들에게 위로를 건넸을 뿐만 아니라, 관음보살을 현세이익을 위한 신앙으로 공고히 뿌리내리게 했다.
현명한 어머니, 효심 깊은 딸로 현현하는 관음
희명이 눈을 뜬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성의 숭고함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실명은 세상과의 단절이다. 시각의 상실은 세상을 인식하는 감각의 창 가운데 하나가 닫힌 상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의 고통은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머니의 기도는 절박하고 간절하다. 아이의 기도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듯 진솔하다. 아이가 천수천안관음에 드리는 기도는 사실 어머니를 향한 발화이자 어머니 자신의 갈급한 소원이다. 아이는 천수관음이 무려 천 개의 손과 눈을 가지고 있으니 한 개쯤 자신에게 내어준다면 그 자비로움이 얼마나 크겠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어머니는 자신과 관음을 감정적으로 동일시하고, 자신의 애절함에 공감한 관음이 아이에게 눈 하나를 내어주리라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설화 속 자애롭고 자비로운 관음은 모성의 구체적 현현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를 아이가 겪는 불운의 책임을 모두 어머니에게 돌리고, 아이를 구원하기 위한 적극적 희생을 어머니에게 강요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전통적 가치체계에서의 순종적 어머니상과도 겹쳐진다. 숭고한 모성에 대한 신화는 자칫 여성에게 모성을 강제함으로써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여성의 역할을 제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여성 억압의 이면에는 모성이야말로 신성(神性)에 근접한다고 역설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희명의 개안 설화는 모성을 관음의 영역에 포섭함으로써 신성으로 승화한다. 어머니이기에 아이의 불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할 수 있다. 어머니가 느끼는 정서적 일체감은 모성이 극대화한 것으로, 타인의 고통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자비를 베풂으로써 그 고통을 해결하는 관음의 포용력에 가깝다. 관음은 모성으로서 현현하고 어미는 관음과 아이를 매개한다. 모성과 관음의 자비가 다르지 않음을 관음설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셈이다.
희명의 개안 설화는 고대소설 『심청전』을 연상시킨다. 실명한 자식과 아비를 극진하게 보살핀 어미와 딸이 보여주는 여성으로서의 행태가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심학규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소녀 심청의 갸륵한 효심은 희명 어머니의 모성과 닿아 있다.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심청은 결국 용궁을 거쳐 연꽃 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와 왕후가 된다. 심청의 지상 복귀와 상승은 해수관음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볼 수 있다.
희명의 개안 설화와 『심청전』은 관음의 무변광대한 자비 실천이 민간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모성과 효심이라는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관음신앙은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 효심 깊은 딸의 모습으로 재생산되며 불교적 감응을 확산했다.
이전과 다르게, 바르게 볼 수 있도록
설화 속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개안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아이의 절망과 그 어미의 참담한 심정을 헤아린 관음은 자비를 베푼다. 불교에서 눈은 육안을 넘어 영적인 각성을 의미한다. 아이 희명의 개안은 시력의 회복과 동시에 다시 태어남, 즉 영적으로 승화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상징한다. 실명으로 상실을 체험한 아이는 개안을 통해 삶의 굴곡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지 않았을까. 이적(異蹟, 기이한 일)의 신비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신앙심은 깊어지고 부처의 자비에 보은하려 보살행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됐으리라. 이처럼 관음은 우리에게 이전과 달리 보고, 바르게 볼 수 있는 혜안을 갖추길 권한다. 진정으로 눈을 떠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신성은 내 마음에도 있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자애로움을 스스로 길러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음보살이 우리에게 전하는 생의 태도가 아닐까.
최정선
동덕여대 교양대학 부교수. 미국 코넬대에서 일본문학 석사학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릿쿄대(立敎大) 일본문학과 방문교수, 인문학대중화사업단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신라인들의 사랑』, 대표 논문으로는 「관음의 모성성과 깨우침으로 풀어본 盲兒得眼歌 비교연구」, 「沙石集에 나타난 無住道曉 불교가론」, 「沙石集 和歌의 불교적 해석」, 「텍스트마이닝을 통한 향가 연구사 검토와 분석」 등이 있다.